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초에는 으레 그렇듯 벌써 2025년이 두 번째 달을 맞이하니 뚜렷한 이유 없이 불안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그러다 오늘 익명의 누군가가 내가 지난해에 스레드에 쓴 글들에 좋아요를 눌러 우연히 나도 오랜만에 그것들을 읽게 되었다. 그리고 어쩌면 오늘의 내 모습이 과거의 내가 꿈꾸던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에 위안을 얻게 되었다. 이 마음을 잊지 않기 위해 작년의 짧은 포스트들을 발췌해 이곳에 남겨본다.
2024-12-28
어제부터 베를린에 안개가 낀다. 공기도 무지 차가워서 꽁꽁 싸매고 나가도 스산함에 뼈가 시린다. 상상했던 독일의 전형적인 날씨랄까. 덩달아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아서 올해 독일에서 감사했던 일들을 떠올려본다.
맛있는 과일과 비건음식을 원 없이 먹었다. 베를린에 오래 산 사람들은 매년 놀랄 만큼 장바구니 물가가 오르고 있다지만 서울에서 온 베지터리언은 식료품 종류와 가격의 자애로움에 감격의 눈물을 흘림. 한 달 동안 본 42베를린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학교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큰 고생 없이 꽤 괜찮은 집을 찾았다. 매일 비슷한 시간에 강아지와 산책하면서 강아지를 키우는 이웃들과 친해졌다. 반려견과 함께하는 윤택한 삶도 정말 큰 장점. 천둥이도 서울에서보다 훨씬 행복해하는 것이 느껴진다. 키가 큰 나무, 넓은 인도, 수많은 공원들이 주는 마음의 여유. 생각을 마칠 때까지 생각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 독일에 와서 몇 년간 먹던 공황약과 수면보조제를 완전히 끊었다.
독일 안팎으로 다닌 여행들이 많은 영감을 주었다. 여러 번의 여행에서 한 번도 기차 지연이 없었다. 눈물이 날 만큼 아름다운 공연(베를린 필하모니에서의 조성진 공연이다)을 무대 코앞에서 보았다. 국제배송 포함 택배들도 모두 안전히 제시간에 받았다.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아주 좋은 요가원이 있다. 최근 다른 요가원들을 다니다 보니 그곳이 정말 좋았었다고 다시금 느낀다. 스레드에서 좋은 친구들을 만났다. 살면서 한 번도 모르는 사람을 만나거나 사적인 모임에 나간 적 없던 극 내향인인데 여유가 생겼는지 안 하던 짓을 한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사람들이 다정하고 좋은 사람들이라 또 다른 새로운 것을 해볼 용기가 생겼다. 크고 작은 꿈이 생겼다. 이건 원래의 나였다면 정말로 믿기지 않을 변화이다. 꿈이 없어서, 꿈이 생겼을 때 성적이 발목잡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공부했던 나. 올해 그 시간을 드디어 보상받은 것 같다. 쓰고 보니 정말로 감사한 한 해네. 마음은 따뜻해졌으니 이제 수족냉증 해결하러 가자.
2024-12-22
독일 기준으로 올해 밤이 가장 긴 날은 어제인 12월 21일이었다고 하지만, 오늘 내가 아주 좋아하는 절기인 동지를 기념하여 팥죽을 만들어 먹었다. 며칠 전 샀다가 쓴 맛이 강해 방치해 두었던 홋카이도 호박을 같이 넣고, 찹쌀가루 대신 멥쌀가루와 감자전분을 적당한 비율로 섞어 새알도 만들어 넣었다.
오늘 낮 이케아에서 발견한 아주 마음에 쏙 드는 보울의 색이 팥죽과 잘 어울려 기분이 좋았다. 몇 달이나 마음에 드는 그릇을 찾겠다고 플리마켓 등을 돌아다녔는데, 마침 오늘 그릇을 샀고 마침 오늘 팥죽을 했고 그 그릇과 팥죽이 잘 어울린다니.
동지가 지나고 나면 이제 다시 밤이 짧아지고 해가 길어진다. 내가 사랑하는 여름과 가장 먼 날인 동시에 다시 가까워질 일만 남은 날. 모든 건 생각하기 나름이고 행복이란 참 별 게 아니다.
2024-12-11
평생 책을 곁에 두고 살았지만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글을 쓴다는 것이 지난한 과정과 노력을 수반한다는 사실을, 더하고 빼기를 수없이 반복한 뒤에도 생존한 단어들로 생명력 짙은 숲을 가꾸는 작업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요즘은 '시간과 마음을 들여 정진하는 것'에 대해 고찰하게 된다. 나는 어떤 숲을 만들어 왔는지, 그 숲을 가꾸기 위해 밀도 높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따위의 생각을 한다. 무성한 숲 대신 성긴 나무들이 자라 있어서 그 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에 더 조급해했던 것은 아닌지 돌아본다. 앞날에 나의 숲은 어떤 모습이고 싶은지 묻는다.
2024-11-27
무사히 베를린 도착. 우연히 출국할 때 나갔던 게이트와 같은 게이트로 돌아왔더니 게이트 너머에 한국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올해 초 5년 동안 다닌 회사를 그만두고, 베를린으로 와 새로운 공부를 시작하고, 유럽 여기저기를 여행하고, 가족들에게 나의 새 집을 보여주고, 사랑하는 예슬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한국에도 다녀왔다. 이로써 올해의 큰 이벤트들은 전부 끝이 났다. 낑낑대며 이고 온 책들에 파묻혀 겨울을 잘 보내야지.
헬싱키에서 베를린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이륙할 때쯤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몽롱한 상태로 눈을 감고 있다가 문득, 이 축복받은 삶이 감사해서 눈물이 났다. 크고 작은 서러움과 막막함이 있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다 괜찮다. 보고 싶었다는 말, 따뜻한 포옹, 나에게 꼭 어울리는 선물들, 서로를 잘 알아야만 나눌 수 있는 대화 주제들. 그리고 일한 것 이상으로 인정해 주는 좋은 동료들. 잘 지내고 있냐는 질문에 "나 태어나 처음으로 오래오래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라고 답하는 내가 낯설었지만, 나를 아끼는 사람들에게 그런 답을 해줄 수 있는 한 해를 보냈다는 사실이 기뻤다.
2024-10-29
불행한 착한 딸이 아닌 행복한 그냥 딸로 살기로 결심했다. 세상에 이 단순한걸 이제야 깨닫다니.
2024-10-18
많은 것을 포기하고 베를린에 와서 예상치 못한 곳에서 그 이상의 가치를 얻는데, 그중 하나가 매일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먹는 데에 한 시간씩 쓴다는 것. 이 시간이 내 몸과 정신을 얼마나 풍요롭게 하는지를 생각하면 이제껏 내가 먹어왔던 수많은 "편리한" 끼니들이 감정의 허기를 겨우 달래기 위함이었음을 실감한다. 올해의 마지막 계절이 다가오는 것을 조금씩 느끼며, 연초에 목표했던 대로 한 해를 보내고 있는지 지난 시간을 더듬어보았다. 내가 나로 존재하는 데에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발견하고 있는 것을 보니 아마도 아쉬움 없이 연말을 맞이하리란 생각이 든다. 기쁘다!
2024-10-10
"대수롭지 않은 삶을 조명하는 것이 문학의 역할이다. 소설은 존재와 무존재 사이에 놓인 경계 위에 무엇이 서 있는지 우리에게 가르쳐준다."
한강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오늘, 우연히 책에서 위의 문장을 읽고 내가 책을 사랑하는 이유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본다. 나의 단짝, 나의 선생님, 나의 도피처이자 나의 우주. 책이 있어 버텼던 과거와 그 시간들이 만든 지금의 나. 더 많은 사람들이 읽는 세상은 지금보다 얼마나 더 고요할까? 그 세상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2024-10-03
오늘 한글 종이책을 선물 받았다. 마리나 반 주일렌의 <평범하여 찬란한 삶을 향한 찬사>. 며칠 전 만들어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펌킨수프를 꺼내 데우지 않고 한 스푼씩 떠먹으며 책을 읽었다. 소파에 자빠져서도 읽고, 침대 구석에서 벽에 기대앉아 천둥이를 쓰다듬으면서도 읽었다. 흑.. 너무 좋다.. 내 장래희망은 돈 많은 서점주인이다.. 내가 좋아하는 책만 잔뜩 갖다 놓고.. 장사 안 돼도 내 알 바 아닌.. 그런.. 서점주인.. 그때까지 화이팅 (.◜◡◝)
2024-09-23
아침에 너무너무 졸려서 요가를 갈까 말까 수십 번 고민하다가, '가면 후회 안 하고 안 가면 후회한다' 생각이 들어 침대를 박차고 나갔다. 자전거를 타고 느끼는 바람이 적당히 시원해서 좋았다. 가는 길과 돌아오는 길에 한 번도 신호에 걸리지 않았다. 드롭백-컴업을 아주 야무지게 연습했다. 끝나고 나오는 길에 매일 같은 시간에 수련하는 분이 오늘 입은 옷이 예쁘다며 새로 산 티셔츠를 알아봐 주었다. 작은 결심이 가져다준 풍요로운 아침! 이 기분을 한 주 내내 쭉 가지고 가겠다는 꽤 큰 욕심을 부려본다.
2024-08-18
무화과를 반으로 잘랐을 때 새빨간 속이 보이면 탄성이 나온다. 매일 무화과 먹고 매일 무화과에 대한 글을 남기네. 무화과가 왜 좋을까? 맛있는 무화과를 찾기가 어려울뿐더러 그 속을 자세히 보면 그로테스크한 느낌까지 있다. 금방 무르고 사시사철 먹을 수도 없고. 매일 딱 하나씩만 먹는데도 입천장이 쓰리다. 그럼에도 무화과는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 무화과는 잼으로 먹어도 맛있고 치즈랑 먹어도 맛있고 와인이랑 먹어도 맛있고 익혀 먹고 말려 먹고 얼려 먹어도 다 맛있다. 씻어서 반으로 찢어 한 입에 넣으면 되는 게 과즙이 흐르지도 않고 껍질을 처리하지 않아도 된다. 꽃이 피지 않는 식물이어서 이름이 무화과라고 붙었지만 사실 무화과는 열매 자체가 꽃이다. 속의 빨간 부분이 꽃이고 단맛이 나는 부분이 꿀이다. 꽃보다 풀을 더 좋아하는 내가 무화과를 더 좋아하게 된 이유. 여름의 끝에 무화과가 있어서 사랑하는 여름을 보내는 것이 조금은 덜 아쉽다.
2024-08-15
오늘 아침에 꺼낸 무화과가 적당히 말캉하고 속이 아주 새빨갛고 새콤 달콤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과일! 왜 아이폰에는 무화과 이모티콘이 없을까?
2024-08-06
오늘 아침은 병아리콩 샐러드와 스크램블에그 앤드 뜨거운 커피 토마토, 파프리카, 데친 브로콜리, 적양파를 비슷한 크기로 잘라 병아리콩과 함께 보울에 담고 바질잎과 모짜렐라 치즈를 찢어 넣는다. 올리브오일2+화이트비니거2+레몬주스1+꿀1+다진마늘 조금+소금+후추를 잘 섞어서 뿌려준다. 아주 맛있는 영양만점 여름 샐러드 완성 ⸜( ◜࿁◝ )⸝
생각보다 글이 많아 두 편으로 나누어 1-7월의 포스트를 따로 올려야겠다.
글을 옮기며 많은 생각이 든다.
나는 취향이 딱히 없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내 기억력이 안 좋은 거였나 보다.
나는 건강하고 여유로운 아침식사를 좋아해. 나는 무화과를 좋아해. 요가와 독서와 자연과 여행을 좋아해.
과거의 나에게서 또 어떤 귀한 것을 발견하게 될까?
기록의 중요성을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