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추억은 방울방울 놀이]가 정신건강에 참 좋아! 그런데 갑자기 친구가 딸내미 어린이집에서 끝날
시간이라며 황급히 전화를 끊어야 한단다. 어어 그래그래 담에 또 수다 떨자 하면서 전화를 끊었다.
끊은 건 전화인데 뭐랄까 내 여러 기분 선 중에서 해피선이 뚝 끊어진 것 같이 도로 우울해졌다.
그 친구는 결혼한 지 4년 차인데 청약에 당첨이 돼서 집도 있다.
대출이 반 이상 이래도 그게 어디야? 평생 경력이 될 아이 엄마로서도 차곡차곡 성장하고 있는 친구다.
얼마 전에는 주식 배당금도 받았다고 했다. 나는 모르는 세계 이야기들.
남이랑 비교하지 말자고 항상 다짐하지만 원래 의식이란 게 이렇게 제멋대로다.
그냥 막 가서 이 친구랑도 쟤고, 저 동료랑도 쟤고 이제 앞서가는 후배랑도, 이성과도 동성과도
막 쟤면서 난 어디쯤, 넌 어디쯤 이렇게 된다. 나의 내일은 어떤 모습이 될까?
불안감. 아마스물여덟살쯤부터였던거같다. 나이를먹어간다는, 아니나이만먹어간다는불안한체감은... 사람들은 앞으로 나아가고 있은데 나만 제자리 걷기 하고 있는 것 같다.
나만 제자리걸음으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데
얼굴과 몸만 중력의 법칙 제대로 적용되는 중이랄까?
불안감을연료로시작했다. 나도 나아가고 있다고 제자리 걷기 중인 줄 알았겠지만
실은 다른 방향이라서 그렇지 걷고 있다고! 뛰고 있다고! 얘기하고 싶어서.
2년 전부터 책을 쓰려는 노력을 백방으로 했다.
출간 기획서를 써서 출판사 백 군데 보내고 백한 군 데서 퇴짜를 맞았다.
[아니 웨딩잡지가 있는데 누가 결혼 준비를 단행본으로 보겠어요?]
(그때만 해도 몇 군데 잘 나가는 웨딩잡지가 있었고, 다들 결혼준비할 땐 웨딩잡지부터 사던 시절이다.)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책 쓰려고 사서 본 책 쓰기 노하우를 가르쳐주는 책에서는
내가 가장 잘 아는 걸 쓰라는데. 네네, 제가 제일 잘 아는 거 그게 결혼 준비랍니다.
게다가 그 말인즉슨 아직은 웨딩잡지만 있지, 결혼 준비 단행본은 없다는 것이니까.
그럼 GO! 그렇게 퇴짜 맞기를 계속했다. 계속되는 거절에 현실감각을 찾고 도저히 안 되는 거구나,
단행본이 없는 이유가 있는 거구나 생각하면서 포기하기로 했다. 그래 책은 아무나 쓰나,
정신 차리고 어서 외근이나 가야지. 드레스투어도 있고 웨딩촬영도 있는 바쁜 날이다.
오늘 웨딩촬영을 하는 30대 후반 신부님을 체크하려고 메이크업샵에 도착했다.
원래도 마르진 않았었다고 하는데 지금 예비 신랑과 연애를 하면서 10킬로가 쪘다는 그녀는
참 밝아서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예비 신부이고 웨딩 촬영 전날이지만 어제도 족발과 소주를 먹고 잤다고
당당히 말하는 그녀의 강력한 바이브! 얼마나 멋진가?
본인이 당당하고 남자 친구는 그녀를 사랑스러워하고 웃음이 끊이질 않는 결혼 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럼 에브리띵 오케이 아닌가? 에브리원 에브리띵 오케이 맞는데 왜 내 맘이 이렇게 씁쓸한 걸까?
통통하고 40이 목 전이어도 이 신부는 너무 행복한 상태라지만 확실히 덜 예뻤다.
뜯어보면 이목구비도 예쁘고 10킬로 찌기 전이면 체형도 예뻤을 것 같은데,
사진 촬영 용 메이크업을 해서인지 오히려 나이도 더 들어 보여서 아쉬웠다.
그런, 어딘가 덜 예쁜 신부인 그녀의 모습이 남일 같지 않아서 마음이 안 좋았던 것 같다.
뭔지 모를 불편한 맘을 숨긴 채 신부에게 이렇게 잘 웃으니 웨딩 촬영할 때 잘할 것 같다고 하면서
유의사항을 전달했다.
그때 후배를 만났다. 후배가 복화술처럼 입을 최소한으로 움직이면서 내게 물었다.
“팀장님 신부 몇 살이에요?”
“(손짓으로 38)”
그 후배는 뭔가 표정으로 역시! 그랬구나 하더니 수고하세요 하고는 총총히 사라졌다.
나에게 뭐라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왜 내 기분이 나쁜 걸까? 그래도 이 38세 신부는 엄청 사랑받고 있고, 엄청 행복해하고 있는데 그 신부와 내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데다가 그나마 난 연애도 안 하고 있어서일 것이다. 남 일 같지 않아서. 기분을 최대한 따돌리려고 머리를 푸드덕 털었다. 일 하자, 일.
두 사람의 꽃단장이 끝났다. 두 사람 모두 동글동글 통통하긴 했지만 깊은 곳에서부터 뿜어 나오는
'행복 아우라'에 둘러싸인 두 사람은 사랑스러웠다.
웨딩스튜디오로 출발하기 위해 남자 친구의 다정한 보필을 받으며(이땐 신랑님도 정신없기 때문에 혼자 슝슝 앞서 가는 경우가 많아서 이 부분은 정말 자상함의 증거임) 38세 그녀가 승용차에 오르는 걸 보고 뒤를 돌았을 때 그 후배가 내 뒤에 있었다. 후배는 갑자기 두 손을 뻗어 내 두 손을 꼭 모아 잡아 쥐고는
“우리도 꼭 내년 봄 넘기지 말고 가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아니 내년 여름엔 꼭 가요!”
난 손을 털어내면서 아니 왜 나까지! 자기나 내년 봄에 꼭 가. 난 내년에도 그 후에도 아직 사람도 없고 갈 마음도 없다고. 서두르고 싶은 마음도 없고, 결혼 말고 아직 하고 싶은 것도 많다고.... 하는 내 말은 듣지도 않고 그 후배는 자신의 신부에게 가버렸다. 왜 내가 변명을 한 거 같지?!
우울한 기분을 모른 체하며 신부가 촬영할 웨딩스튜디오로 갔다. 먼저 도착한 신부와 그의 남자 친구는 다정하게 셀카를 찍어가면서 간식을 먹고 있었다. 초콜릿, 소시지, 초코바 등등 다이어트하고는 거리가 먼 것들. 남친은 자기 입에 하나 넣으면 여친 입에 두 개를 넣어주는 자상한 사람이었다. 남친 눈에 달달함이 한도 초과였다. 신랑이 턱시도를 바꿔 입으러 간 사이 나도 모르게 진심으로 궁금한 걸 물어봤다.
“신부님, 행복하세요?"
실은 내 속마음 질문은 언니, 저도언니보다더늦게결혼할지도모르고
언니보다훨씬뚱뚱해져서드레스입을지도몰라요. 그런데도언니저도행복할수있을까요? 였다.
그 신부는 그렇다고 했다. 35세 전에는 한 거 없이 나이만 먹는 게 너무 불안했다고 나이에 쫓기는 기분이 정말 별로였다고 했다.(맞아요, 언니 흑흑) 그런데 지금 남자 친구를 만나서 연애하는 동안
그 모든 불안증들이 다 치유받고 있다고 했다.
“공주 대접해줘서도 아니고 남자 친구가 부자도 아닌데 아무것도 꾸미지 않아도 저를 그냥 그대로 봐주고 안아주는 남자예요. 우린 모아놓은 돈도 많지 않지만 둘 다 건강하고 직장도 나름 안정적이니까 열심히 사랑하면서 살기만 하면 성공한 인생이라고 남친이 맨날 말해줘요. 진짜 이렇게 잘 맞는 짝꿍 만난 것만도 복 받은 거라고요.”
마법처럼 그 얘기를 하고 웃는 그녀가 정말 전지현 보다 송혜교보다 아름다웠다. 조금 둥그런 팔뚝도 귀엽고 활짝 웃으니까 팔자주름은 온 데 간데없고 너무 예뻤다. 그런 그녀를 보면서 5킬로만 뺏어도 훨씬 예쁠 텐데 어쩌고 하는 생각을 한 내가 한심했다. 마른 몸에 팽팽한 피부의 신부만 예뻐 보였던 것은 내가 지금껏 미디어의 노예로 살아와서라는 깨달음, 무엇도 마음이 행복한 사람의 사랑에 빠진 미소보다 아름다울 수 없다는 깨달음에 소름이 돋았다. 덩달아 나도 더 나이를 먹어도 살 좀 찐대도 이분들만큼 행복할 수도 있겠지 라고 이상한 안심이 일었다. 진심에 진심을 담아 말했다.
“두 분 너무 잘 어울리세요. 진짜 성공한 인생 맞는 것 같습니다!”
퇴근길 노을이 유난히 예뻤다. 작가 되기 포기한 기념으로 캔맥주 잔뜩 사 갖고 가서 미드나 정주행 해야지,
내일 고민은 내일 하자. 괜찮아 괜찮아. 중얼거리며 편의점으로 가려는데
딩동! 출판사 한 곳에서 메일이 왔다. 책 작업을 해보자고. 기획이 좋다고 했다. 찔끔 눈물이 났다.
엄마 좋아하는 둘둘치킨도 사가야지, 포기한 기념 말고 축하 기념으로 오늘은 파티다!
이렇게 그대로 걸어보는 거지모, 달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뚜벅뚜벅 앞으로 걷는 거야, 나도.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주는 달달 초과 남친은 없지만 성취감 초과 책 작업을 해보는 걸로, 일단 지금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