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가장 위대한 하드디스크

전기가 필요 없는 기억 저장소의 영속성에 대하여

by 이장복

1. 디지털 암흑기 (Digital Dark Age)


고고학자들은 수천 년 전 수메르인이 점토판에 새긴 쐐기 문자를 지금도 해독할 수 있다. 500년 전 조선왕조실록의 먹글씨는 오늘날에도 선명하게 읽힌다. 종이와 돌은 시간의 풍화를 견뎌냈다.


하지만 불과 20년 전, 당신이 3.5인치 플로피 디스크에 저장해 둔 소설 원고는 어떤가? 10년 전 싸이월드 서버에 올렸던 사진들은? CD-ROM에 구워둔 결혼식 영상은?


우리는 지금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데이터를 생산하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후대에는 가장 적은 기록을 남길 세대가 될지도 모른다. 이를 정보학자들은 디지털 암흑기라고 부른다.


디지털 데이터는 영원하지 않다. 그것은 너무나 까다로운 조건을 요구한다.

첫째, 매체 자체가 물리적으로 썩는다. 하드디스크의 자성은 약해지고, CD의 염료는 산화된다.

둘째, 해독기(Reader)가 사라진다. 플로피 디스크가 멀쩡해도 그것을 넣을 드라이브를 가진 컴퓨터가 없다. 파일 형식이 바뀌면(hwp 1.0을 지금 열 수 있는가?) 데이터는 열리지 않는 디지털 쓰레기가 된다.


우리는 최첨단 시대를 살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기록의 보존성 측면에서 우리는 석기시대보다 퇴보했다.


2. 해독기가 필요 없는 유일한 인터페이스


종이책의 가장 위대한 점은 무엇일까? 배터리가 필요 없다는 것? 물론 그것도 장점이다. 하지만 진짜 혁명적인 특징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일체형이라는 점이다.


전자책(E-book)을 읽으려면 전용 리더기나 태블릿이 필요하다. 파일(소프트웨어)과 기계(하드웨어)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이다. 기계가 고장 나거나 전기가 없으면, 그 안의 지식은 암호화된 0과 1의 감옥에 갇힌다.


하지만 종이책은 그 자체로 완성된 인터페이스다. 책을 펼치는 순간, 부팅 과정 없이 즉시 정보에 접속한다. 햇빛이나 촛불 같은 약간의 광원, 그리고 글을 읽을 줄 아는 눈만 있으면 된다.


재난 상황에서 문명을 전수하려면, 복잡한 재생 장치가 필요한 매체는 살아남을 수 없다. 만약 외계인이 지구에 와서 인류의 문명을 이해하려 한다면, 전원이 꺼진 아이패드가 아니라 낡은 백과사전을 집어 들 것이다. 아이패드는 그들에게 검은 유리판일 뿐이지만, 책은 펼치면 바로 그림과 문자가 말을 걸기 때문이다.


종이는 인간이 발명한 가장 직관적이고, 독립적이며, 민주적인 하드디스크다.


3. 검색(Ctrl+F)이 앗아간 지형도


디지털 텍스트와 종이 텍스트는 뇌가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다.


스크롤을 내리며 읽는 디지털 글은 흐름이다. 우리는 정보를 훑고, 필요한 키워드만 검색(Ctrl+F)해서 찾아낸다. 빠르고 효율적이지만, 휘발성이 강하다.


반면, 종이책을 읽는 것은 지형(Landscape)을 탐험하는 것이다. 우리는 책의 두께로 전체 분량을 가늠하고, 왼손과 오른손에 쥐어진 종이의 무게 차이로 내가 어디쯤 와 있는지 직관적으로 안다. "그 내용은 오른쪽 페이지 하단쯤에 있었지", "앞부분 귀퉁이를 접어놓은 곳에 중요한 문장이 있었지"라는 식으로, 뇌는 텍스트를 공간적 위치와 함께 기억한다.


이 공간 기억(Spatial Memory)은 깊은 이해와 장기 기억의 핵심이다. 재난 상황에서 매뉴얼을 보고 기계를 고쳐야 한다면, 스크롤을 내렸다 올렸다 하며 헤매는 태블릿보다, 손때 묻은 매뉴얼 책을 펴놓고 기름 묻은 손으로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훨씬 안전하고 정확하다.


4. 나만의 문명 재건 키트를 구축하라


나는 독자들에게 제안한다. 지금 당장 당신의 서재를 점검하라. 베스트셀러 소설이나 자기계발서도 좋지만, 인터넷이 영원히 끊겼을 때 당신과 당신의 가족을 살릴 생존 라이브러리가 있는가?


아날로그의 방주에 실어야 할 책들은 이런 것들이다.

의학 사전 : "배가 아파요"라고 검색할 수 없을 때, 증상을 보고 약초를 찾거나 응급처치를 할 수 있는 가정 의학서.

기술 매뉴얼 : 집을 짓는 법, 농사를 짓는 법, 옷을 만드는 법, 라디오를 고치는 법이 담긴 도감.

인문 고전 : 빵만으로는 살 수 없는 인간의 영혼을 위로해 줄 시집 한 권, 철학책 한 권.


PDF 파일로 다운로드해 뒀다고 안심하지 마라. 전기가 나가면 그것은 파일이 아니라 `0`바이트다.

정말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프린트하라. 잉크 냄새가 나는 종이 묶음으로 만들어 물리적으로 소유하라.


5. 불타지 않는 지혜


물론 종이도 약점이 있다. 불에 타고, 물에 젖고, 벌레가 먹는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처럼 권력자가 도서관을 불태우면 지식은 사라진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종이는 분산되어 있기에 안전하다. 클라우드 서버는 한곳(데이터 센터)에 집중되어 있어 미사일 한 방이나 해킹으로 전 세계의 데이터가 날아갈 수 있다. 하지만 종이책은 수만 명의 개인 서재에, 헌책방 구석에, 시골 도서관에 흩어져 있다.


어느 한 곳의 도서관이 불타도, 어딘가 다락방에 숨겨진 한 권의 책이 살아남아 문명을 다시 싹틔운다.

레이 브래드버리의 소설 <화씨 451>에는 책이 금지된 세상에서, 책을 통째로 암기하여 스스로 살아있는 책이 된 사람들이 나온다.


우리가 종이책을 산다는 것은 단순히 정보를 사는 것이 아니다. 문명의 씨앗을 내 방에 보관하는 행위다. 당신의 책장에 꽂힌 그 책 한 권이, 언젠가 암흑의 시대를 밝힐 유일한 등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다시 책을 사자.

화면의 빛(Backlight)이 아니라, 종이의 결을 만지자.

그것이 인류가 5천 년 동안 검증해 온, 가장 확실한 미래 대비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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