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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빨래하는얼룩말 Jan 09. 2022

기차모양 연필깎이

나는 아직도 할머니의 시간을 기억한다.

“할머니!” 하고 부르니 

할머니가 깜짝 놀라시면서도 얼굴에 웃음 가득한 얼굴을 하며 나를 반기셨다. 

퇴근길에 갑자기 할머니가 보고 싶어 집으로 가지 않고 할머니 댁으로 향했다. 

우리 집에서 차로 10분이 채 되지 않는 곳에 할머니가 살고 계셨다. 

혼자 간 것이 처음이었다.     


어떻게 혼자 왔냐며, 밥은 먹었냐며 추운데 빨리 안으로 들어오라며 

내게 질문을 쏟아붓고, 내 대답은 들을 마음도 없어 보이셨다. 

“얼른 여기에 앉으라, 여기가 따뜻하매” 하며 자리를 내어 주셨다. 


TV 빛으로만 채워졌던 할머니의 집이 나의 방문으로 인해, 이 방 저 방, 거실의 불이 환하게 밝혀졌다.

할머니는 작은 밥상에 오늘 본인이 드셨던 음식들을 하나 둘 올리시고는 

내가 하겠다는 걸 기어이 말리시며 밥상을 들고 내 앞에 놓으셨다.     

 

사실 저녁을 먹고 갔음에도 불구하고 차마 먹었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할머니의 나를 위한 저녁식사 준비가 꽤나 경쾌하고 즐거워 보였다. 

“할머니 나 배고파요, 뭐 먹은 게 없어” 하며 일부러 배고프다고 할머니를 재촉했다. 

워낙에 입이 짧은 나였지만 할머니가 가득 퍼주신 밥을 기어코 다 먹었다.      


내가 밥을 먹는 내내 할머니는 켜 두었던 티브이를 보지도 않으시고, 

내가 집는 반찬과 내 입으로 들어가는 숟가락만 바라보셨다. 

“이거 더 먹어봐, 고등어 아까 금방 구운 거라, 나 조금 먹고 남아서 다행이여”

할머니의 채근에 나는 “알았어요 알았어요” 하며 다 비워내었다.      


“더 먹으라, 수미야.” 

하는 순간, 나는 ‘아차’ 싶었다.

사촌언니와 나를 할머니는 잠시 착각하셨나 했다. 

내가 손으로 나를 가리키며 “할머니 나는 민경이, 민경이” 하니, “아 맞다. 너 민경이지?”

하고 멋쩍어하셨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가 치매 초기증세가 있어 치료를 받으셔야 한다는 것을 엄마를 통해 들었다. 

단순 착각이라 생각했던 것이, 치매증세 라는 걸 그제야 알아챘다. 그래도 네가 그때 그 말을 해주는 바람에 병원에 모시고 다녀왔다는 엄마의 말씀이 있었지만 내게는 썩 위로가 되지 않았다.      


그 이후로 할머니는 삼촌네 댁에서 함께 생활하셨다. 

그 이후로도 나는 할머니를 종종 뵈러 갔지만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경쾌함은 더 이상 느낄 수가 없었다.      

내 기억의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작은 텃밭에 앉아 쉬는 모습이었다. 

좀 지치셨는지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계셨다. 

“할머니!” 하고 크게 부르니 그제야 “응?” 하며 고개를 돌리시며 나를 보셨는데, 그때도 웃질 않으셨다.      

그렇게 채 일 년이 되지 않았을 때, 할머니는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때 나는 임신 8개월 만삭이었다. 

할머니의 염 하는 모습을 보겠다고 생떼를 부리다 어른들에게 쫓겨나다시피 했다. 

너는 그냥 앉아 있으라고, 임신한 몸으로 그런 거 보면 안 된다는 게 이유였다.

우리 할머니인데, 마지막 모습 보고 인사하면 안 되냐고 할머니 보고 싶다고 그렇게 울며 불며 했지만 결국에 나는 할머니께 마지막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임신한 내 몸뚱아리 때문이었다.      


이제 내 아이들이 커서 제법 연필 쓸 일이 많아졌다. 

연필 깎을 도구를 찾다가 먼지 가득한 기차모양 연필깎이가 눈에 띄었다. 

할머니가 내 초등학교 입학할 때, 입학 선물로 주셨다는 걸 기억했다.      


그때의 할머니는 내가 기억하는 모습보다 삼십 년은 젊고 웃음이 많으셨을 텐데, 

연필깎이도 그만큼 나이가 들어 손잡이가 다 부러져 제대로 돌리진 못하지만 요령껏 돌리면 새것 못지않게 

깨끗하게 깎인다.     


아이들에게 연필을 깎아 줄 때마다 나는 할머니를 떠올린다.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할머니의 밥상의 맛을,

나와 할머니의 단둘만이었던 귀한 시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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