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전(口傳), 이야기의 힘

넷플릭스가 멈춘 밤, 우리는 서로의 이야기꾼이 되어야 한다

by 이장복

1. 태초에 모닥불이 있었다


전기가 사라진 첫날밤을 상상해 보자. TV도, 스마트폰도, 컴퓨터도 켜지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그 적막과 공포를 무엇으로 달랠 것인가?


인류는 수만 년 전부터 그 답을 알고 있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불을 피우고 그 주위에 둥글게 모여 앉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가 입을 뗄 것이다. "옛날에 말이야..."


인류학자들은 인간을 호모 나란스(Homo Narrans, 이야기하는 인간)라고 부른다. 문자가 발명되기 훨씬 이전부터, 인류는 이야기로 지식을 전수하고, 공포를 이겨내고, 공동체를 하나로 묶었다.


하지만 디지털 시대의 우리는 듣는 귀만 비대해지고 말하는 입은 퇴화했다. 우리는 남이 만든 이야기(영화, 드라마, 웹툰)를 소비하는 데만 익숙하다.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이야기꾼들이 넷플릭스와 유튜브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화려한 편집과 연출에 압도되어, 스스로 이야기를 지어내고 전달하는 능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서버가 멈추는 순간, 그 화려한 이야기꾼들은 모두 사라진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뿐이다. 투박하고 서툴더라도, 우리 스스로가 서로에게 배우이자 감독이자 시나리오 작가가 되어야 한다.


2. 사실보다 오래 살아남는 이야기


왜 단군 신화에는 곰과 호랑이가 나오고, 서양 전래 동화에는 숲 속의 마녀가 나올까? 그것이 단순히 아이들을 재우기 위한 헛소리일까?


아니다. 구전되는 이야기들은 고도로 압축된 생존 매뉴얼이다.


"깊은 숲 속에 마녀가 산다"는 이야기는 "아이들이 혼자 숲에 들어가면 길을 잃거나 맹수를 만날 위험이 크니 절대 가지 말라"는 경고를, 잊히지 않는 스토리 형태로 암호화(Encoding) 한 것이다. "어떤 버섯을 먹고 누가 죽었다"는 팩트는 금방 잊히지만, "그 버섯은 마녀의 저주가 서려 있어 먹으면 춤을 추다 죽는다"는 이야기는 천 년을 간다.


뇌과학적으로 인간의 뇌는 논리적인 정보보다 서사를 훨씬 더 잘 기억하도록 설계되어 있다. 재난 상황에서 후대에 지혜를 전수하려면, 딱딱한 매뉴얼만으로는 부족하다. "이 강물을 마시면 배가 아프다"라고 가르치지 말고, 그 강물에 얽힌 무서운 전설을 만들어주어야 한다. 그래야 아이들은 할머니가 없어도 그 강물을 마시지 않는다.


이야기는 사실을 태워 나르는 가장 튼튼한 방주다.


3. 텍스트에는 온도가 없다


디지털 소통의 가장 큰 맹점은 온도가 없다는 것이다. "괜찮아"라는 텍스트 메시지는 차갑다. 그게 정말 괜찮다는 건지, 비꼬는 건지, 체념한 건지 알 수 없다. 오해와 갈등은 이 차가운 텍스트의 틈새에서 자라난다.


하지만 육성(肉聲)은 다르다. 목소리에는 떨림이 있고, 호흡이 있고, 머뭇거림이 있다. 어둠 속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따뜻한 목소리는 그 자체로 강력한 정서적 난로가 된다.


신경과학에서는 화자와 청자가 이야기에 몰입할 때 뇌파가 동기화되는 현상을 뉴럴 커플링(Neural Coupling)이라고 한다. 눈을 맞추고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 두 사람의 뇌는 하나로 연결된다. 이것은 스마트폰 화면을 통해서는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생물학적 기적이다.


아날로그의 방주에서 우리는 다시 말을 해야 한다. 이모티콘 뒤에 숨지 말고, 떨리는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하고, 눈물을 흘리며 사과하고, 박장대소하며 농담을 던져야 한다. 그 온기가 공포에 얼어붙은 공동체를 녹일 것이다.


4. 당신의 인생을 편집하라


많은 사람이 "나는 말주변이 없어"라고 위축된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각자의 인생이라는 대서사시의 주인공이다.


오늘 하루 겪은 사소한 일, 과거의 실패담, 어릴 적 추억... 이 모든 것이 훌륭한 소재다. 중요한 것은 사실의 나열이 아니라 의미의 부여다. "오늘 빵을 샀다"는 정보지만, "오늘 빵을 사러 갔다가 첫사랑을 닮은 사람을 봤는데..."는 이야기가 된다.


평소에 연습하라. 하루에 있었던 일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순간을 1분짜리 이야기로 만들어 가족이나 친구에게 들려줘 보라. 상대방이 웃거나, 놀라거나, 슬퍼한다면 당신은 성공한 것이다. 그 반응(Feedback)이 당신을 더 좋은 이야기꾼으로 만든다.


디지털 세상에서는 편집 기술이 좋은 유튜버가 인기를 끌지만, 아날로그 세상에서는 썰을 잘 푸는 사람이 최고의 리더이자 연예인이 된다. 그는 지루한 시간을 견디게 해 주고,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웃음을 찾아주기 때문이다.


5. 마지막 이야기꾼


소설 <화씨 451>의 마지막 장면처럼, 문명이 잿더미가 되었을 때 인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거대한 데이터 서버가 아니다. 모닥불 앞에 앉아 "옛날 옛적에..."라고 입을 떼는 노인, 그리고 그 이야기를 반짝이는 눈으로 듣고 있는 아이들이다.


할머니가 손주에게 들려주는 이야기 속에 인류의 역사가, 도덕이, 생존법이 흐른다. 그 이야기가 끊어지지 않는 한, 인간의 문명은 결코 멸망하지 않는다.


그러니 기억하라.

당신의 입은 밥을 먹는 도구일 뿐만 아니라, 문명을 전송하는 안테나다.


전기가 나가면, 넷플릭스는 멈춘다.

하지만 당신의 이야기는 바로 그때 시작된다.

이제 목을 가다듬고, 당신만의 이야기를 시작할 준비를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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