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eiko Chariot SCXP041
2011년 10월, 향년 56세로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를 추모하며 <Time>은 그의 삶을 특집으로 다뤘습니다. 표지에는 1984년, 매킨토시를 안고 있는 젊은 잡스의 사진이 실렸습니다. 그는 29세였고, 세상을 개인용 컴퓨터로 바꾸겠다는 확신에 차 있던 시절이었습니다. 이 사진은 훗날 애플의 공식 추모 행사와 월터 아이작슨의 전기 표지에도 사용되며, 잡스를 상징하는 이미지가 되었습니다.
시계 애호가라면 이 사진에서 자연스럽게 시선이 멈춥니다. 검은 케이스, 흰 다이얼, 불필요한 장식이 전혀 없는 단정한 시계. 그 정체는 2016년 2월 <Heritage Auctions> 경매에서 42,500달러(당시 한화 약 5,000만 원)에 낙찰되며 널리 알려졌습니다. 바로 Seiko Chariot 6431-6030, 세이코 샤리오였습니다.
경매 이후 관심이 폭발하자 세이코는 일본 패션 브랜드 Nano Universe와 협업해 2017년 3월 일본 내수 한정으로 복각 모델을 출시합니다. 최초 출시 연도에 맞춰 1,982개 한정으로 제작되었고, 즉시 매진되었습니다.
복각 모델은 오리지널 33mm(SCXP051)와 현대적 취향을 반영한 37.5mm(SCXP041) 두 가지로 나왔으며, 별도로 블랙 다이얼 버전 300개도 출시되었습니다. 이후 그레이 케이스 모델도 등장했지만, 대중의 관심은 오직 ‘잡스가 찼던 바로 그 모습’—검은 케이스와 흰 다이얼—에 머물러 있습니다. 왜냐하면 ‘잡스’가 아니라면 이 시계는 문방구에서 파는 5천원짜리 수능시계와 다를 게 없기 때문입니다.
잡스의 일생은 고난과 부활이 반복되는 영웅 서사의 구조를 닮았습니다. 그의 이력을 간단히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976년 애플 창업, 애플I제작
1977년 애플II 발표, PC시대의 시작
1980년 애플III 발표, 주식 공개로 25세에 청년재벌이 됨
1982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로 선정
1983년 존 스컬리를 애플CEO로 영입, 리사 프로젝트 진행
1984년 맥킨토시 발표, GUI시대를 개막
1985년 맥킨토시 실패로 스컬리에 의해 애플에서 쫒겨나고 Next에 합류
1986년 루카스필름의 그래픽 사업부를 인수하여 픽사 설립
1995년 토이스토리 성공, 픽사 주식공개로 더 부자가 됨
1996년 애플이 Next를 인수하면서 애플로 복귀
1998년 아이맥 G3발표
2001년 아이팟 1세대 발표
2007년 아이폰 1세대 발표, 스마트폰 시대의 시작
2008년 맥북 발표
2010년 아이패드 발표, 태플릿 시대의 시작
2011년10월 잡스 사망, 그때까지 아이폰4S, 아이패드2발표
1976년 애플 창업 이후 25세에 청년 재벌이 되었지만, 1985년 자신이 영입한 존 스컬리에 의해 직접 세운 회사에서 쫓겨나는 시련을 겪습니다. 이후 넥스트(NeXT)와 픽사(Pixar)를 거쳐 1996년 애플로 화려하게 복귀하며 아이팟, 아이폰, 아이패드로 세상을 재편하기까지 그의 여정은 매 순간이 극적이었습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극적인 시기는 1982년에서 1985년 사이입니다. 성공과 좌절이 동시에 교차하던 시기였습니다. 영화 <Jobs>에서도 묘사되듯, 리사와 매킨토시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이사회와 갈등을 겪던 시절, 그는 일관되게 이 시계를 착용하고 등장합니다.
당시 실제 사진 자료에서도 동일한 모델이 확인됩니다. 샤리오는 그가 세상의 주목을 받던 바로 그 순간에 손목 위에 있었습니다. 흥미롭게도, 애플에 복귀한 이후 그의 손목에서 시계는 사라집니다.
결국 샤리오는 “PC 시대의 개막”이라는 상징적 시기와 함께 잡스의 마지막 시계로 남게되었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병적일 만큼 까다로운 미니멀리스트였습니다. 그의 거실에는 자신이 완벽히 감탄할 수 있는 디자인의 물건 외에는 아무것도 놓이지 않았습니다.
최소한의 필수품을 제외하고는 가구조차 들이지 않았던 그는, 결혼 후 아내와 아이를 위해 가구를 하나 들이는 데에도 무려 8년 동안 토론을 이어갈 정도였습니다.
이토록 결벽에 가까운 그가 1980년대 초, 매킨토시를 개발하며 곁에 둔 차와 시계는 '포르쉐 928'과 '세이코 샤리오'였습니다. 잡스는 팀원들에게 "매킨토시는 포르쉐 928 같아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고, 그 결과 당시의 각진 컴퓨터들과는 차원이 다른 유려한 곡선의 매킨토시가 탄생했습니다.
전설적인 디자인의 포르쉐는 충분히 납득이 가지만, 왜 시계만큼은 그토록 평범해 보이는 세이코 샤리오였을까요? 그 해답은 그가 평생을 바쳐 탐구했던 두 철학, '선불교(Zen)'와 '바우하우스(Bauhaus)'가 절묘하게 교차하는 지점에 숨겨져 있습니다.
샤리오는 1982년에 출시되었고 일본 내수용 모델이었으며, 카탈로그상 1983~1984년에 등장하는 것으로 봐서 잡스가 이 시계를 만난 것은 매킨토시에 탑재할 소니의 3.5인치 디스크 드라이브를 구하기 위해 일본을 방문했던 1983년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일본은 소니의 워크맨과 도요타 자동차를 앞세워 전 세계 경제와 문화를 휩쓸던 최전성기였습니다. 젊은 시절부터 선불교와 타이포그래피에 심취했던 잡스에게, 일본 특유의 정갈하고 군더더기 없는 미학은 단순한 디자인을 넘어 일종의 ‘구도(求道)’와도 같았습니다.
샤리오의 케이스는 지극히 일본적입니다. 특별한 장식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마치 일본 다도에 쓰이는 기물처럼 차분하고 단단한 기운을 풍깁니다. 서구의 미니멀리즘 시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묘한 ‘여백의 미’가 서려 있습니다.
반면, 다이얼은 철저하게 바우하우스적입니다. 불필요한 장식은 철저히 배제되었고, 숫자와 바늘은 오직 가독성이라는 본질적인 기능을 위해 존재합니다. 이는 1961년 막스 빌(Max Bill)과 융한스(Junghans)가 확립한 미니멀 다이얼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이 디자인이 브라운(Braun)의 디터 람스(Dieter Rams)를 카피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제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디터 람스의 아날로그 시계(AW10)는 1989년에 출시되었고, 샤리오는 그보다 7년 앞선 1982년에 이미 세상에 나왔습니다. 쿼츠 파동의 정점에서 세이코가 유럽의 일류 디자이너들을 흡수하며 탄생시킨 이 시계는, 어쩌면 시대를 앞서간 미니멀리즘의 결정체였을지도 모릅니다.
흥미로운 점은 잡스가 애플 복귀 후 디자인 전권을 맡겨 지금의 디자인 애플을 만든 조나단 아이브(Jonathan Ive) 역시 디터 람스를 깊이 존경했다는 사실입니다. 샤리오에서 느껴지는 미니멀리즘은 훗날 애플 제품들이 보여준 미학과 단절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일관된 흐름으로 이어져 있습니다.
지금의 시선으로 보면 이 시계는 정확하고 가독성 좋은, 지극히 실용적인 ‘수능 시계’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는 대량생산과 기능적 아름다움을 추구했던 바우하우스의 이상이 현실에서 완벽하게 구현되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 시계에서 기술적인 가치나 디자인적 독창성보다 더 중요한 것은 따로 있습니다.
샤리오는 잡스가 가장 젊고 과감했던, 동시에 가장 큰 상처를 받았던 1980년대 초반을 함께했습니다.
성공과 실패가 교차하던 혼돈의 시기, 세상을 바꾸겠다는 야심으로 가득했던 청년 잡스가 당시 자신의 손목에 유일하게 허락한 사물이 바로 이 시계였습니다.
결국 이 시계는 PC와 스마트폰으로 세상을 바꾼 스티브잡스의 철학과 안목에 대한 기념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