작가로서 바라보는/추구하는 좋은 작품의 기준
동시대 미술에서 작품의 퀄리티와 가치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 과연 동시대 미술에서 퀄리티와 가치를 논의할 수 있을까? 시장에서 비싼 작품이 좋은 작품일까? 작품을 감상할 때는 개인의 취향 혹은 유행이 작품을 감상하는 기준일까? 작가가 어떤 공간에서 전시를 했는지, 작가가 어떤 재단의 후원을 받았는지가 작품의 퀄리티를 판단하는 기준일까? 작가의 입장에서 이 문제들은 작품을 할 때마다 직면하는 문제이다. 대답하기 어려운 애매모호한 질문과 문제임에도 여전히 미술계 내부에서는 암묵적인 질적 판단이 이루어지고 있다. 앞서 언급한 질문에서 출발한 나의 고민은 ‘작가로서 어떻게 작업을 해야 좋은 작품을 제작할 수 있고, 그렇다면 좋은 작품은 무엇인가’하는 지점에 도달한다.
(아래는 다른 비평가들이 생각하는 좋은 작품에 대한 기준을 내가 정리해둔 것이다)
미술사적으로 이전에는 미술의 매체적(혹은 장르적) 구분이 명확했다. 아주 예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회화와 조각으로 단순하게 분류가 가능했다. 하지만 각 매체가 스스로의 한계와 마주하면서 다양한 방식으로 변화하기도 하고(회화적인 조각, 조각적인 회화 등), 미술에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여겨졌던 매체(퍼포먼스, 기성품, 사운드 등)가 미술로 편입되기도 했다. 여기에 더불어, 지금은 기술의 발달로 인해 더 많은 새로운 매체(영상, AR, VR, 미생물 등)가 생겨났으며 각 매체 간의 융합도 훨씬 더 많아졌다. 어떠한 매체라도 미술에 사용될 수 있으며, 이로 인해 공모에도 ‘다원 예술’이라는 파트가 따로 있을 만큼 각 장르 간의 경계도 모호해졌다.
그린버그는 예술이 자신의 한계에 굴복하는 과정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했다. 예를 들면, 회화는 매체가 평면적이기 때문에 그림이 평면적이면 평면적일수록 좋은 작품인 것이다. 반대로 회화가 평면적인 자신의 문제를 받아들이지 않고 조각적 환영을 흉내 내려고 한다면, 이것은 그린버그 입장에서는 좋지 않은 회화이다. 그에 따르면 회화는 회화다워야 하고, 조각은 조각다워야 한다. 계속해서 새로운 장르와 매체가 생겨나고 이것들이 서로 교차하는 지금의 미술에서, 장르 간의 구분을 통한 각 ‘장르다움’을 미술 가치 판단의 기준으로 두기엔 다소 어려운 지점이 있다. 또, 그린버그식의 가치 판단 기준 아래에서는 작품의 주제가 매체에 소속되어 버린다. 하지만 모두가 알고 있듯이 미술에는 개인적 경험, 젠더, 사회적 문제 등 다양한 내용과 주제를 가진 작품들이 많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주제를 다뤘음에도 미술사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은 미술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형식주의를 옹호하는 그린버그와 마이클 프리드는 미술 작품 이외의 것이 미술 작품을 감상하거나 평가하는 데에 영향을 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미술 작품은 오롯이 작품 그 자체로서 평가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감상자나 공간으로부터 독립된 것으로 여겼다. 하지만 마이클 프리드가 연극적이라고 비판한 지점들은 현재까지도 여전히 연극적인 채로 남아있다. 이 지점에서 그만큼 작품을 감상할 때 작품 외의 것들이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이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전시 디스플레이 방식일 수도 있고, 작가의 경험이나 정체성일 수도 있다. 또한 감상자의 경험일 수도 있고 사회적 이슈일 수도 있다. 작품 외에 다른 것들이 그 작품을 감상하는데 필요한 부분이 되었기 때문에 그린버그식의 좋은 작품이 아니더라도 아직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형식주의자들을 옹호하되 연극적인 부분까지 인정하는 하먼은 좋은 작품은 매혹(allure)이라는 미적 경험을 일으켜야 한다고 했다. 작품을 자율적인 것으로 두는 형식주의의 태도에 연극성까지 부인하지 않는다는 것은 작가인 나에겐 꽤나 매력적인 부분으로 다가왔다(왜냐하면 작가 입장에서 작품이 디스플레이 방식을 신경 쓰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작품을 자율적인 실재 객체로 둔다. 실재 객체인 작품을 인지하기 위해서는 감상자라는 또 다른 실재 객체가 몰입해서 감각 성질을 받아들여야 한다. 미술 작품은 공감을 일으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나는 작품을 작품대로 존중하면서 감상자를 감상에 필수적인 요소로 여기는 그의 논리에 상당히 동의했다.
하지만 아무리 매력적인 그의 논리라도 모호한 지점이 있다. 그가 말하는 미적 경험이 작품이나 감상자와 분리된 하나의 자율적인 혼성 객체 내부에 존재한다는 점이다. 그는 작품, 감상자, 혼성 객체(미적 경험)를 모두 분리된 것으로 보고 있는데, 여기에는 관계성이 빠져 있다고 생각한다. 감상자가 겪게 되는 미적 경험이 감상자 내부가 아니라 또다른 객체의 내부에 있는 것으로 바라본다면, 세상의 모든 객체들은 서로 진정으로 관계 맺을 수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방식이라면 감상자는 작품을 감상했다고 할 수 있을까? 작품은 한 번 더 홀로 남아 또 다른 가치 판단을 기다리게 될지도 모른다.
작가로서 바라보는/추구하는 좋은 작품의 기준
클레멘트 그린버그, 마이클 프리드, 그레이엄 하먼 모두 형식주의의 관점에서 각자의 미술 가치 판단 기준을 이야기했다. 작가로서 형식주의적인 측면을 아예 배제하진 않지만, 그들의 논리를 모두 동의하는 것도 아니다. 형식도 물론 중요하거니와 나는 그 외에 다른 몇 가지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작업한다. 나의 이 기준들은 내가 작업을 할 때 적용되기도 하지만, 내가 다른 작가의 작품을 감상할 때도 적용되는 기준이기도 하다. 다르게 말하면, 다른 사람들이 내 작품을 감상할 때 봐주었으면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일 지도 모르지만, 내 기준을 풀어보려 한다.
내가 작업을 하면서 두는 기준은 시각적인 매력, 관계 맺음, 공감, 상상이다. 이 시각적인 매력은 형식주의자들이 언급한 형식들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나는 그린버그처럼 회화를 평면으로만 대하지 않을뿐더러, 각 매체 간의 융합 역시 옹호하며 작품 디스플레이 방식도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시각적인 매력은 감상자에게 시각적으로 어떠한 감각이나 느낌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시각적으로 반드시 아름다울 필요는 없으며, 그로테스크 하더라도 그로테스크한 시각적 감각을 준다면 괜찮다. 이것은 아마도 내가 기본적으로 미술을 시각 예술이라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두 번째 기준인 관계 맺음은 작품과 감상자의 관계 맺음이다. 작품이 작품으로서 존재하려면 감상자가 있어야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기술 역시 사회에서 사람들이 사용해야만 의미가 있듯이 작품 역시 마찬가지라고 생각한다. 작가인 내가 아무리 깊이 고민해서 작품을 제작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보는 감상자가 없다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단순 취미 생활로 작품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감상자들의 반응이 어떻든지 간에 내 작품을 작품으로서 인정하고 감상하는 사람이 있어야만 오히려 자율적인 작품으로써 존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세 번째 기준인 공감은 앞의 관계 맺음과 이어진다. 감상자가 작품과 관계 맺었다면, 작품은 감상자로 하여금 공감을 불러일으켜야 한다. 나에게 공감은 일종의 설득 같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드시 감정적인 공감(기쁨, 슬픔, 행복, 우울 등)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작품의 주제 혹은 내용과 작품을 하는 동안 지니고 있던 나의 생각과 감정이 잘 전달되는 것이다. 만약 내가 행복과 같이 감정을 주제로 작업을 했다면 감상자에게 그 행복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하고, 만약 내가 ‘인간은 감정을 지닌 존재이다’와 같이 생각을 주제로 작업을 했다면 그 생각을 전달할 수 있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상상은 작가의 상상보다 감상자의 상상에 더욱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미술을 포함한 모든 예술 작품은 도큐먼트나 뉴스가 아니다. 내가 생각하는 예술이 도큐먼트나 뉴스와 다른 점은 감상자의 상상이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똑같은 영화를 보더라도 각자의 경험이나 가치관에 따라 결말을 다르게 해석하듯이 미술 작품 역시 그 부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는 작품을 통해 작가인 나의 생각과 감정, 가치관 등을 단순히 전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감상자들이 생각하고 느끼고 상상할 수 있는 부분을 작품에 남겨두려 한다.
글을 시작하면서 이야기한 ‘어떤 작품이 좋은 작품일까’에 대한 나의 고민에서 출발해 몇몇 비평가들의 생각을 짚어보고 나의 생각도 정리해 보았다. 글에서 언급한 비평가들이 말한 좋은 작품의 기준이 동시대 미술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나 역시 그들의 생각에 동의하는 부분들이 있기도 했으니까 말이다. 그들의 논리 중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되, 내 나름의 기준도 정립해가며 작품을 지속하려 한다. 내가 세운 기준 네 가지가 아직까지는 서툴고 모호한 지점이 있을지도 모른다. 또 누군가는 너무 개인적인 기준이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탐구하면서 내가 생각하는 좋은 작품을 꾸준히 이어 나가고 싶다. 작가로서 추가적인 바램은 나의 작품이 감상자들에게 많은 공감과 상상을 일으키는 작품이 되었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