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한국을 사랑하는 백만가지 이유 셋
한국에서 반품께나 해본 아줌마로서.
당근마켓도 쫌 해본 전문가로서.
한국의 택배 시스템을 찬양한다.
쿠팡맨님들께 경의를 표한다.
한국에서 나름 바쁜척하며 살아온 나는
이른 아침 문 앞에 놓여있는
마켓컬리와 쿠팡 상자로 일주일을 연명했다.
간혹 배송 온 상품들 중에 파손되거나 잘못된 제품들이 있으면
사진을 찍어 반품을 요청한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문 앞에 포장된 상태로 놓아두면
마법처럼 그날 저녁에 그 반품상자는 사라지고 없다.
쿠팡은 내 인생의 구원자였고
때로 남편보다 유용한 존재였다.
무더운 여름이면 얼린 물병을 문 앞에 두고 출근하면
기사님들이 한두 개씩 집어갔다.
나는 선량한 멤버십 회원으로서 응당 해야 할 존경의 표시를
얼린 물병으로 했다.
물론 한국의 생수는 미국 생수의 3분의 1 가격이라 가능한 일이었지만.
대한민국의 최첨단 배송 시스템에 길들여진 나는
우리보다 GNP가 몇 배나 놓은 세계최강국으로 이사를 오면서
미국은 아마존이 있잖아. 걱정하지 마.라는 위로를 받았더랬다.
미국에 도착하고 이런저런 생필품들을 사들일 때였다.
아마존은 대단했다.
각종 생필품들을 휙휙 잘 보내주었다.
하루 만에 받고 싶은 물건이 있다면 3달러에서 10달러 정도를 더 내면
바로 다음날 아침에도 잠옷바람으로 현관을 열고 에스프레소 머신 박스를 뜯을 수가 있었다.
음. 역시 최첨단 물류시스템을 갖춘 대국답군.
이게 바로 라스트마일 서비스라는 것인가.
그렇게 제프 베조스에게 큰 절을 드리며 아마존의 우수고객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아이들의 자전거를 구입했다.
우리는 한국에서 주말이면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를 누볐기에
이 동네도 자전거로 구석구석 누비고 싶었다.
유즈드 제품이지만 새것에 가깝다는 설명에 매료되어
나는 예쁜 바스켓이 핸들 앞에 달린 여성스러운 자전거를 주문했다.
이틀 후에 자전거가 도착했다.
부푼 마음으로 열심히 조립하던 중에
부품 일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
유즈드 제품이라 그런가..
아마존 고객센터에 채팅을 시도했다.
전화로 컴플레인을 한다는 것은 당시 나에게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리고 아마존은 채팅 상담을 무척 선호한다고 광고를 하고 있었다.
'제품을 받았으나 부품이 없어요'
- 아 그런가요 죄송합니다. 그럼 주문을 취소해 주세요-
'네?'
'저는 추가로 부품을 받고 싶은데요 “
- 그런 거 없어요.. -
'네?'
'그럼 반품하고 다시 멀쩡한 제품으로 보내주세요'
- 그런 거 없어요.-
- 주문을 취소하시고 다시 구입해 주세요 환불해 드려요. -
' 그럼 이 자전거를 다시 가져가주세요. '
- 그런 거 없어요. 가지세요. -
'네?'
' 그 부품이 없이는 이 물건은 저에게 고철일 뿐이에요.'
- 네 그러면 그냥 버리세요.-
'네?'
'제발 가져가 주세요.'
- 오케이 그럼 가져가는데 10일. 당신 계좌로 다시 환불되는 것도 열.흘 후.입니다. -
'네?'
'아 네...'
'그럼 그냥 지금 환불해 주세요. 고철은 제가 처리할게요.'
- 네 빠빠. -
뭐. 이런 반품시스템이 다 있지?
놀라웠다.
아마존은 나에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부품이 결여된. 저 멋진 140불짜리 자전거를 그냥 가지란다.
부품은 따로 구입하면 된다는 친절한 설명은 덤이다.
나는 미국이 얼마나 넓은지 실감했다.
반품을 받으러 오는 비용보다 그냥 나에게 나사몇개 빠진 자전거를 거저 주는 게 이득.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난감하고 경이롭고 또 한편으로는 횡재한 듯한 기분도 들었다.
우리는 부족한 부품을 이곳저곳에서 열심히 구해 자전거를 탄다.
조립식 자전거가 되어버렸지만
내 계좌에는 140불이 무사히 환불되어 돌아왔다.
한 번은 일리 캡슐커피를 주문했다.
실수가 잦은 나는 역시나 또 실수를 저질렀다.
다른 에스프레소 머신에 사용되는, 사이즈가 맞지 않는 캡슐을 주문한 것이다.
다시 한번 챗 상담사를 불렀다.
'아임쏘리. 내가 실수로 캡슐커피를 잘못주문했어. 반품하고 싶어.'
- 아니 괜찮아 너 가져. 환불해 줄게.-
'그래도 되는 거야?'
- 응 안녕. 이만 바빠서 -
이런 식이다.
아마존은 반품 편의를 위해 미국 최대 오가닉 그로서리, 홀푸드를 인수했다는 썰이 있을 만큼
그간 반품문제로 고난을 겪은 듯하다.
상담사들에게 어떤 가이드라인이 정해져 있는지는 모르지만
그들에게 많은 자율권, 혹은 권한위임이 되어있는 것은 확실한 듯했다.
1 더하기 1은 2입니다.
한국의 서비스는 정직하다.
공항에서도, 온라인 쇼핑을 할 때도, 배송을 받고 반품을 할 때도.
한국의 고객서비스는 합리적이고 신속하며 예측가능하고 때로 조금 소심, 하다.
대국의 통 큰 리펀드 시스템을 살짝 경험하면서
가진 자들의 여유, 에 대해 생각했다.
대세에 지장 없음. 이란 이런 것인가.
며칠 전에 구입한 지 10달밖에 되지 않는 프린터기가 고장 났다.
프린터기를 수리할 동네 기술자를 찾고 있는 나에게
우리 교회 집사님이 조언을 주셨다.
고치면 비싸요. 그냥 하나 새로 사세요.
미국은 역시 대국이다.
수리비용이 구입비용보다 비싼 이곳.
반품 비용이 제품비용보다 비싼 나라.
중고 쓰고. 고쳐 쓰고. 다시 파는, 배달의 민족에게
'그냥 새거 보내줄게' '그냥 새거 사' 문화는 참으로 낯설다.
우리는 리유저블이 미덕인 나라의 국민이다.
커피 마실 때 텀블러 가져가고 장 볼 때 장바구니 들고 가야 인싸가 되는 문화인이다.
나는 종종 이곳에서 내가 지난 몇 년간 성실히 수행해 온
지구 지키기. 미래세대를 위한 소중한 재사용. 플라스틱 멀리하기. 같은 행위들이
매우 하찮고 의미 없게 느껴질 때가 있다.
인구 5천만 나라에서 안 그래도 살기 팍팍한데
하루종일 미세먼지 수치 챙기고,
태평양 바다에 쌓인 플라스틱 산을 보며 무한대의 죄책감을 느끼며,
이건 지구를 위한 일이야.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착한 대한민국 국민들을 생각한다.
음식물과 일반쓰레기를 함께 버리고
학교 급식시간에는 일회용 포크를 사용하며
반품이나 수리 대신 버리기. 를 권하는 인구 3억 5천만 나라의 통 큰 국민들을 보면서
내 나라 국민들의 선함. 성실함. 그리고 그들의 리더십을 존경한다.
부유해 본 경험이 별로 없는 나라.
남의 나라를 침략해 약탈해 본 경험이 없는 나라.
빼앗기고 유린당한 역사가 많아 한이 많은 나라.
작고 가진 게 없어 가진 재능으로 최선을 다해야 남들만큼 할 수 있는 나라.
그런 나라에서
5살 유치원생들조차도 지구의 미래를 걱정하고, 화장실에서 휴지 사용할 때도 칸을 하나둘 세어 끊는다.
반지하방에서 출근하는 김대리조차도 회사책상에 텀블러를 둔다.
나는 내 나라 사람들이 좋다.
좀 피곤해 보이고, 때로 쪼잔해 보일지라도
뭐라도 해보려고 애쓰는 대한민국 택배 사용자들이 애틋하다.
이것저것 한 쓰레기통에 던져 넣으면서
순간순간 흠칫, 하지만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
이 편리함이 금세 익숙하다.
하지만 알고 있다.
방만하게 쓰레기를 버리는 이 순간에도
반품대신 버림. 을 권유받는 채팅창을 켜두고도
지구반대편 작은 나라에서는
열심히 반품상자를 포장하고,
아장아장 걷는 소중한 첫 아이의 신발을 구입하기 위해 중고거래 사이트를 살피는 엄마들이 있다.
나는 언젠가 다시 그 아름다운 리유저블 나라로 돌아가서
열심히 반품신청을 해대겠지.
그러면 내일 오후 갈길이 바쁜 택배 아저씨는 우리 집 경비실에 쌓여있는 누군가의 반품상자들을 옮겨 갈 거다.
그리고 이틀 후 나의 채팅창에는 반품완료.라는 메시지가 뜰 테지.
열심히 살면 복을 주는 옛날이야기처럼
우리나라도 복을 받는, 우주 질서가 새워지기를 기도한다.
박복했지만 선하고 아름다워 인당수에서 용왕님을 만나듯. 내 나라도 활짝 피어나기를.
용감하고 명민하게 반만년 역사의 정점을 찍기를.
프린터기 반품 채팅을 시도하다가
대한민국 아줌마는 급하게 애국심을 소환한다.
부활절이라 어제부터 채팅이 안된다.
이봐라. 애국심을 소환해 마땅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