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 큐레이터에서 법대로 가다.
안녕, 몇 안 되는 구독자님들.
그동안 잘 지내셨는지?
나는 그동안 호주에서 큐레이터로서 바쁘게 지내면서 전시회들을 만들고 있었어. 그 안에는 진짜 언젠가 글로 쓰면 웃길 드라마도 있고, 좀 서글픈 이야기들도 많아. 언젠가 하나씩 풀어볼 수 있으면 좋겠어.
현재는 <The Glass Narrative> 유리 이야기라는 전시회를 하고 있어. 이번 전시는 정말 신기하게도, 처음으로 아티스트들이랑 아무 문제 없이 마무리되고 있어서 너무 고마운 마음이야. 드라마도 없고, 다들 프로페셔널하게 잘 맞춰줘서 진짜 감동이었어. 올해부터 호주 유리 공예 협회 이사로 활동하고 있고, 나는 큐레이터로서 평소에 유리 공예 작품에 대해 굉장히 애정이 있었거든. 좋은 동료들도 만났고, 관람객들 반응도 좋아서 개인적으로 많이 감사한 전시야. 이 전시에 대한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따로 써볼게!
지금 새벽 4시에 잠이 안 와서, 그냥 좀 털어놓고 싶은 얘기가 있어.
호주에서 이민자로 살면서, 특히 이민 여성 큐레이터로 일하면서 진짜 별별 일 다 겪었어. "먼저 온 이민자들" — 그러니까 백인들이, 내가 영어가 제2외국어라는 걸 이용해서 말도 안 되는 가짜 ‘법’ 얘기하면서 협박하는 건 진짜 기본이고, 조금만 자기들 마음에 안 들면 “변호사 부르겠다”, “법적으로 대응하겠다”는 소리는 수도 없이 들었지. 큐레이터로 일하면서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안 해주면 그렇게 협박하는 경우가 꽤 있었어.
이런 일들을 겪다 보니까 나도 법에 자연스럽게 관심이 생기더라고. ‘아, 이민자로서, 동양인 여성으로서, 이 나라에서 살려면 법은 꼭 알아야겠구나’ 싶었어. 특히 예술계에서 일하면서 생기는 문제들을 법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단 생각이 점점 커졌어. 나는 이 분야에서 실제로 부딪힌 일이 많으니까, 오히려 남들보다 더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도 있었고.
사실 나는 작년부터 올해까지 PhD 박사 과정 준비를 했었어. 내 박사 과정 연구 주제는 ‘아시안 이민자 예술가들이 호주 미술에 끼친 영향’이었고, 이게 내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지. 근데… 준비하면서 생각지도 못한 벽들이 있었어. 어떤 사람들에겐 내가 굉장히 불편했겠지.
화도 나고 억울해서 홧김에 Juris Doctor 법학박사 과정에 그냥 ‘감정적으로’ 지원했어. 현재 지원이 열려있는 시드니에 있는 두 학교—UNSW랑 맥콰리 대학교—에 넣었는데, 3일 만에 UNSW에서 합격 오퍼가 왔어. 그것도 정부지원 CSP로. 원래 학비가 18만 4천5백 불이 넘는데(대략 한국돈 1억7천만원) CSP 덕분에 5만 7천5백 불만(대략 한국돈 5천600만원) 부담하게 됐고, 그것도 HECS-HELP 덕분에 당장 안 내고 나중에 직장에서 일정한 수입이 생기면 조금씩 갚는 구조야. 그나마 예전 학업 때도 CSP 썼던 경험 있어서 아직 여유가 좀 있더라고. 진짜 호주 정부한테 고맙단 생각밖에 안 들었어.
UNSW랑 맥콰리 둘 다 합격했는데, 난 내가 현재 일하고 있는 UNSW로 결정했어. 왜냐면 지금은 내가 UNSW 교직원이라서, 학생 때랑은 달리 주차장도 이용할 수 있고 몇 가지 혜택들도 받을 수 있거든. 이게 진짜 차 있는 사람들한텐 아주 중요한 문제야. 우리 집이 학교랑 좀 멀어서 더더욱 그렇고!
새벽 4시에 그 합격 메일 받았을 때, 내 첫 생각은 솔직히 “아, 좆됐다…”였어. 왜냐면 UNSW 로스쿨은 호주 랭킹 1위고, 세계 랭킹도 13위거든. 근데 내가? 영어도 아직 자신 없는데, 그 법대에 간다고? 나 진짜 될 줄 몰랐어. 만약 붙어도 Full Fee만 될 줄 알고, 그냥 합격증만 보고 포기할 생각이었어.
솔직히 지금도 막막해. 앞으로 3년 동안 이 공부를 내가 해낼 수 있을까? 그 생각에 며칠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자고 밥맛도 없었어. UNSW에서 왜 아직 오퍼 수락 안 했냐고 연락까지 왔는데, 괜히 신경질이 났어. 자신이 없으니까.
난 이제 나이도 있고, 여전히 영어도 부족한데, 이 고생길을 또 내가 택해야 하나 싶고… 너무 힘들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어.
그리고 웃긴 건—내 원래 꿈은 현모양처였다고 하면 믿어? 점점 그 꿈에서 멀어지는 느낌이야.
UNSW 합격 소식을 SNS에 올렸을 때, 반응이 딱 둘이었어. 평소에 나한테 관심 없던 사람들, 특히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갑자기 DM 보내서 걱정하는 척하면서 절대 이거 공부하지 말라는 조언을 하더라고. 축하 대신에 뭔가 불편해하는 느낌? 솔직히 좀 어이없고 슬펐어. 정작 정말 축하받고 싶은 사람들한테는 축하도 못 받았고, 마치 내가 부족한 사람처럼 느껴지게 만드는 반응도 있었어. 그리고 왜 다들 내가 법 공부한다고 하면 큐레이터 일은 관둘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그치만, 또 반대로는 너무 힘이 되는 반응들도 있었어. 대학 친구들 몇 명은 직접 전화해서 “이건 무조건 해야 해”라고 말해줬고, 나이 많은 호주 큐레이터 선생님도 연락 와서 이러시더라.
“엘레인, 이건 네 인생에서 다시 안 올 수도 있는 중요한 기회야.
이건 분명 네 전문성을 넓혀줄 거야. 큐레이터로서의 경력 쌓는 것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마. 그동안의 네 큐레이터 프로젝트들은 이미 호주에서 탄탄하게 쌓아왔고, 넌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어. 아니면 이 공부와 함께 병행해도 되고.
그러니까 무조건 해.”
그 말이 진짜 큰 응원과 위로였어.
그래서 결국 마음 다잡고, 9월 중순부터 UNSW에서 법 공부를 시작하기로 했어.
UNSW에서는 Juris Doctor를 2년 반 동안 이수하면, 마지막 1년 동안 영국 옥스포드 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데, 이때 옥스포드 대학교 졸업장도 함께 받을 수 있어. 대신, 학업 기간은 6개월 더 늘어나.
그리고 3년 동안 법학 공부를 마치고 나면, PLT라는 실무 과정을 거쳐서 변호사가 될 수 있어.
솔직히 말하면, 내가 잘할 수 있을지 확신이 없어. 언제나처럼 앞이 잘 안 보여.
그럼에도 내가 제일 잘하는 건 ‘버티는 것’인데, 이번엔 과연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어.
사실 나는 이 공부를 하기엔 법 지식도 없고, 많이 부족하다고 느껴.
근데 뭐, 부족하니까 공부하는 거겠지?
솔직히 말해서… 일주일만 하고 관둘 수도 있고, 이주일, 한 달, 몇 달 하다가 포기할 수도 있어.
그래도 딱 1년만 버텨보고 싶어.
1년만 지나면 좀 적응도 되고, 공부 방식도 익힐 테니까.
혹시라도 너무 일찍, 혹은 중간에 그만두게 되더라도 절대 부끄러워하지 않을 거야.
나는 나이고, 나이도 있고, 다른 꿈도 있으니까.
그땐 그냥 마음 편하게 내려놓고, 다시 PhD 준비로 돌아갈 거야.
그래도… 이렇게 시작한 거, 끝까지 잘 해낼 수 있도록 응원해 줘.
언젠가 이민자 출신의 ‘미술 변호사’로서 호주에서 당당히 활동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