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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분이 늦어 이별하는 세상

나른한 백일야화 #1

by 자그니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늦은 점심을 먹고 있었다. 상파울루 '쎄' 성당 광장 근처 골목길, 노천 카페에서. 어디선가 기타 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러우면서 청량한 울림. 거리 음악가 같지가 않다. 상당히 오랫동안 기타를 친 사람의 연주다. 무심결에 귀를 기울이는데, 친구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말한다.


"아아, '기타 치는 조제'가 나올 시간이었구나."


'기타 치는 조제'?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싶어 궁금해지는데, 한국에서 같이 온 '춤따'가 먼저 묻는다.


"기타 치는 조제가 누구야?"
"지금 저기서 연주하는 사람"


조제에 대해 얘기하는 사람은 '여곰=여행하는 곰'이다. 이름이 이상하다고? 당연히 이름이 아니라 닉네임이다. '춤따'는 춤추는 따오기. 춤따 옆에 있는 여자는 춤따의 여자친구, 지니. 우리는 스윙 댄스를 처음 시작했을 때, 지터벅을 배우면서 만난 친구들이다.


춤을 같이 배운 친구들이 왜 브라질 상파울루에서 만나게 됐는 지는 묻지 말아달라. 아주, 아주 긴- 이야기니까. 그러니까 지니가 브라질 삼바 축제에 가고 싶다고 했고, 여름에 삼바 축제가 열린다는 소리를 들은 춤따가 비행기 표를 먼저 예매했고, 뭔가 알리바이를 만들기 위해 놀고 있던 나를 끌어들였다.


...그러니까 우리는, 브라질의 사계절이 한국과 반대라는 사실도 모르고 있었단 이야기다.


삼바 축제가 열리는 시기는 브라질의 여름인 2월 말에서 3월 초. 열리는 곳은 리우 데 자네이로. 하지만 여자친구와 해외여행을 한다는 생각에 들뜬 춤따는 머릿속에 그... 생각 밖에 없었고, 지니와 나는 별 생각이 없었다. 같이 춤을 배웠던 여곰이가 상파울루에 살고 있었으니까.


여곰이와 우리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다. 같이 졸업 공연을 한 것이 전부니까. 지터벅 졸공을 하고, 그 다음 단계인 린디합을 배우지 않고 여곰이는 세계 여행을 떠났고, 거기서 브라질 여인을 만났고, 지금은 상파울루에 자리 잡았다. 처음엔 여행 가이드를 하겠다고 하더니, 지금은 이곳에 진출한 한국 대기업들의 에이전트 일을 하고 있다.


"저 사람, 꽤 유명해"


여곰이의 얘기에 따르면 이렇다. 기타 치는 조제는 원래 작은 카페에서 노래 부르는 가수였다. 그에게는 아름다운 여자친구가 있었는데, 그 여자친구가 멀리 떠나가면서 '쎄' 성당의 위에 해가 뜰 때 만나자-라고 했단다. 그 날 이후 기타 치는 조제는 쎄 성당 위에 해가 걸리는 시간이면 이 곳에 나와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그러길 한 이십여 년 하다 보니, 이젠 기타 치는 조제를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


"이십여 년? 그럼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부터 저러고 있었던 거야?"


지니가 질린다는 표정을 하며 말을 했다. 여곰이는 다시 싱긋 웃었고, 춤따는 저 사람 주로 어떤 곡을 연주하냐고 묻더니, 마시던 맥주를 내려놓고 일어나 멀리 기타 치는 조제에게로 걸어갔다. 그리곤 조제와 뭔가 이야기를 하더니, 큰 소리로 지니를 불렀다. 계산을 하고 우리도 기타 치는 조제가 있는 곳으로 갔다. 가까이 가자 춤따가 손을 내밀러 춤 신청을 했다.


"조제, 신나는 음악도 연주할 수 있데. 락앤롤도 칠 수 있다고 했어!"


지니는 굽이 있는 구두를 신은 탓에 좀 망설이더니, 가방에서 운동화를 꺼내 갈아 신고는 춤따의 손을 잡았다. 여곰이가 내게 물었다.


"대체 운동화는 왜 가지고 다니는 거야?"
"... 버릇,일 걸?"


그때 조제가 기타를 툭툭 치며 박자를 잡더니, 빠른 음악을 연주하기 시작했다. 맙소사. 엘비스 프레슬리의 버닝 러브다! 춤따와 지니는 린디합을 추기 시작했고, 쎄 성당 광장에 있던 관광객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모이자 조제는 흥에 나는 듯 일어나 기타를 치기 시작했다.


아는 사람은 무슨 소리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6, 7, 8월 겨울의 상파울루는 밖에서 춤을 추기엔 끝내주게 좋은 날씨다. 나는 크게 소리를 지르며 박수를 쳤다. 사람들이 다 같이 박수를 치며 두 사람이 춤추는 것을 지켜봤다. 한 곡이 끝나자 한 곡 더. 이번엔 춤따도 흥에 겨웠는지 지니를 번쩍 들어 올렸다. 사람들의 박수 소리가 더 커졌다.


그렇게 3곡을 추고, 조제는 갈 곳이 있다며 광장을 떠났다. 고개 들어 보니 해가 쎄 성당의 위를 벗어나 있었다. 마지막 곡은 락앤롤이 아니라 조앙 지우베르투의 보사노바 곡이었으며, 느리게 춤을 추던 두 사람이 결국 대낮에 블루스를 출 수밖에 없었다는 것은 우리만의 비밀로 하자. 어쨌든 끝내주는 순간이었으니까.




브라질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3개월쯤 지나, 춤따와 지니는 헤어졌다. 춤따는 즉흥적이고 재미있는 일을 벌이는 것을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 하나에 몰두하면 다른 것을 까맣게 까먹어버리는 타입이기도 했다. 그런 것을 지니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파티에 가려고 만나자고 한 시간에 춤따가 10분 지각했던 날, 결국 지니는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약속 시간에 늦는 것 정말 싫어한다고 매일 매일 얘기하지 않았냐며. 니가 이렇게 사니까 지난 브라질 여행도 그 모양이었던 거라고 화를 내며 떠나갔다. 춤따가 회사에서 욕 먹어가며 일찍 나온 거라고 변명할 기회조차 없었다.


뭐, 흔한 일이다. 누군가가 아무리 연애에 노력해도, 상대방에겐 그것이 이별의 전조로 느껴지기도 한다. 한번 어긋난 마음은 그리 쉬이 맞지 않는다. 좋았던 것만 보이던 시간이 안 좋았던 것만 보이는 시간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렇게 사람은 헤어진다.


춤따와 지니가 헤어지고 한 달 후, 여전히 춤따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술친구 노릇을 하고 있을 때, 여곰에게서 카톡이 왔다.


"대박. 기타 치는 조제 기억나지? 결국 여자친구와 만났어!"
"대박. 진짜?"
"ㅇㅇ 근데 조제를 처음 만나서 그녀가 뭐라고 했는지 알아?"
"뭐랬는데?"
"안녕"
"진짜? 그것뿐?"
"ㅇㅇ. 근데 조제도 그 말만 했어. 안녕-"


얘기를 들어보니, 우리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상파울루 TV 방송국에서 '기타 치는 조제'를 취재한 모양이다. 조제의 사연은 널리 알려졌고, 그 소식을 들은 그녀가 조제를 찾아온 것이다.


"근데 겨우 안녕-하고 말았다고?"


둘은 이십 년 만에 만나, 그 말만 하고 서로 한참 쳐다보다 헤어졌다. 조제의 여자친구는 처음부터 다시 돌아올 생각이 없었다. 다른 도시로 갔고, 거기서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며 살았다. 조제도 그 사실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실은 전에, 조제랑 한번 얘기한 적이 있었거든. 그때 물어봤었어. 한 사람을 그렇게 오랫동안 기다린다는 것은 힘들지 않냐고. 근데 조제가 그러더라. 자긴 기다리는 것이 아니래."
"그럼 알고 있었던 것 맞네-"
"아니 그게 아니라. ㅋㅋㅋ 뭐라는 줄 알아?
기다리고 싶으면 루즈역으로나 가보래.
거기서 기다리면 열차가 올 테니까.
그거 타고 가면 된다고.
"ㅋㅋ 뭐야 그게"
"아 그러니까. 오든 말든 상관없다는 거지.
자기는 그냥 약속을 한 거고,
그 약속을 지키고 싶은 것뿐이라고."
"특이하네. 진짜."
"근데..."
"근데 뭐?"
"나, 왠지 그 맘을 알 것 같더라."


여곰이의 아내는 굉장히 사랑스럽게 생긴 여자였다. 인도 여행을 하다 만났고, 6달간 같이 연애 겸 여행을 하다 브라질에서 결혼했다. 한국에선 정식으로 결혼식을 안 올리고 피로연 같은 것만 했는데, 축하 공연을 해주러 갔다가 잠깐 얼굴을 봐서 기억하고 있다. 정말, 너무 사랑스러워서 질투가 날 정도였다. 그리고 1년 후 갑작스런 사고로 죽었다. 그게 벌써 2년 전이다. 여곰이는 '당신이 나를 브라질에서 살고 싶게 만들었다'는 말과 함께 청혼을 했고, 아내가 죽은 다음에도 여전히 브라질에서 살고 있다. 아내와 같이 살았던 집에서.


기타 치는 조제에게도, 그녀와의 만남은 갑작스럽게 닥친 사고였는지 모른다. 그는 한번도 언론과 인터뷰를 한 적이 없다. 다만 누군가가 조제의 기타에 맞춰 우리가 춤을 추는 모습을 찍어 유튜브에 올렸고, 거기에 기타 치는 조제의 이야기를 담았다. 그 영상이 화제가 되면서 기타 치는 조제의 이야기가 알려졌고, 방송은 그의 이야기를 동화처럼 만들어 내보냈다.


그녀와 그렇게 잠깐 만나고 헤어진 다음, 한동안 조제는 쎄 광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광장에서 걸어서 30분 거리에 있는 자신이 운영하는 카페에는 모습을 드러냈다고 하지만, 평소처럼 노래도 부르지 않고 카페에 드나드는 사람들을 멍하니 구경하다 카페 문을 닫고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그의 집으로 갔다고 한다.


쎄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참이 지난 후였다. 나 대신 매일 같이 광장을 들리던 여곰이가 기타 치며 노래하는 조제의 사진을 찍어서 보내 줬다. 그가 어떻게 다시 돌아왔는 지는 아무도 모른다. 광장의 노숙자였다가 그의 노래를 듣고 감동해 큰 슈퍼마켓 사장으로 성장한 남자가 그를 설득했다는 애기도 있고, 조제의 카페에 손님이 줄어들자 다시 호객행위를 하러 나섰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조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기다렸던 사람이 와도, 기다림은 끝나지 않은 것처럼. 기다림을 그냥 기다렸던 것처럼.

그냥 여전히 기타를 치고, 노래를 할 뿐-이라고.





* 안녕하신가영의 노래 '10분이 늦어 이별하는 세상'을 듣고 필 꽂혀서 쓰다.



* 나른한 백일야화는 뭔가에 필 꽂혔을 때 쓰는 글들입니다. 예전엔 '오늘의 주제가'라는 이름으로 글을 썼었습니다.


* 브런치에 쓰는 글에 동영상 삽입은 어떻게 하나요? 혹시 알고 계신 분? 해결했습니다. 유튜브 페이지에 있는 영상공유링크가 아니라, 그냥 웹주소창에 있는 것을 따와 붙여 넣으면 되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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