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씨와 친절함의 상관관계
눈을 뜨니 9시쯤 되었다. 전날 사다 놓은 빵과 계란으로 간단히 아침식사를 해결했다. 숙소에 믹스커피가 있어서 마셔보려 했는데 오랜만에 달짝지근한 커피를 마시려니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얼른 준비를 마치고 올드타운으로 가서 커피를 마시기로 했다.
집에서 늘 창문을 열어놓는 편이라 숙소에서도 준비하는 동안 방문을 활짝 열어두었더니 집 안으로 고양이가 들어왔다!!! 사람 손을 타는 아이인지 무서워하지도 않고 집 안을 휘젓고 다니더니만, 내가 가까이 가니까 나를 집 밖으로 유인하더니 마당 바닥에 발라당 누웠다. 귀여워라...
준비를 마치고 올드타운에 있는 MOKKA라는 카페에 갔다. 안뜰이 있어 여유롭게 야외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을 것 같았다. 열한 시쯤이었는데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들도 몇 있었다. 우리는 따로 메뉴를 보지 않고 아메리카노 두 잔을 시켰다. 웬 에스프레소 두 잔이 나왔다. 다시 물어봤는데 이게 아메리카노가 맞단다. 커피 맛은 좋았다.
카페 안뜰 한가운데에 작은 정원처럼 나무가 몇 그루 있었는데, 자세히 보니 나무와 바닥 여기저기에 달팽이들이 있었다. 얼마 전 베를린에서도 비가 많이 오던 날 산책하다가 달팽이를 많이 보았는데, 풀라의 달팽이는 베를린 달팽이들이랑은 아주 다르게 생겼다. 바닷가라서 비가 오지 않는 날에도 달팽이들이 나와 사는 걸까?
찾아보니 지중해에 사는 달팽이 종류들을 아울러 Theba pisana라고 하나 본데, 사진 속의 달팽이는 Theba pisana에 속하는 달팽이들과는 별로 닮지 않았다. 넌 이름이 뭐니?
안뜰 뒤쪽으로 나 있는 출입구 너머 시장이 보이길래 시장을 구경하기로 했다. 여러 가지 야채, 과일, 꽃, 오일, 꿀 등을 팔고 있었다. 시장 물가는 베를린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여행하는 동안 천둥이를 봐주고 계신 분께 드릴 작은 선물을 사고 올드타운 구경을 시작했다. 골목 사이사이를 걸어 다니며 자석도 사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zerostrasse라는 이름의 지하 터널도 구경했다. 42 학생증으로 학생 할인을 받아 둘이서 10유로에 입장했다. 아싸
Zerostrasse는 제1차 세계 대전 기간에 건설된 지하 터널로, 풀라 올드타운 아래에 아주 길게 건설된 군사 기지이다. 당시 풀라는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의 중요한 군사 기지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zerostrasse 안에 독일어가 적힌 옛 포스터들이 많이 보였고, 올드타운 근처 바닷가에는 조선소가 많이 보였다.
걷다 보니 두시가 훌쩍 넘었다. 구름 사이로 조금씩 해가 비치기 시작해서 작은 광장 옆에 야외좌석이 있는 식당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연어파스타와 마르게리따 피자를 시켜서 든든히 먹었다.
크로아티아의 일기 예보는 참 정확하다. 날씨 앱에서 해가 뜬다고 하면 해가 뜨고, 구름이 많다고 하면 하늘이 구름으로 가득 찬다. 오후 네시부터 해 아이콘이 있는 걸 보고는 혹시나 해서 시간 맞춰 베루델라로 갔다. 하루도 물놀이를 놓치고 싶지 않아 타월과 수영복을 챙겨 나간 덕분이었다.
베루델라는 풀라 올드타운 시내에서 약 30분 정도 마을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내려가면 있는 반도로, 반도의 서쪽은 해변을 따라 쭉 해수욕장이 이어져 있고 오른쪽은 육지를 마주 보고 깊게 만이 형성되어서 요트 선착장으로 쓰이고 있다.
정갈하게 관리된 리조트를 지나 하와이 비치에 도착했다. 리조트 투숙객들은 바다와 건물 사이에 있는 잔디밭에 누워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하와이 비치는 아주 작은 만에 있는 자갈밭이었다. 수영복으로 갈아입고 바다로 내려가 적당히 평평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에메랄드 빛 물이 너무 아름다워서 바로 물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네 시 반쯤 되었을까? 거짓말같이 해가 쨍하고 떴다.
자갈은 뜨거워지고, 바닷물은 더 투명해지고, 하늘에는 선명한 비행운이 남았다. 우리는 고작 하나 가져간 작은 비치타월을 깔고 가방이나 옷 따위를 베고 누워 이 순간을 즐겼다. 지난달부터 푹 빠져있는 '삼체'를 읽으며, 아드리아해의 바닷물에 몸을 적신 채 400년 뒤의 우주를 상상했다.
그렇게 또 바닷가에서 두세 시간을 놀다 보니 배가 고파왔다. 하와이 비치에는 샤워 시설이 없어서 물만 대충 닦아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다시 리조트를 지나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는 길에 또 다른 해변이 보였다. Ambrela Beach라는 이름을 가진 더 큰 규모의 해수욕장이었는데, 그곳에는 샤워장이랑 식당 같은 시설들이 아주 잘 되어있었다. 걸어서 5분 거리지만 하와이 비치랑은 아주 다른 느낌의 바다였다.
다시 버스정류장으로 돌아가는 길, 해가 천천히 지고 있는 언덕의 풍경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렇게 잠깐 걷고, 한참 멈추고, 또 걷고, 한참을 또 멈추어도 여전히 서두를 게 없었다. 하루 중 잠깐 해가 뜬 시간을 물가에서 보내게 되어 안 그래도 한껏 신이 났던 나는 행복함을 감추지 못했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 Restaurant Admiral. 요트 선착장 앞의 언덕에 있는 식당이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고, 주변 테이블을 보니 음식이 꽤 맛있을 것 같아서 음식을 세 개나 주문했다. 문어 샐러드와 튀긴 깔라마리, 그리고 해산물 리소토. 이제까지 갔던 식당에서는 따로 식전빵을 주지 않았었는데 애피타이저로 브루스케타까지 나와서 예정에 없는 아주 배부른 식사를 하게 되었다.
음식은 무엇 하나 빠짐없이 모두 훌륭했다. 특히 문어 감자 샐러드가 참 맛있었다. 모든 재료가 신선했고, 아마도 크로아티아에서 만들어졌을 올리브 오일을 곁들여 먹으니 더 좋았다.
식사를 더 만족스럽게 만든 것은 직원들의 친절함이었다. 우리 테이블뿐 아니라 모두에게 '더할 나위 없이 적절한' 수준의 서비스를 제공했다. 더 한 것도 덜 한 것도 없는 정말로 적절한 친절함. 주변에 풀라에 방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꼭 이 식당에 들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얼마 전 '친절은 선의보다 여유'라는 글귀를 보았다. 아마도 그 식당에서, 그리고 풀라의 다른 곳곳에서 느꼈던 친절은 그곳에서의 삶이 주는 여유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버스 정류장 뒤의 건물 테라스에서 '좀 더 앞으로 걸어가서 기다려야 버스를 탈 수 있어!'라고 말해주던 목소리. 구글 맵을 띄운 핸드폰을 들이밀자 웃으며 안경을 꺼내 쓰고 봐주던 기사님. 수수료가 적은 ATM의 위치를 설명해 주겠다며 열변을 토하던 작은 가게 사장님까지, 별 게 아닌 듯해도 일상에서 좀처럼 마주하기 힘든 마음들이다.
한국의 어떤 점이 널 그렇게 힘들게 했냐는 질문을 받으면 가끔 하는 대답이 있다. 친절을 베푼 것이 후회가 될 때가 많았다고. 글쎄, 그게 한국을 떠날 만큼 힘든 일이었냐고 묻는다면 아니라고 답하겠다. 다만 그 가벼운 생채기들이 오랫동안 쌓여서 나를 그렇고 그런 미지근한 사람으로 만들게 된다면 그렇게 되지 않을 선택을 하고 싶었다고도 덧붙이고 싶다.
나를 여기까지 오게 만든 크고 작은 고민들의 원인이 누군가의 악의보다는 여유의 부재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며 숙소로 돌아왔다. 다음날은 하루 종일 해가 쨍쨍할 거라는 예보를 보며 잠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