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거안제미

베트남 역사와 이원정부 체제

젬선생

by 조영필 Zho YP

이원적 통치 체제의 역동성: 역사적 권력 분담 시스템에 대한 비교 분석


1. 서론: 역사적 맥락에서 이원적 통치 정의

이 보고서는 다양한 역사적, 지리적 맥락에서 나타난 이원적 통치 시스템을 심층적으로 비교 분석한다. 이원적 통치는 명목적 권위와 실질적 권력의 분리를 특징으로 하며, 이는 전통, 신성한 권리 또는 역사적 정통성에 뿌리를 둔 명목상의 권위가 실제적인 국가 통제력을 행사하는 실질적 권력과 분리되는 현상을 의미한다. 명목적 권력은 주로 상징적 역할을 수행하는 반면, 실질적 권력은 행정, 입법, 군사 등 국가 기구에 대한 실질적인 통제권을 행사한다. 공유된 주권은 별개의 주체들이 정부 기능을 진정으로 분할하거나 중첩시키는 시스템을 의미하며, 위임된 권한은 위임하는 주체가 궁극적인(비록 이론적일지라도) 주권을 유지하더라도 공식적인 권력 이전을 의미한다.


이원적 통치는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한 주체가 단순한 허수아비에 불과한 시스템부터 복잡한 견제와 균형, 심지어 권력 다툼을 수반하는 시스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다. 이 보고서는 베트남의 레-찐 이원적 통치 체제와 일본의 천황-막부 체제를 주요 사례 연구로 삼아 명목적 권력과 실질적 권력 역학의 유사성을 심층적으로 탐구한다. 또한, 고대 스파르타의 두 왕, 로마 공화정의 두 집정관과 민회 권력,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제후, 중세 유럽의 교황과 세속 군주 간의 관계, 이슬람 세계의 칼리프와 술탄 간의 관계, 그리고 태국과 영국의 입헌 군주제와 같은 다양한 역사적 사례를 검토하여 이원적 통치 시스템의 다양한 형태와 맥락을 조명한다.


이 보고서의 핵심 주장은 이원적 통치 시스템이 종종 특정 역사적 위기, 권력 공백 또는 상충하는 정통성 원천(예: 전통 대 군사, 영적 대 세속)을 조화시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스템의 지속성과 안정성은 명목적 권력자와 실질적 권력자 간의 내재된 긴장을 관리하기 위해 개발된 특정 메커니즘, 그리고 내부 및 외부 압력에 적응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2. 대월(베트남)의 레-찐 이원적 통치 체제

2.1. 역사적 기원과 진화

레 왕조는 베트남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를 나타내며, 938년 백당 전투의 기념비적인 승리 이후 시작되어 중국의 세 번째 지배 시기를 종식시켰다.1 레 왕조는 두 시기로 나뉜다: 막 왕조에 의해 찬탈되기 전의 초기 레 왕조(1428-1527)와 이후의 복원 레 왕조.2 초기 레 왕조는 레 로이(Lê Lợi)가 건국했으며, 그는 외세 침략을 격퇴한 군사적 능력과 문화적, 지적 번영의 시대를 열었다는 점에서 존경받는 영웅으로 기념된다.3 이 시기에는 유교 원칙에 기반한 중앙집권적 관료제와 과거제도가 확립되었으며, 포괄적인 법전인 홍득법전이 편찬되었다.2 이 시기에는 황제들이 직접 통치했다.2


1527년, 막 왕조가 왕위를 찬탈하면서 레 왕조는 쇠퇴기에 접어들었다.2 1533년 레 왕조가 복원되었을 때, 막 왕조는 북쪽으로 도피하여 계속해서 왕위를 주장했으며, 이 시기는 남북조 시대로 알려져 있다.2 이러한 복원은 막 왕조에 대항하여 레 왕조의 충성파를 이끌 군사적 강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중요했다.


레 왕조의 군대와 왕실을 장악한 것은 찐(Trịnh) 가문의 창시자인 찐끼엠(Trịnh Kiểm)이었다. 그는 응우옌 낌(Nguyễn Kim)의 사위가 되어 1545년 응우옌 낌이 암살된 후 레 왕조의 군사 및 왕실의 지도자가 되면서 권력을 장악했다.4 1556년 레 쭝똥(Lê Trung Tông) 황제가 후사 없이 사망하자, 찐끼엠은 왕위를 찬탈하려 했으나 여론을 우려하여 전직 관리 응우옌 빈키엠(Nguyễn Bỉnh Khiêm)의 조언을 구했다.4 응우옌 빈키엠은 레 왕조가 단지 허수아비에 불과하더라도 왕위를 차지하지 말라고 조언했고, 찐끼엠은 레 태조의 형제인 레 쯔(Lê Trừ)의 6대손인 레 주이 방(Lê Duy Bang, 레 아인똥)을 왕위에 앉히기로 결정했다.4 이로써 찐 가문이 정부를 통제하고 황제는 허수아비 역할을 하는 이원적 시스템이 확립되었다.4 찐 가문은 12명의 군주를 배출하며 2세기 이상 왕실을 지배했다.4


처음에는 찐 가문과 동맹을 맺었던 응우옌(Nguyễn) 가문은 남부에서 점차 독립적인 세력이 되었다.4 이는 1627년부터 1672년, 그리고 다시 1774년부터 1777년까지 이어진 찐-응우옌 전쟁으로 이어졌고, 베트남은 북부(찐)와 남부(응우옌)로 나뉘었으며, 두 세력 모두 명목상 레 황제에게 충성을 표방했다.2


2.2. 역할, 권력, 정통성

복원된 레 황제들은 "실질적인 권력이 없었고" 2, "명목상의 통치자"에 불과했다.4 그들은 "단지 명목상의 황제"였으며, 실제 통치 및 군사 권력은 찐 군주들이 소유했다.5 찐 군주들은 레 군주의 통치라는 허울을 유지하면서도 정부를 효과적으로 통제했으며, 황제를 마음대로 선택하고 교체할 수 있는 세습적 권한을 가졌다.4 예를 들어, 레 아인똥 황제가 찐뚱(Trịnh Tùng)에 대항하는 음모를 꾸미자, 찐뚱은 그를 살해하고 레 아인똥의 막내아들인 레 세똥(Lê Thế Tông)을 새로운 허수아비 황제로 옹립했다.4 레 왕조의 오랜 통치는, 비록 허수아비였을지라도, 초기 황제들의 인기 덕분이었다.2


찐 군주들은 "북베트남의 사실상의 통치자"였다.4 그들은 정부와 군대를 통제했으며5, 많은 고위 관료를 임명할 수 있는 세습적 권리를 가졌다.4 찐 가문에 사용된 "주(Chúa)"라는 칭호는 일본의 쇼군 직책과 비교될 수 있었다.4 찐 가문의 계승은 세습적이었지만, 찐끼엠 사망 후 찐꼬이(Trịnh Cối)와 찐뚱 간의 권력 다툼 4, 또는 찐삼(Trịnh Sâm) 사망 후 찐똥(Trịnh Tông)과 어린 찐깐(Trịnh Cán) 간의 다툼2에서 볼 수 있듯이 종종 내부 권력 투쟁으로 점철되었다.


찐 군주들은 레 왕조의 명목상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대중적 지지를 잃을까 하는 우려 때문에 중요하다고 보았다.2 찐뚱이 레 아인똥을 살해한 후에도 "레 황실을 유지하기 위해 레 아인똥의 막내아들 레 주이 담(레 세똥)을 허수아비 황제로 유지"하기로 결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황실 계승에 대한 그들의 통제는 절대적이었다.5


레 왕조는 1527년 막 왕조에 의해 전복되었고, 1533년 레 왕조가 "복원"되었을 때 찐 군주들, 특히 찐끼엠이 진정한 권력자로 부상했다.4 찐끼엠은 "여론"을 고려하여 직접 왕위를 찬탈하는 대신 레 왕조의 후손을 허수아비로 옹립했다. 이러한 방식은 찐뚱이 자신에게 대항한 황제를 살해하고 다른 레 왕자를 옹립한 후에도 계속되었다.4 레 황제들이 "실질적인 권력이 없었고" "명목상의 통치자"에 불과했다는 점은 여러 자료에서 일관되게 나타난다.4 심지어 레 왕조를 최종적으로 종식시킨 떠이선(Tây Sơn) 반란이 처음에는 "찐을 파괴하고 레를 돕는다"는 구호 아래 결집했다는 사실은 레 황실에 대한 뿌리 깊은 대중적 존경심을 더욱 강조한다.2 이는 "복원"이 레 황실 권위의 진정한 회복이 아니라, 찐 가문이 레 왕조의 깊이 뿌리박힌 역사적, 대중적 정통성을 활용하여 자신들의 군사 및 행정 통제권을 공고히 하려는 전략적 움직임이었음을 시사한다. 레를 명목상의 수장으로 유지함으로써 찐 가문은 직접적인 찬탈이 야기할 수 있는 광범위한 정치적 불안정과 대중의 반발을 피하면서 자신들의 통치를 안정화할 수 있었다.


2.3. 사회정치적 환경

17세기 베트남 내전은 북부의 찐 군주와 남부의 응우옌 군주라는 두 개의 뚜렷한 지역으로 국가를 분할하는 중요한 시기를 나타냈다.6 이 두 강력한 가문은 모두 레 황제에게 충성을 표방하면서도 서로 싸웠다.2 찐 가문은 더 많은 인구와 군사력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응우옌 가문을 결정적으로 물리칠 수 없었는데, 이는 후자의 전략적 이점과 포르투갈 무기 사용의 효과 때문이었다.4 이러한 장기적인 갈등은 국가를 분열시키고 레 왕조의 권위를 침식시켰으며, 레 황제들은 "개입할 힘이 없었다".3 이로 인해 명목상의 통치권은 하나였지만, 실제 권력은 지리적으로 분열된 역설적인 상황이 발생했다.2 찐과 응우옌 모두 격렬한 갈등 속에서도 레 황제를 계속 인정했다는 점은, 명목상의 권위가 비록 실질적인 힘은 없었지만, 국가가 완전히 독립적인 여러 주체로 법적으로 해체되는 것을 막는 통일적인 개념적 틀 역할을 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레 황제에 대한 공유된, 비록 공허한 충성심은 국가가 여러 주권 국가로 법적으로 분열되는 대신 사실상의 분열과 장기적인 내전을 허용하는 공통의 이념적 기반을 제공했다.


초기 레 왕조는 강력한 유교적 기반과 능력 위주의 과거제를 통해 중앙집권적 관료제를 확립하여 국가 안정과 문화적 번영에 기여했다.2 그러나 찐 가문의 통치 아래 있던 후기 레 시대에도 유교는 지배적인 이념으로 남아 있었고, 과거제도는 사회적 상승의 주요 통로로 계속되었다.3 하지만 이 시기에는 사회 계층화가 더욱 뚜렷해지고 부유한 엘리트와 빈곤한 농민 간의 격차가 확대되어 사회적 긴장이 고조되었다.3 이러한 불만은 1771년부터 시작된 떠이선 반란을 포함한 광범위한 농민 봉기로 이어졌다.2 떠이선 반란은 아이러니하게도 레 왕조에 권력을 회복시키기 위해 찐과 응우옌 모두를 물리쳤다.2 유교는 위계질서, 사회 질서, 도덕적 통치를 강조하며 국가 안정과 행정 효율성을 위한 강력한 이념적 기반을 제공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효과는 실제 통치자들이 사회 복지 및 형평성에 대한 도덕적 의무를 얼마나 잘 이행하는지에 달려 있었다. 찐 가문의 사실상의 통치가 대중의 물질적 복지를 해결하지 못하고 사회적 불균형을 심화시켰을 때, 이념적 틀은 그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광범위한 불만과 궁극적으로 반란을 막을 수 없었다. 이는 이념이 통치 청사진을 제공할 수 있지만, 그 실제 적용과 결과적인 사회적 결과가 안정 유지에 결정적임을 보여준다.


3. 일본의 천황-막부 체제

3.1. 막부의 역사적 발전

일본 최초의 무사 정권인 가마쿠라 막부(막부, 문자 그대로 "천막 정부")는 미나모토 요리토모(Minamoto Yoritomo)가 1192년 가마쿠라 본부에 설립했다.7 그는 1185년 일본에 대한 군사적 패권을 획득한 후 이 막부를 세웠다.7 이는 천황 정부가 여전히 법적 권위를 유지했음에도 불구하고, 군사 엘리트가 정치적, 경제적 리더십을 장악하는 중요한 변화를 의미했다.8 막부는 각 지방에 군사 지사(슈고)와 개별 영지에 대한 장원 관리인(지토)을 임명하여 효과적인 전국 네트워크를 구축했다.10


요리토모 사망 후 1199년, 그의 미망인 호조 마사코(Hōjō Masako)가 이끄는 호조 가문이 권력을 장악했다.9 그들은 허수아비 쇼군 뒤에서 싯켄(섭정)으로 통치하는 섭정 시스템을 확립하여 막부를 효과적으로 통제하고 교토의 황실을 더욱 소외시켰다.9 호조 가문은 쇼군 자체를 통제하여 그들을 허수아비로 만들면서도 역설적으로 "쇼군 직책의 권력과 위신"을 높였다.11


아시카가 다카우지(Ashikaga Takauji)는 황실 통치를 일시적으로 복원하려 했던 겐무 신정(Kenmu Restoration)을 전복시킨 후 1336년 두 번째 막부인 아시카가 막부를 설립했다.12 다카우지와 고다이고 천황(Emperor Go-Daigo) 간의 분쟁은 남북조 시대(남북조 시대)로 이어졌는데, 이는 1392년까지 56년간 이어진 이념적 권력 투쟁이었다.12 아시카가 막부는 "세 일본 군사 정부 중 가장 약한" 것으로 평가되었으며, 개인 영지가 거의 없어 쇼군의 위신과 분권화된 다이묘(지방 영주)의 충성심에 크게 의존했다.12 오닌 전쟁 이후 그 영향력은 결국 교토의 지역적 세력으로 축소되었다.12


도쿠가와 이에야스(Tokugawa Ieyasu)는 다이묘에 대한 패권을 획득한 후 1603년 에도(현 도쿄)에 세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막부를 설립했다.8 이 막부는 260년 이상 지속되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국가 통제"를 달성하고 "평화와 번영"을 가져왔다.8 도쿠가와 막부는 천황, 다이묘, 종교 기관을 직접 통제했다.10


3.2. 역할, 권력, 정통성

일본 천황은 "일본의 세습 군주이자 국가원수"이며, "일본 국가와 일본 국민의 통합의 상징"으로 정의된다.17 전통적으로 천황은 태양 여신 아마테라스의 직계 후손이자 신도 종교의 수장으로 여겨진다.17 역사적으로 천황의 역할은 주로 의례적이고 상징적인 역할과 실제적인 황제 통치자 역할 사이를 오갔지만, 1192년 첫 막부 설립 이후 천황은 최고 전장 사령관으로서의 역할을 거의 맡지 않았고 "외부 정치 세력에 의해 통제"되었다.17 막부 시대에는 천황이 "명목상의 통치자"로 남아 있었으며 16, 주로 "종교적 및 의례적 의무"에 집중했다.18 직접적인 권력은 제한적이었지만, 천황의 승인은 다이묘와 쇼군이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는 데 중요했으며, "전통적 권위의 외피"를 제공했다.19 일본 천황의 정치적 권력은 군사 지도자와 막부의 출현으로 "상당히 약화"되었고 19, "대부분 상징적"이 되었다.19 그럼에도 불구하고 쇼군들은 천황으로부터 자신들의 권위를 얻고 황실의 임명을 통해 "통치를 정당화"했다.10 강력한 다이묘들도 자신들의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해 "천황으로부터 칭호나 칙령"을 구했다.19 가마쿠라 시대부터 도쿠가와 시대까지 수세기에 걸쳐 이러한 일관된 패턴은 천황의 상징적 역할이 수동적이지 않고 사실상의 군사 통치를 유지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했음을 보여준다. 이는 신성한 권리나 고대 전통에 깊이 뿌리내린 상징적 권력이 매우 탄력적이고 필수적인 정통성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시사한다. 사실상의 통치자들은 이러한 상징적 권위를 폐지하거나 파괴하려 하기보다는 전략적으로 이를 활용하고 조작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명목상의 권위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이 야기할 수 있는 불안정과 대중의 반발을 피하면서 자신들의 통치에 문화적으로 수용 가능하고 안정적인 기반을 제공함으로써 이원적 시스템을 영속화한다.


쇼군(세이이타이쇼군)은 "일본의 세습 군사 독재자"이자 거의 700년 동안 "최고의 군사 및 정치 지도자"였다.7 명목상 천황에 의해 임명되었지만, 쇼군들은 "실질적인 권력"을 가졌다.16 특히 도쿠가와 쇼군들은 모든 임명에 대해 "절대적인 통제"를 행사했으며, 주요 도시와 수익성 있는 광산을 통제했다.8 그들은 무역, 농업, 외교, 종교를 규제했다.13


쇼군들은 천황으로부터 권위를 얻는다고 주장함으로써 "통치를 정당화했다".10 도쿠가와 시대의 바쿠한(bakuhan) 시스템은 막부(국가 권위)와 지역 권위를 가진 다이묘 간에 봉건 권력을 분할했다.15 산킨코타이(sankin-kōtai) 시스템은 다이묘들이 두 개의 거주지(영지 내 하나, 에도 내 하나)를 유지하고 격년으로 에도에 거주하도록 요구하여 그들의 충성심을 확보하고 너무 많은 권력을 축적하는 것을 막았다.8 막부는 또한 다이묘 가문과 황실을 규제하는 법률을 제정했다.15


3.3. 사회정치적 환경

막부 시대의 봉건 일본은 엄격하게 계층화된 계급 기반 사회였으며, 명확한 구분이 있었다.18 사회는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아 사무라이(최상위), 농민, 장인, 상인(최하위)으로 구성되었다.13 다이묘는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는 강력한 세습 지역 영주였다.18


도쿠가와 시대에는 유교가 지배적인 신념이 되었으며, 충성심과 의무를 강조했다.14 도쿠가와 막부는 기독교 선교사와 외국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사코쿠("쇄국") 고립주의 정책을 엄격하게 시행하여 일본인의 해외 여행, 해외 귀국, 원양 선박 건조를 금지했다.13


가마쿠라 막부가 상대적으로 효과적인 전국 네트워크를 구축했지만 10, 아시카가 막부는 "세 일본 군사 정부 중 가장 약한" 것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개인 영지가 거의 없었고" 쇼군의 위신과 분권화된 다이묘의 충성심에 크게 의존했다.12 이러한 분권화는 센고쿠 시대 일본의 분열에 기여했다.19 이와 대조적으로, 도쿠가와 막부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국가 통제"를 달성했으며 8, "일본이 본 가장 강력한 중앙 정부"가 되었다.10 그들은 산킨코타이와 같은 엄격한 조치를 시행하여 다이묘를 구속하고 그들의 권력을 제한했다.8 이는 초기 군사적 지배(가마쿠라)가 통제 메커니즘 부족으로 분권화와 내부 갈등(아시카가/센고쿠)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분열은 이후 더욱 강력하고 중앙집권적인 군사 통치(도쿠가와)를 통해 국가 질서와 안정을 회복하려는 강력한 동기를 부여한다. 막부의 진화는 봉건 사회의 내재된 원심력과 군사적 통제 필요성 사이의 균형을 맞추려는 지속적인 노력을 반영하며, 궁극적으로 더욱 지속적이고 통일된, 그러나 여전히 이원적인 시스템으로 이어진다.


도쿠가와 막부는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농민 봉기, 재정적 어려움, 그리고 증대하는 반대 세력으로 인해 점차 약화되었다.10 서구 세력에 대한 일본의 개방은 중요한 기여 요인이었다.10 1868년, 여러 남서부 영지의 영향력 있는 사무라이들이 막부를 전복시키고 거의 700년 만에 처음으로 직접적인 황실 통치를 회복시켰다.8


도쿠가와 막부는 유교를 지배적인 신념으로 채택했는데, 이는 충성심과 의무를 강조하고 엄격한 사회 계층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13 이 이념은 사회를 계층으로 구조화하고, 사무라이를 최상위에 두어 그들의 통치 지위를 정당화했으며, 효도를 강조했다.13 동시에 막부는 기독교와 같은 외부 영향력을 배제하기 위해 엄격한 쇄국 정책(사코쿠)을 시행하여 사회 질서를 교란하는 것으로 간주되는 요소들을 차단하고 외국 무역을 금지했다.13 이는 사실상의 통치자(도쿠가와 쇼군)가 정치적, 군사적 삶뿐만 아니라 국가의 사회적, 이념적 영역까지 통제하려는 의도적이고 포괄적인 전략을 시사한다. 기존 권력 구조를 강화하는 위계적이고 의무 지향적인 유교 철학을 장려하고, 동시에 (기독교와 같이 파괴적이라고 인식되는) 외부 영향력을 제한함으로써 막부는 고도로 안정적이고 통일되며 예측 가능한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이는 이원적 통치 시스템이 내부 이념적 통제와 외부 정책(쇄국주의)을 모두 활용하여 내부 권력 균형을 유지하고 장수를 보장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4. 비교 분석: 레-찐 대 천황-막부 시스템

4.1. 이원적 권력 구조의 유사점

레-찐 체제와 일본의 천황-막부 체제 모두에서 전통적이고 세습적인 통치자(베트남의 레 황제, 일본의 천황)는 명목상 또는 상징적 권위를 가졌다.2 반면, 강력한 군사적 지원을 받는 가문(베트남의 찐 군주, 일본의 쇼군)은 실제적인 행정, 군사, 사법 권력을 행사했다.4 이러한 근본적인 권력 분할, 즉 한 주체가 칭호를 가지고 다른 주체가 진정한 통제권을 가지는 것은 두 시스템의 결정적인 유사점이다.


찐 군주와 다양한 막부(가마쿠라, 아시카가, 도쿠가와)는 모두 세습적인 군사 지도자였으며, 오랜 기간 사실상의 통치를 확립했다. 그들의 권력은 근본적으로 군사력에 대한 통제와 행정 및 사법 구조를 통해 자신들의 의지를 강제하는 능력에 기반을 두었다.4 찐 가문의 "주(Chúa)" 칭호가 일본의 쇼군 직책과 비교된다는 명시적인 언급은 이러한 공통된 특징을 강조한다.4


두 시스템의 핵심적인 공통 전략은 사실상의 통치자들이 명목상의 황실을 적극적으로 유지했다는 점이다. 찐 가문과 쇼군 모두 황제의 전통적 또는 신성한 정통성이 대중의 수용과 안정에 결정적이라는 점을 이해했다. 이는 직접적인 찬탈을 막았는데, 이는 더 큰 불안정, 내부 반란 또는 외부 개입으로 이어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2 찐 가문은 심지어 이전 황제들을 폐위하거나 살해한 후에도 새로운 레 황제들을 옹립하여 명목상의 계보를 계속 유지했다.4


4.2. 주요 차이점과 미묘한 차이

일본 천황은 태양 여신 아마테라스의 직계 후손이라는 독특한 신성한 지위를 가졌으며, 이는 그의 상징적 권위를 깊이 뿌리박고 거의 침범할 수 없게 만들었다.17 이러한 신성한 아우라는 쇼군이 황실을 제거하지 않고 통제하며 정통성을 얻기로 일관되게 결정하는 데 기여했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레 황제들은 명나라 통치로부터 국가를 해방시키고 황금기를 열었다는 역사적 업적으로 존경받았지만 2, 일본 천황과 같은 수준의 신성하거나 신화적인 지위를 가지지 못했다. 이로 인해 그들의 지위는 찐 군주에 의한 직접적인 조작, 폐위, 심지어 살해에 더 취약했다.4 찐 가문이 레 황제들을 마음대로 교체하면서도 왕조의 허울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취약성을 강조한다. 명목상의 통치자의 정통성의 근본적인 성격과 원천은 그들의 안전과 이원적 시스템의 전반적인 안정성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 신성하게 승인된 명목상의 통치자는 대체하거나 폐지하기 훨씬 더 어려우므로, 사실상의 통치자들은 그들을 우회하고 권력 구조에 통합해야 한다. 반대로, 역사적으로 정통성이 있지만 신성하지 않은 명목상의 통치자는 대중의 수용에 여전히 유용하지만, 장애물이 될 경우 더 쉽게 통제되거나 제거될 수 있으며, 이는 통치 엘리트가 명목상의 권위를 관리하는 데 더 큰 내부 불안정을 초래할 수 있다.


레-찐 체제는 찐-응우옌 분열로 인해 복잡해졌는데, 이는 국가를 두 개의 전쟁 중인 반쪽(북부와 남부)으로 사실상 분할했으며, 둘 다 동일한 명목상의 레 황제에게 충성을 주장했다.2 이로 인해 장기적인 내전과 분열된 실질적 권력 구조가 발생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은 내부 분열(예: 센고쿠 시대)을 겪었지만, 쇼군(특히 도쿠가와)은 전국에 걸쳐 통일되고 중앙집권적인 통제를 목표로 했고 대체로 이를 달성했으며, 이는 지역 다이묘 시스템을 통해 이루어졌다.8


도쿠가와 막부는 산킨코타이(참근교대)와 같은 매우 효과적인 메커니즘과 엄격한 법률을 시행하여 다이묘를 통제하고 일본 전역에 걸쳐 중앙집권적인 군사 정부를 유지했다.8 찐 군주들은 북부에서 지배적이었지만, 남부에서는 강력하고 독립적인 응우옌 가문을 상대해야 했으며, 이는 레 왕조 전체에 걸쳐 중앙집권화의 정도가 낮았음을 시사한다. 찐 가문이 응우옌 가문을 결정적으로 물리칠 수 없었다는 점은 도쿠가와 막부에 비해 중앙집권적 통제에 한계가 있었음을 강조한다. 아시카가 막부 또한 더 분권화된 모델을 보여주었다.12 이원적 통치 시스템이더라도, 사실상의 권력자가 지역 세력에 대한 통제권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행사하는지에 따라 국가 통합과 중앙집권화의 결과는 크게 달라진다. 일본의 모델, 특히 도쿠가와 시대는 강력하고 전략적으로 유능한 사실상의 통치자가 명목상의 권위를 활용하여 국가적 통일과 안정을 달성하는 방법을 보여준다. 반대로 베트남의 사례는 이원적 시스템이 어떻게 내부 분열과 장기적인 갈등의 메커니즘이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며, 명목상의 권위는 경쟁하는 세력에게는 다툼의 대상이 되거나 공유되지만 공허한 상징이 될 뿐, 전체 영토에 대한 진정한 통합 세력이 되지 못한다. 이는 사실상의 통치자가 모든 중요한 지역 세력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하고 유지하는 능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한다.


두 시스템 모두 유교의 영향을 받아 행정 구조와 사회 계층이 형성되었다.3 그러나 일본의 독특한 신도 신앙은 천황의 신성한 혈통을 가정하여 레-찐 체제에는 없는 추가적인 신성한 정통성을 제공했다. 또한, 도쿠가와 시대 일본의 엄격한 쇄국 정책(사코쿠)은 베트남의 유럽 세력과의 갈등 많았던 교류와 비교하여 독특한 내부 역동성을 형성하고 외부 개입을 제한했다.2


4.3. 발생 및 지속에 기여한 요인

두 시스템 모두 왕조의 약화와 내란 시기에 발생했으며, 군사 강자나 가문이 권력 공백을 메우고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등장했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직접적인 찬탈 대신 기존의 정통성 있는(비록 약화되었지만) 황실을 통해 간접적으로 통치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러한 간접 통치는 전통적 또는 신성한 정통성의 중요한 원천을 제공했다.2


이러한 이원적 시스템의 오랜 지속 기간(레-찐은 2세기 이상, 천황-막부는 거의 7세기)은 여러 요인에 기인한다. 명목적 권력과 실질적 권력 간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관리하는 능력, 군사 기구의 강점과 조직력, 대중의 인식된 정통성(비록 조작되었을지라도), 그리고 지역 권력을 통제하기 위한 행정 메커니즘의 발전이 그것이다. 도쿠가와 막부가 정교한 통제 메커니즘을 통해 안정과 중앙집권화를 달성한 성공 8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찐-응우옌 분할은 약점이었지만, 한 세기 동안 안정적인, 비록 분열된 균형을 유지하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4


표 1: 레-찐 체제와 천황-막부 체제의 비교 특징


5. 이원적 통치의 다른 역사적 발현

5.1. 고대 스파르타: 두 왕과 에포로이

스파르타는 아기아다이(Agid)와 에우리폰티다이(Eurypontid) 두 왕가에서 나온 두 명의 세습 왕을 두는 독특한 시스템을 가졌다.20 그들의 주요 역할은 군사적 리더십(전쟁 지도자로서)과 종교적 의무(제우스 라케다이몬과 제우스 우라니오스의 사제로서)였다.20 그들은 일부 행정적, 사법적 책임을 가졌지만, 그들의 권력은 절대적이지 않았고, 심지어 군사 문제에서도 전쟁을 독자적으로 시작할 수 없었기 때문에 제한적이었다.20

스파르타의 실제 행정 및 사법 권력은 주로 다른 기관에 있었다. 두 왕을 포함한 30명의 장로로 구성된 게루시아(Gerousia)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20 결정적으로, 매년 선출되는 5명의 행정관인 에포로이(Ephors)는 상당한 권력을 가졌다. 그들은 왕의 행동을 법적으로 조사하고, 아고게(군사 훈련)를 감독하며, 심지어 왕을 기소할 수도 있었다.20 이 시스템은 왕의 권력에 대한 강력하고 적극적인 견제 장치를 만들어 어떤 개인이나 왕가도 너무 많은 권위를 축적하는 것을 막았다.


5.2. 로마 공화정: 집정관, 원로원, 민회

로마 공화정은 두 명의 집정관에 의해 이끌어졌는데, 이들은 최고 선출직 공무원으로서 1년 임기로 공동으로 봉사했다.22 그들은 광범위한 행정, 사법, 군사 권력을 가졌으며, 로마 외곽의 모든 로마 군단을 지휘하는 것을 포함했다.22 결정적인 특징은 그들의 상호 거부권이었는데, 이는 각 집정관이 다른 집정관의 행동을 막을 수 있도록 하여, 이전 왕들의 권력 집중을 방지하기 위한 의도적인 메커니즘이었다.22


약 300명의 종신직 전직 행정관으로 구성된 원로원은 강력한 자문 기구였다. 기술적으로는 자문 역할이었지만, 정책 제안, 공공 재정 통제, 외교 감독 등에서 상당한 사실상의 영향력을 얻었다.22 집정관들은 원로원 회의를 소집하고 주재했다.22


켄투리아 민회와 같은 시민 민회는 공직자(집정관 포함)를 선출하고 제안된 법률, 재판, 군사 결정에 대해 투표했다.22 그러나 이러한 민회는 완전히 민주적이지 않았으며, 부유층에 불균형적으로 유리한 가중 투표 방식을 채택했다.23


로마 공화정의 통치는 복잡한 견제와 균형 시스템이었다. 그리스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집정관(군주제 요소), 원로원(귀족제 요소), 민회(민주주의 요소)를 단일 정치 시스템으로 결합했다고 칭찬했다.23 다른 견제 장치로는 집정관의 짧은 연간 임기, 임기 후 책임, 행정관의 상호 거부권 등이 있었다.22 위기 시에는 독재관이 임명될 수 있었지만, 제한된 임기 동안만 가능했다.22


5.3.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제후

신성 로마 황제는 세습직이 아니라 소수의 강력한 제후인 선제후(Electors)에 의해 선출되는 직책이었다.24 제국의 최고 수장으로서 가장 높은 지위를 가졌지만, 황제는 자체적으로 "효과적인 왕권이 거의 없었다". 그의 실제 권력은 주로 제국의 제후로서 그가 행사하는 권력에 달려 있었다.24 이러한 현실은 1438년부터 1806년 제국 해체까지 합스부르크 가문이 황제직을 사실상 독점하는 결과를 낳았다.24


제국은 중앙집권적인 국가가 아니었으며, 수십 개에서 수백 개의 개별 주체들로 구성되어 다양한 지역 통치자들(제후, 공작, 주교, 자유 제국 도시)에 의해 통치되었고, 이들을 총칭하여 제국 영지(Imperial Estates)라고 불렀다.24 이들 주체들은 "제국에 직접 귀속"되어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황제로부터 직접 영지를 봉토로 받았다는 것을 의미한다.24 제국 의회(Reichstag)는 입법 기관이었으며, 이론적으로는 황제보다 우위에 있었고, 이 제후들은 세 개의 구성 의회에서 상당한 권력을 행사하고 투표했다.24


황제와 제국 영지 간의 관계는 "끊임없는 긴장"과 종종 경쟁하는 세력으로 특징지어졌다.24 황제들은 자신들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지역 통치자들에게 점점 더 많은 자율성과 특권을 부여할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권력의 꾸준한 분산"으로 이어졌다.25 이러한 분권화와 황제직의 선출적 성격은 권력의 균형을 황제 중심에서 지역 통치자들 쪽으로 지속적으로 이동시켰다.25


5.4. 중세 유럽: 교황과 세속 군주

교황은 라틴 기독교 세계 내에서 최고의 영적, 도덕적 권위를 가졌다. 11세기와 12세기의 교황들은 세속 군주국의 권력을 약화시키려 했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7세의 Dictatus papae(1075년)는 황제를 폐위할 수 있는 교황의 독점적 권한을 주장하고 로마 교회를 유일한 보편적 권력으로 선언했다.26


신성 로마 황제와 다양한 왕들을 포함한 세속 통치자들은 정치적, 군사적 권력을 가졌다. 그들은 종종 세속 행정을 위해 주교들에게 의존했으며, 왕권신수설을 통해 자신들의 권위를 정당화했다.26


서임권 논쟁은 11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주로 황제와 왕들이 주교와 수도원장을 임명하고 영적 권위의 상징을 부여하는 "평신도 서임" 관행을 둘러싼 주요 갈등이었다.26 교황 그레고리오 7세가 1076년 하인리히 4세 황제를 파문하면서 갈등은 크게 고조되었고, 하인리히는 1077년 카노사에서 극적인 참회를 했다.26


갈등은 1122년 보름스 협약으로 대체로 종식되었는데, 이는 평신도 서임을 폐지했지만 세속 지도자들에게 임명 과정에서 중요한, 비공식적인 영향력을 허용했다.26 이 논쟁은 황제의 종교적 권위를 회복할 수 없을 정도로 손상시켰고, 독일과 이탈리아의 정치적 분열에 기여했으며, 교황권의 위상과 교회법의 성장을 강화했다.26 이는 교회와 국가 간의 "초기 중세 균형을 깨뜨렸다".26


5.5. 이슬람 세계: 칼리프와 술탄

칼리프제는 예언자 무함마드의 계승과 세계 무슬림의 지도력을 상징한다고 여겨지는 이슬람 정치 제도였다.28 역사적으로 칼리프는 더 넓은 정통성과 영적 영향력을 가졌지만, 모든 문제에서 반드시 최고의 종교적 권위를 가진 것은 아니었다.29


술탄은 세속적인 군사 및 정치 통치자였으며, 그들의 권위는 일반적으로 특정 영역에 국한되었다.29 그들은 국가의 세속적 운영과 군사력을 의미하는 다르 알-맘라카(Dar al-mamlaka)를 가졌다.29


시간이 지남에 따라 칼리프제는 지역 통치자들(술탄)이 더 많은 군사적, 정치적 권력을 얻으면서 약화되었다.29 처음에는 술탄국이었던 오스만 왕조는 1512년 칼리프제를 주장했으며, 이슬람 성지(메카, 메디나, 예루살렘)와 바그다드를 정복하면서 그 주장은 더욱 강화되었다.28 16세기 동안 오스만인들은 칼리프를 시간적, 영적 권위를 모두 가진 신성하게 임명된 신비로운 인물로 재해석했으며, 오스만 술탄은 항상 칼리프였다.28 이는 오스만 맥락에서 두 역할을 효과적으로 통합했지만, 칼리프의 상징적 역할과 새로운 터키 정부의 세속적 비전 사이에 여전히 긴장이 발생할 수 있었고, 이는 1924년 칼리프제의 폐지로 이어졌다.28


5.6. 현대 입헌 군주제

5.6.1. 태국

태국 국왕은 국가원수이자 태국 문화 정체성의 상징이며, 신성하고 불가침의 존재이다.30 1932년부터 국왕은 의회, 총리가 이끄는 내각, 법원을 통해 입법, 행정, 사법 권력을 행사한다.30 정치 생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는 않지만, 국왕은 "엄선된 문제에 대해 강한 도덕적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부에 "자문하고, 격려하고, 경고할 권리"를 가진다.30 국왕은 또한 개발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자금을 지원하며, 성공적인 프로젝트는 정부로 이관되어 추가 개발된다.30 국왕은 법률을 변경할 수 없으며, 입법권은 의회에 있다.31


정부는 총리가 이끌며(1992년부터 총리는 국회의원이어야 함), 내각은 다양한 부처를 담당한다.30 입법권은 양원제 국회에 있으며, 국회는 국민이 선출하는 하원과 상원(처음에는 국왕이 임명했으나 나중에는 직접 선출됨)으로 구성된다.30 이 시스템은 서구 민주주의와 유사한 견제와 균형 시스템으로 운영된다.30


5.6.2. 영국

군주제는 영국에서 가장 오래된 정부 형태이며, 군주가 국가원수이지만 입법권은 선출된 의회에 있는 입헌 군주제로 운영된다.32 역사적으로 영국 군주들은 상당한 입법, 행정, 사법 권력을 가졌다.33 그러나 이러한 권력은 헌법 원칙에 따라 선출된 공무원에게 대부분 이전되었으며, 이는 입헌 군주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33 현재 군주의 의무는 대부분 의례적이고 상징적이며, "국가 정체성, 통합 및 자부심의 상징"으로서 "안정성과 연속성"을 제공한다.32 공식적인 국가원수이자 군대의 수장이지만, 통치에 있어서 그들의 실제 권력은 미미하다.33


입법 및 법률 통과 권한은 선출된 의회에 있다.32 실제 입법 및 행정 권력은 총리와 의회에 있다.33 군주는 더 이상 정치적 또는 행정적 역할을 하지 않는다.32


이러한 다양한 시스템에 대한 분석은 "이원적" 권력의 광범위한 스펙트럼을 보여준다. 고대 스파르타의 두 왕은 에포로이와 게루시아의 적극적인 감시와 견제를 받았다.20 로마 공화정의 두 집정관은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지만, 상호 거부권으로 견제되었고, 원로원과 민회에 의해 균형을 이루었다.22 신성 로마 황제는 명목상의 수장이었지만, 라이히스탁에서 강력한 사실상의 주권을 가진 제후들과 끊임없이 협상했다.24 중세 유럽의 교황과 황제/왕은 특정 권한 영역을 두고 직접적이고 종종 폭력적인 권력 투쟁을 벌였다.26 대조적으로, 영국의 현대 입헌 군주제는 실제 권력이 선출된 기관으로 거의 완전히 이전되어 군주가 주로 상징적인 인물로 남게 된 경우를 대표한다.32 태국 국왕은 더 강한 도덕적 영향력과 자문 역할을 유지하며 개발 프로젝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만, 여전히 정부를 "통해" 권력을 행사하며 독립적으로 행사하지는 않는다.30 이는 "이원적 통치"가 단일한 개념이 아니라 역동적인 연속체임을 보여준다. 이는 진정하고 종종 논쟁적인 권력 분담과 적극적인 견제와 균형을 포함할 수도 있고, 한 주체가 상징적 권력을 제외한 모든 권력을 효과적으로 양도한 시스템으로 진화할 수도 있다. "명목상의" 측이 보유하는 실제 권력의 정도는 역사적 맥락에 따라 크게 달라지며, 시스템의 내부 역동성, 안정성, 그리고 중앙집권적 통치 대 분권화된 자율성의 능력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여러 사례에서 사실상의 권력자는 보다 전통적이거나 신성하게 정당화된 원천으로부터 권위를 얻거나 얻었다고 주장한다. 로마 공화정에서 집정관은 "이전 왕들로부터" 권력을 물려받았고 22, 그들의 임페리움은 민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비준되었다.22 신성 로마 황제는 제후들에 의해 선출되었고, 그의 실제 권력은 종종 그의 개인 영지에 달려 있었다.24 일본 쇼군은 명목상 천황에 의해 임명되었다.10 베트남 찐 군주들은 레 황제들을 옹립하고 통제했다.4 심지어 현대 태국에서도 국왕은 "의회를 통해 입법권, 내각을 통해 행정권, 법원을 통해 사법권"을 행사한다.30 이는 그의 주권이 선출된 정부에 공식적으로 위임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반복적인 패턴은 많은 이원적 시스템, 특히 명목상의 통치자를 특징으로 하는 시스템이 위임된 권한 또는 대리 정통성 개념에 의존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군사 강자, 선출된 공무원 또는 강력한 귀족 등 사실상의 권력자는 명목상의 권위의 전통적 또는 신성한 정통성을 전략적으로 활용하거나 활용한다고 주장한다. 이 메커니즘은 보다 원활한 권력 이양, 정치적 안정 유지, 또는 주권에 대한 깊이 뿌리박힌 신념에 대한 직접적인 도전을 피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여, 새로운 권력 중심을 오래되고 존경받는 뿌리에 효과적으로 접목시킨다.


일본 천황의 정통성은 태양 여신 아마테라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독특한 신성한 혈통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17, 이는 그가 정치적으로 약했을 때에도 역사적으로 신성한 인물로 만들었다. 중세 유럽의 군주들은 종종 자신들의 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왕권신수설을 주장했다.26 이와 대조적으로, 영국과 태국과 같은 현대 입헌 군주제는 다른 근본적인 원칙에 따라 운영된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천황의 지위는 "국민의 의지"에서 비롯된다.17 마찬가지로 태국에서는 국왕의 "주권이 국민으로부터 나온다".30 영국 군주의 입법권은 "선출된 의회에 있다".32 신성한 권리에서 국민으로부터 파생된 권력으로의 이러한 변화는 근본적인 변화이다. 이는 명목상의 통치자의 권위의 철학적 기반이 이원적 시스템의 본질을 깊이 형성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6. 결론

이원적 통치 시스템에 대한 포괄적인 분석은 이러한 구조가 다양한 역사적, 지리적 맥락에서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임을 보여준다. 베트남의 레-찐 체제와 일본의 천황-막부 체제는 명목상의 권위와 실질적 권력의 분리라는 핵심적인 유사점을 공유하며, 강력한 군사적 지원을 받는 세습 가문이 통치를 장악하는 동시에 전통적인 황실의 정통성을 유지하여 안정과 대중적 수용을 확보하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은 명목상의 통치자의 정통성 원천(신성 대 역사적), 중앙집권화의 정도, 그리고 내부 분열에 대한 사실상의 통치자의 통제 능력에서 중요한 차이를 보였다. 일본 천황의 신성한 지위는 그를 거의 침범할 수 없는 존재로 만들었으며, 쇼군이 황실을 통제하면서도 유지하도록 강요했다. 반면, 레 황제는 역사적 정통성을 가졌지만 신성한 보호막이 없어 찐 군주에 의해 더 쉽게 조작되고 폐위될 수 있었다. 또한, 도쿠가와 막부가 성공적으로 중앙집권화를 달성하여 국가적 통일과 장기적인 평화를 가져온 반면, 레-찐 체제는 찐-응우옌 분열로 인해 사실상의 국가 분열과 장기적인 내전으로 이어졌다. 이는 이원적 통치 시스템이 국가 통합을 촉진할 수도 있고, 내부 갈등을 영속화할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스파르타의 두 왕과 에포로이의 적극적인 견제, 로마 공화정의 상호 거부권과 원로원 및 민회의 균형,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자율적인 제후 간의 긴장, 중세 유럽의 교황과 세속 군주 간의 격렬한 서임권 논쟁, 그리고 이슬람 세계의 칼리프와 술탄의 진화하는 관계를 포함한 다른 사례들은 이원적 통치 시스템이 단순한 허수아비 역할부터 진정한 권력 분담 및 견제와 균형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진다는 것을 강조한다. 현대 입헌 군주제인 영국과 태국은 명목상의 군주가 주로 상징적 역할을 수행하고 실제 권력은 선출된 정부에 있는 시스템으로의 전환을 보여준다.


궁극적으로, 이원적 통치 시스템은 위기 상황에서 질서를 회복하고, 상충하는 정통성 원천을 조화시키며, 새로운 권력 중심을 기존의 존경받는 제도에 접목시키려는 시도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시스템의 지속성은 명목상의 권위와 실질적 권력 간의 복잡한 관계를 관리하고, 변화하는 사회정치적 환경에 적응하며, 내부 및 외부 압력을 효과적으로 처리하는 능력에 달려 있다. 이러한 역사적 사례들은 권력 분담의 복잡성과, 명목상의 권위가 비록 실질적인 힘은 없더라도 국가의 안정과 정통성을 유지하는 데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귀중한 교훈을 제공한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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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베트남 Breaking News에 2010.5.21.에 게재된 '베트남과 일본의 역사에서 두 정부가 병행적으로 존재했던 메커니즘에 관하여'라는 논문(게시물에서는 저자 확인 불가)


베트남 레-찐 왕조의 이원정권 체제: 역사와 경과


베트남과 일본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도 두 정부가 공존하는 메커니즘은 매우 일찍부터 나타났다.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기원전 9세기~6세기)는 두 명의 왕이 통치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두 왕은 명목상 국가 원수, 군사 지도자, 종교적 권위자, 그리고 사법 결정권을 가진 동등한 권력을 지녔다. 동서양 국가의 오랜 역사에서 두 권력 메커니즘이 공존했던 다양한 사례들을 찾아볼 수 있으며, 이러한 정치 체제의 형태는 매우 다양하고 복잡하다. 일부 학자들은 베트남을 포함한 여러 아시아 국가 역사에 존재했던 퇴위 황제 체제 역시 두 권력 기구의 이원적 성격을 보여주는 한 유형으로 간주한다.


베트남에서는 일부 학자들이 봉건 일본의 정치 제도와 레-찐 왕조를 연관 지어 논문을 발표했지만, 제시된 쟁점들은 구체적인 설명이나 분석 없이 역사적 가설로만 제시되는 경우가 많다. 현재까지 수렴된 의견을 바탕으로 세 가지 주요 견해를 나눌 수 있다. 첫째, 일본의 황실과 막부의 정치 구조는 베트남의 레-찐 왕조와 유사하다는 견해. 둘째, 레-찐 왕조와 천황-쇼군 체제는 완전히 다르다는 견해. 셋째, 같은 국가에 두 개의 정부가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분권화된 봉건 체제의 전형적인 모습일 뿐이라는 견해이다.


이러한 유형의 정치 메커니즘은 '이중 정부' 또는 '이중 리더십'으로 불릴 수 있다. 베트남과 일본의 경우, 정치·경제적 실권은 항상 군부의 손에 있었던 반면, 황실(조정), 수많은 귀족 관료들, 그리고 그 관료적 행정 기구는 형식적이고 명목상으로 존재하며, 주로 상징적이고 의례적인 활동에서만 특정 역할을 수행했다.


이 두 국가 모델의 메커니즘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베트남을 비롯한 여러 동양 국가의 역사에서 관개와 외세 침략에 대한 투쟁의 필요성으로 인해 국가가 일찍이 형성되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아시아형 국가'의 특징이다. 이러한 유형의 국가, 특히 중국 문명의 영향을 받은 국가들에서는 중앙집권적 군주제 정치 전통이 항상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국가원수는 각국의 정치 및 사회 생활의 모든 활동을 관장하는 최고 권력을 행사했다. 따라서 각 국가의 구체적인 역사를 더욱 심층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 이를 바탕으로 표준 기준 체계를 통한 비교 분석을 통해 발전 과정과 본질, 그리고 국가 및 지역 전체의 역사와 정치적 유사점 및 차이점에 대해 정확하고 설득력 있는 결론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 논문은 베트남과 일본 역사에 존재했던 두 정부 체제의 원인, 작동 방식, 그리고 주요 사회적 결과에 대한 몇 가지 초기 고찰을 제시하고자 한다. 역사의 산물로서 이 체제는 탄생 이후 각 국가의 발전 과정에 영향을 미쳐 왔다. 베트남 역사의 관점과 두 기관의 존재라는 맥락을 고려하여, 본 논문은 양국 역사에서 16세기부터 18세기까지만 집중적으로 다룰 것이다.


시간적으로 볼 때, 봉건 시대 일본 역사상 두 정부로 구성된 정치 체제는 베트남의 레-찐 정권보다 약 4세기 앞서 나타났다. 이 체제는 1185년(또는 1192년)부터 도쿠가와 막부의 마지막 쇼군인 도쿠가와 요시노부(1866-1868)가 모든 정치 권력과 영토를 메이지 천황에게 반환할 것을 선언할 때까지 더 오래 지속되었다. 즉, 일본에서 막부는 거의 683년 동안 황실과 함께 존속한 반면, 베트남의 레-찐 정권은 '겨우' 241년 동안만 권력을 유지했다. 이 기간은 1545년 응우옌 낌(Nguyễn Kim, 1533-1545)을 대신하여 찐끼엠(Trịnh Kiểm, 1545-1569)이 군사권을 장악한 이후 1786년 떠이선(Tây Sơn)에 의해 찐 왕조가 멸망할 때까지의 기간을 의미한다.


국제적으로 16세기에서 17세기는 자본주의가 형성되고 발전하던 시기였다. 팽창주의 정책을 펼친 서구 자본주의 국가들의 등장은 많은 동방 봉건 국가들의 생존에 심각한 도전으로 다가왔다. 베트남과 일본이 항상 복잡한 국내외 문제에 직면해야 했던 상황에서, '이중 리더십' 메커니즘의 동시적 존재는 각 국가의 정치적 상황에 따른 강점, 효과성, 그리고 적응력을 시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베트남과 일본 모두에서 이러한 독특한 정치 메커니즘이 존재했던 것은 역사적 뿌리와 발전 논리를 가지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 근본적인 한계를 피할 수 없었다.


16세기까지 베트남 역사는 리 왕조(1010~1225), 쩐 왕조(1226~1400), 그리고 초기 레 왕조(1428~1527)를 포함하여 세 개의 중앙집권적 정부를 가진 왕조들을 경험했다. 중앙집권화 수준이 증가함에 따라 초기 레 왕조, 특히 레 탄 통(Lê Thánh Tông, 1460~1497) 시대에 다이비엣(Đại Việt)은 동남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성장했다. 중앙 정부의 권력은 황제의 손에 있었다. 이러한 중앙집권적 체제 하에서 왕위의 변화는 이전 군주들이 시행했던 일련의 정책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었고, 심지어 정권 전체를 뒤흔들 수도 있었다. 레 탄 통 서거 후, 레 왕조의 정치 제도는 곧 모순과 한계를 드러냈다. 한편, 레 히엔 통(Lê Hiến Tông, 1497-1504), 레 위 묵(Lê Uy Mục, 1505-1509), 레 뜨엉 득(Lê Tương Dực, 1509-1516)과 같은 후대 황제들은 국가의 발전을 지속할 효과적인 해결책을 내놓지 못했다. 초기 레 왕조 황제들이 구축하기 위해 애썼던 중앙집권 체제는 붕괴 위기에 처했다.


국가의 운명은 점차 약해졌고, 마침내 1527년, 레 왕조는 해안 평야 출신 가문을 대표하는 막당중(Mạc Đăng Dung, 1527-1529) 장군에게 왕권을 넘겨주었다. 막 왕조는 65년간의 집권 기간 동안 여러 진보적인 사회경제 정책을 시행하려 했지만, 막당중의 권력 찬탈과 국가 이익에 반하는 막 왕조의 미약한 외교 정책으로 인해 곧 고립에 빠지게 되었다. 따라서 '레를 지원하고 막을 파괴하라'(Diệt Mạc phù Lê)는 기치 아래 응우옌 낌(Nguyễn Kim, 1533-1545), 찐끼엠(Trịnh Kiểm, 1545-1569), 찐뚱(Trịnh Tùng, 1570-1623)의 세력은 점차 레 왕조의 전직 관리들과 유교 지식인들을 포함한 여러 사회 세력의 지지를 얻게 되었는데, 이들은 명망 있고 왕에 대한 충성심에 기반을 둔 인물들이었다. 나라를 안정된 발전으로 이끌기 위해 정치적 변혁이 필요한 사회 심리를 이용하여, 찐 장군들은 레 왕조의 업적과 고귀한 지위를 끊임없이 칭찬했다. 더욱이, 그들의 군사 전략 덕분에 찐 가문의 세력은 점점 더 강해졌고, 1592년에는 남조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막 군대를 국가의 정치 중심지인 수도 탕롱(Thăng Long)에서 몰아냈다. 그리하여 찐 가문의 권력 상승은 본질적으로 봉건 집단 간의 권력 투쟁이었다. 역사적 한계와 레 탄 통 이후의 위기를 극복하지 못한 막 왕조는 레 왕조의 권력을 찬탈했고, 이후 찐 가문이 막 왕조를 전복했다. 찐 정부는 레 왕조의 궁궐 바로 옆에 위치했다.


베트남 역사에서 **레-찐 기(黎鄭期)**는 일반적으로 남북조 시대(南北朝時代)로 불리지 않습니다.

베트남 역사에서 남북조 시대라고 지칭하는 시기는 주로 16세기 전반을 일컫습니다. 이 시기에는 크게 두 개의 왕조가 베트남을 양분하여 통치했습니다.

남조 (南朝): 레 왕조(黎朝)가 명목상 존속하며 찐(鄭) 가문이 실권을 잡았던 세력입니다.

북조 (北朝): 막 왕조(莫朝)가 세워진 세력입니다.

즉, **막 왕조와 후 레 왕조가 대립하던 시기(대략 1533년부터 1592년까지)**를 베트남의 남북조 시대라고 합니다.

반면, 레-찐 기는 17세기부터 18세기 후반까지 레 왕조의 황제가 명목상 존재하고 찐(鄭) 가문이 북부(당응오아이)의 실권을 잡았던 시기를 의미합니다. 이 시기에는 남부에 응우옌(阮) 가문이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여 **찐-응우옌 전쟁(Trịnh-Nguyễn War)**이 벌어졌고, 베트남은 실질적으로 두 군주(찐 군주와 응우옌 군주)에 의해 남북으로 분단되어 통치되었습니다. 이 시기를 '남북 분열기' 또는 **'당응오아이-당응쫑(Đàng Ngoài-Đàng Trong) 시대'**라고 부르는 것이 더 일반적입니다.

요약하자면:

베트남의 남북조 시대: 16세기 전반 (약 1533년 ~ 1592년), 막 왕조(북조)와 후 레 왕조(남조)가 대립하던 시기.

레-찐 기 / 남북 분열기: 17세기 ~ 18세기 후반, 찐(鄭) 가문(북부의 실권자)과 응우옌(阮) 가문(남부의 실권자)이 베트남을 양분하여 대립했던 시기. 명목상 레 황제는 찐 가문의 통제 아래 있었습니다.


북조 (막 왕조): 막등용(莫登庸)이 레 왕조의 황위를 찬탈하고 1527년 막 왕조를 세운 후, 수도를 기존의 **탕롱(昇龍, 현 하노이)**에 두었습니다. 탕롱은 당시 베트남의 북부에 해당했습니다. 그래서 막 왕조는 '북조'로 불렸습니다.

남조 (후 레 왕조): 막 왕조에 대항하여 레 왕조 부흥 운동을 주도했던 응우옌 킴(阮淦)과 찐 끼엠(鄭檢) 등은 1533년 레 황제를 옹립하고 타인호아(Thanh Hóa) 지역에 근거지를 마련했습니다. 타인호아는 탕롱보다 남쪽에 위치하고 있었으며, 이들이 원래 레 왕조의 정통성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남쪽에서 세력을 형성했기 때문에 '남조'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후 레 왕조의 수도는 주로 현재의 베트남 북부 지역에 있었습니다.

초기 수도: 후 레 왕조가 건국된 1428년부터 탕롱(Thăng Long), 즉 오늘날의 **하노이(Hà Nội)**가 수도였습니다. 탕롱은 레 왕조 시대에 **동경(東京, Đông Kinh)**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중흥기 임시 수도: 1527년 막 왕조에 의해 잠시 멸망했다가 1533년 재건된 후 레 왕조는 초기에 **타인호아 성(Thanh Hóa)**의 따이도(Tây Đô, 西都) 등을 임시 수도로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타인호아는 베트남 중북부에 위치하며, 엄밀히 남쪽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다시 탕롱으로: 1597년 이후 다시 **탕롱(하노이)**이 정식 수도가 되어 후 레 왕조가 멸망하는 1789년까지 수도 기능을 했습니다.

따라서 후 레 왕조의 수도는 베트남 북부, 현재의 하노이 지역에 주로 위치했으며, 남쪽에 수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남부에는 찐(Trịnh) 가문과 대립하던 응우옌(Nguyễn) 가문이 후에(당시 푸쑤언)를 중심으로 자신들의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이는 베트남 역사상 흔치 않은 현상이었다. 5세기가 넘는 중앙집권 체제 이후, 특정한 역사적 조건 하에서 처음으로 중앙 봉건 정부는 권력 분담 메커니즘을 갖춘 새로운 형태를 만들어냈다. 이 두 정부는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두 가문, 즉 두 봉건 집단을 대표했으며, 혈연으로 직접 연결되지 않고 공통된 장치를 통해 함께 운영되었다.


이처럼 극도로 복잡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241년 동안 찐 군주의 궁궐은 레 왕의 신민이라는 명목으로 그 지위를 유지했다. 중앙집권주의 전통을 지닌 베트남과 유교의 영향을 받기 시작한 정치 제도를 가진 나라에서, 찐 군주의 궁궐은 '자연의 질서'에 어긋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윤리와 사회 관념에 따라 왕과 신하 간의 관계 원칙을 보장하는 역할을 했다. 위대한 군사적 승리와 레 왕조 재건의 업적은 그 자체로 찐 정부의 합법적 존립을 위한 보호막을 마련했다. 여러 측면에서 찐 군주의 궁궐은 건립되었다. 이는 다른 왕조의 왕좌를 보완하는 메커니즘이었다. 황제의 궁전은 레 왕조의 영향력을 억제하는 동시에, 더 이상 국가의 정치적 중심을 지킬 수 없게 된 약화된 왕조인 레 왕의 실질적인 지위를 대체했다. 찐 군주의 궁궐의 존재는 당시 국제 관계의 맥락에서 다이비엣(Đại Việt) 국가의 위치뿐만 아니라, 시대적 조건과 정치적 발전 추세와도 일치했다.


1599년부터 막 왕조의 잔당을 기본적으로 격파한 후, 찐뚱(Trịnh Tùng, 1570-1623)은 레 왕으로 하여금 자신을 국가의 총사령관이자 빈안붕(Bình An Vương,平安王)의 최고 총대주교로 임명하게 하고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찐 군주의 궁궐(Phủ Chúa)을 세웠다. 행정과 관련하여, 홍득 시대의 정치 제도를 모델로 한 6개 부처가 있는 황실 외에도, 찐 군주는 군주가 군사 문제를 논의할 수 있도록 탐퉁(Tham Tụng)과 보이퉁(Bồi Tụng) 직위가 이끄는 별도의 정부 기구를 설립했다.


**탐퉁(Tham Tụng, 參從)**과 **보이퉁(Bồi Tụng, 陪從)**은 찐 군주의 궁궐(Phủ Chúa) 내에 설치된 고위 관직입니다. 자료에 따르면, 보이퉁은 '찐 군주의 궁궐의 부장관(Vice minister of Trịnh court)'이었고, 탐퉁은 '찐 군주의 궁궐의 장관(Minister of Trịnh court)'으로 승진했습니다. 이들은 찐 군주의 통치 아래에서 매우 큰 권력을 가졌으며, '관부료(quan Phủ liêu)'라고 불렸습니다. 이들의 권한 아래에 황실의 부서(Bộ)에 해당하는 '피엔(Phiên)'이라는 부서들이 설치되어 군사, 경제 등 찐 군주의 행정적 필요를 충족시켰습니다. 이는 황실의 행정 기능을 압도하고 대체하는 역할을 했습니다.(Gemini의 검토)



처음 설립되었을 때 찐 군주의 궁궐 정부 기구는 군사와 경제 문제를 담당하는 병(兵), 호(戶), 수(水)의 세 부서로만 구성되었다. 1718년, 찐끄엉(Trịnh Cương) 시대에 찐 군주는 인사, 재무, 의례, 군사, 사법, 공공사업의 6개 부서와 중앙군, 동부군, 서부군, 남부군, 북부군의 5개 군을 설립했다. 이는 황실의 모든 활동과 관리 기능을 압도하고 대체하는 것이었다. 지방에서는 찐 군주가 임명한 관리들이 통일된 관리 체계를 통해 권력을 행사했다. '그때부터 찐 군주의 궁궐에 설치된 여섯 부서가 모든 행정 권한을 통제하게 되었고, 황실의 여섯 부서는 더 이상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찐뚱 시대부터 찐 군주는 새로운 정치 체제의 기본 원칙을 확립했다고 할 수 있다. '왕실은 위신과 행복을 유지하고, 찐 군주의 궁궐은 권력을 유지한다.' 이 체제는 찐 가문의 거의 절대적인 권력을 보장하는 동시에, 레 국왕과 황실의 관리들이 국가 운영에 관여하지 못하도록 근본적으로 분리했다.


요약하자면, 찐 군주는 자신의 궁궐(주궁主宮)을 열고 관리들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가졌다. 그 이후로 황실의 정치와 권력은 모두 찐 군주가 직접 결정했으며, 모든 부서, 세금, 병사, 백성은 모두 찐 군주의 궁궐에 속했다. 명목상 황제의 봉급은 최고 봉급이 천 개의 사당(使堂)에만 국한되었다. 황실의 호위병과 경호병은 병사 5천 명, 코끼리 7마리, 용선 20척을 거느렸지만, 황제는 궁중 예식을 거행할 때만 왕실 예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옥 주걱을 들었다.


레 왕조와 관련해서 볼 때, 황제의 궁전은 실제로 많은 중요한 문제를 결정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왕위의 경우에도 상황과 정치적 목적에 따라 찐 군주가 왕위를 제정하거나 폐지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치적 격변 이후에도 찐 가문의 귀족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항상 충성스러운 신민으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려 했다. 왕세자를 선택하는 것과 같은 중요한 행사가 있을 때, 귀족들은 황제에게 대관식을 청원하는 청원을 제출해야 했다. 왕세자는 황제가 하사한 금문서, 관복, 옥띠를 받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 했다. 공식적으로 왕위에 오를 때도 황제의 명령을 기다려야 했고, 찐 군주의 궁궐에서 대관식을 거행해야 했으며, 사신이 가져온 황제의 칙령을 받기 위해 무릎을 꿇어야 했다.


1599년 4월, 찐뚱의 대관식에서 그는 다음과 같은 찬사를 받았다. '그의 위신은 산처럼 높고, 그의 그림자는 궁중의 무예와 문학가처럼 깊다. 나라를 평화롭게 하려는 그의 계획은 하늘처럼 높고 맑다. 이웃 나라들과 평화를 이루려는 그의 믿음은 그의 책처럼 높고, 그의 확고한 의지는 수천 개의 땅에 평화를 지킨다. 그의 업적은 우주처럼 높고, 그의 지위는 모든 고관들보다 높아야 한다.' 레 세 통(Lê Thế Tông, 1578-1599)은 여전히 다음과 같은 충고를 잊지 않았다. '자네의 지위를 조심하고, 항상 궁중의 규칙을 수호하며, 덕을 닦고, 영원히 왕의 은총을 누리게 하라.' 1629년 10월, 레 탄 통(Lê Thần Tông, 1619-1643) 황제는 타인 브엉(Thanh Vương, 淸王)의 원수이자 도지사였던 찐짱(Trịnh Tráng, 1623-1657)에게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왕은 대의에 충실하고, 의로운 사람이어야 하며, 신의 축복을 받고, 덕을 닦고, 백성을 보호해야 한다. 그러면 왕의 위업은 영원할 것이다.' 1657년 8월, 찐딱(Trịnh Tạc, 1657-1682)을 떠이 딘 브엉(Tây Định Vương, 西定王)의 원수 겸 국가원수로 승진시켰을 때, 탄 통 우옌 주이 끼(Thần Tông Uyên Duy Kỳ)는 찐 군주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했다. '바라건대, 큰 은혜를 받고 존경받으며 좋은 평판을 유지하십시오. 십분의 일에 충성하고 효도하며, 바른 길을 지키도록 노력하십시오. 장수와 건강은 다섯 가지 복이며, 왕위는 수억 년 동안 지속됩니다. 왕족이 안정되고 오래도록 번영하도록 돕고, 가문을 매우 훌륭하게 유지하십시오.' 1659년 9월, 찐딱을 서왕국(西王國)의 원수이자 국가 원수, 최고 통치자로 즉위시키면서 레 왕은 다음과 같이 당부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은총을 받고 존경하며 좋은 평판을 유지하여 영원히 국왕을 도우소서. 군주님(Chúa)의 장수하심이 영원토록 있기를.'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여러 시대를 거쳐 중국 봉건 정부는 항상 베트남의 정치 상황을 매우 명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17세기 명나라는 1644년 왕권을 잃고 남하했음에도 불구하고, 1651년 사절을 파견하여 찐짱(Trịnh Tráng, 1623-1657)을 부왕으로 임명하고 조공을 받았다. 찐짱을 '조공을 바칠 기념비를 세우고, 봄부터 가을까지 열심히 일하며, 감히 그 뜻을 거스르지 아니한다'라고 칭찬한 후, 조공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었다. '자네가 이 고귀한 명을 받았으니, 마땅히 충성을 다하여 레 씨(Lê氏)를 돕고, 조공을 숭상하는 일에 힘쓰며, 짐을 위해 남방의 번국(藩國)이 되어 영원히 진수(鎭守)하라. 自爾受茲寵命,宜竭忠弼,以助黎氏,務崇朝貢,為朕南藩,永永鎮之。'


공식 역사를 살펴보면, 레 왕이 찐 군주에게 왕위를 수여한 문서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기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1부: 조상들의 덕행, 특히 레 왕조의 왕권 회복에 기여한 찐끼엠(Trịnh Kiểm)과 찐뚱(Trịnh Tùng)과 같은 초대 군주들의 공로를 칭송한다. 2부: 새 군주의 업적과 타고난 재능을 강조한다. 그리고 3부: 새 군주가 올바른 길을 따르도록 지도하고 설득하며, 왕과 신하가 함께 영원한 행복을 누리도록 권고한다. 이 문서들이 찐 군주와 상의되었거나 찐 군주의 가족들이 직접 작성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지만, 다음과 같은 사실도 알 수 있다.


왕과 신하들 사이에 항상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라는 찐 군주들의 조언은 이 특히 중요한 문서의 세 가지 주요 내용 중 하나였다. 본문의 언어는 상급자가 하급자에게 하는 말투로, 찐 군주에게 신하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도록 상기시키는 동시에 이미 발생했거나 앞으로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음모에 대해 황실에 경고하는 역할을 했다. 주목할 점은 레 쭝 흥(Lê Trung Hưng) 시대 말엽, 레 왕조의 쇠퇴와 찐 군주의 궁궐에 대한 황실의 의존도가 높아졌다는 것이다. '공덕은 하늘처럼 넓고 충성은 태양까지 닿는다'라는 칭송이 이어지는 후반부 문헌의 내용은 찐 왕조의 권력을 더욱 풍부하게 표현했지만, 문학 서적에서는 세 번째 부분의 내용은 여전히 불변의 원칙으로 유지되었다.


찐 군주의 궁궐은 레 왕조의 궁정 권력을 조종하는 세력이었지만, 찐 군주는 황제와의 관계에서 항상 충성스러운 신하의 지위를 유지하려 노력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높은 지위로 승진했지만 '겸손하게' 거절하고 몇 년이 지나서야 '마지못해' 명령을 받아들인 찐 군주들도 있었다. 1657년에서 1687년 사이에는 찐딱(Trịnh Tạc)이 황제의 허락을 받아 기념비에 이름을 쓰지 않고도, 경의를 표할 때 절을 하지 않고도 궁정에 들어갈 수 있었으며, 티트리우(Tứ Triều) 궁전의 왼쪽에 자리를 잡고 경의를 표했다. 그러나 이러한 궁중 의례 외에도 찐 군주는 항상 예의를 지켰으며, 특히 황제를 위한 의례에서 그러했다.


1721년 봄, 찐끄엉(Trịnh Cương, 1709-1729) 군주가 (자신이) 사(紗)와 증(繒) 셔츠를 입도록 허락했을 때, 찐끄엉과 그의 고위 관료인 응우옌 꽁 항(Nguyễn Công Hãng)은 황제께 고관들을 만날 때 노란색 옷을 입어 달라고 청했다. 이에 찐끄엉은 (자신을 포함한) 고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제가 황제를 보필하고 국정을 운영한 이래로 저는 항상 존경심을 품어 왔습니다. 노란색은 황제께서 입으시는 색으로, 의례의 의미에 따라 황제를 기리기 위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국정을 돌보고, 궁중에서 회의를 열고, 관료들과의 정기적인 연회와 만남을 가질 때, 저는 여러분과 구별하기 위해 보라색 옷만 입겠습니다.' 남교 제단에서 거행되는 봄 의식을 위해 찐 군주는 더욱 신중했다. 1724년 초봄, 찐끄엉은 신하들의 조언을 듣지 않고 레 왕의 규칙을 지켰다. 찐끄엉의 행동은 '수도 안팎의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하고 감사하게 만들었으며, 공경하는 마음과 선덕을 지닌 분으로서 찐 군주를 찬양했다.'


사(紗): '사(紗)'는 얇고 가벼운 비단 직물을 뜻합니다. 투명하거나 반투명한 특징을 가지며, 통풍이 잘 되어 주로 여름철 의복이나 겉옷, 안감 등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부드럽고 섬세한 느낌을 줍니다. 오늘날의 '실크 오간자(silk organza)'나 '실크 거즈(silk gauze)'와 비슷한 느낌의 직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증(繒): '증(繒)'은 다양한 종류의 비단 직물을 통칭하는 말입니다. 일반적으로 '견직물(絹織物)'을 의미하며, 사(紗)보다는 두껍고 촘촘할 수 있습니다. 광택이 있고 부드러운 고급 직물로, 예복이나 상류층의 일상복 등에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남교 제단(Nam Giao Altar)**은 베트남의 역사적 제단으로, 특히 응우옌(Nguyễn) 왕조 시대에 황제들이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던 매우 중요한 장소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남교 제단은 현재 베트남 중부의 후에(Huế) 시 남쪽에 위치해 있습니다. 이곳은 응우옌 왕조의 수도였던 후에의 황궁 유적군(Complex of Huế Monuments)의 일부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도 지정되어 있습니다.

남교 제단의 역할과 의미:

하늘과 땅에 제사를 지내는 곳: 남교 제단은 주로 하늘과 땅에 대한 제사, 즉 **교사(郊祀)**를 거행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는 군주가 하늘로부터 통치권을 부여받았음을 천명하고, 국가의 평화와 풍년을 기원하며, 왕조의 정통성과 권위를 확인하는 가장 중요한 의례였습니다.

왕실의 권위 상징: 오직 황제만이 이 의식을 거행할 수 있었기에, 남교 제단에서의 제사는 왕실의 최고 권위를 상징하는 행사였습니다.

위치: 전통적으로 '남교(南郊)'라는 이름처럼 수도의 남쪽에 위치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후에의 남교 제단도 후에 황궁 남쪽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찐 군주가 남교 제단에서 봄 의식을 거행했다는 것은, 그들이 비록 레 왕조의 황제 대신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지만, 하늘에 대한 제사라는 가장 신성하고 중요한 의례를 직접 주관함으로써 자신들의 통치 정통성을 확립하고 백성들에게 통치자로서의 위엄을 보이려 했던 것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1627년부터 1630년까지 당응오아이(Đàng Ngoài)에 살았던 알렉상드르 드 로드(Alexandre de Rhodes) 신부의 설명에 따르면, 그해 초에 황제를 일터로 데려가는 엄숙한 행렬인 벼 모내기 축제에서, 찐 군주는 모든 문무 고관들의 뒤를 따라 겸손하게 '낮은 금빛 전차를 타고' 있었다. 황제가 개경식을 거행한 후, '그는 가장 먼저 앞으로 나와 황제에게 경의를 표하며 땅에 엎드렸다... 이는 매년 초 한 번 황제에게 바치는 가장 큰 존경의 표현이자 가장 엄숙한 인정이었다.' 외교 관계에서 찐 군주는 여러 정치적 이유로 황제의 권력을 남용하지 않고 항상 융통성을 발휘했다. 형식적인 면에서 레 황제는 여전히 다이비엣(Đại Việt) 국가의 최고이자 유일한 합법적 대표였다. 황제는 황실의 수장으로서 외국 사절 접견, 사절 파견, 조공 처리, 외국과의 문서 교환 등 외교 의례를 주관했다. 레 황제는 또한 황실 회의를 주관했으며, 모든 칙령은 황제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명나라와 청나라에 대한 황제의 합법적인 지위는 당응오아이(Đàng Ngoài)의 찐 군주뿐만 아니라 당응쫑(Đàng Trong)의 응우옌 군주까지도 그를 두려워하게 했으며, 이로 인해 그는 정치적 움직임에 매우 신중해졌다.


당응오아이(Đàng Ngoài): '외부 지역' 또는 '북부 지역'을 의미합니다. 지금의 베트남 북부 지역을 포괄하며, 수도 탕롱(Thăng Long, 현재의 하노이)을 중심으로 레(Lê) 왕조의 명목상 통치 아래 찐(Trịnh) 가문이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습니다.

당응쫑(Đàng Trong): '내부 지역' 또는 '남부 지역'을 의미하며, 현재의 베트남 중부 및 남부 지역에 해당합니다. 이곳은 응우옌(Nguyễn) 가문이 통치했습니다.




레-찐 체제는 어떻게 붕괴되었는가?

레-찐 체제의 붕괴는 주로 떠이선(Tây Sơn) 반란이라는 대규모 농민 봉기에 의해 촉발되었습니다.

다음은 그 경과입니다.


내부 불만 고조: 17세기 베트남은 북부의 찐(Trịnh) 군주와 남부의 응우옌(Nguyễn) 군주(푸쑤언(후에) 거점)가 사실상 분할 통치하는 상황이었고, 두 가문 모두 명목상 레 황제에게 충성을 표방하면서도 서로 대립했습니다. 이 시기 사회 계층화가 심화되고 부유한 엘리트와 빈곤한 농민 간의 격차가 확대되면서 전국적으로 두 통치 가문에 대한 불만이 확산되었습니다.


떠이선 반란의 시작 (1771년): 이러한 불만을 배경으로 1771년, 응우옌 냑(Nguyễn Nhạc), 응우옌 르(Nguyễn Lữ), 응우옌 후에(Nguyễn Huệ) 삼형제가 안케(An Khê)와 빈딘(Bình Định) 지역의 농민들을 규합하여 떠이선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응우옌 가문의 몰락 (1777년): 떠이선군은 처음에는 남부의 응우옌 군주에 대항하여 세력을 확장했습니다. 1774년에는 북부의 찐 군대가 응우옌을 공격하면서 응우옌 군주는 양면 전쟁에 직면하게 되었고, 결국 1777년 떠이선군에 의해 응우옌 가문의 대부분의 왕족이 살해당하며 남부의 응우옌 정권은 사실상 멸망했습니다.


찐 가문의 멸망 (1786년): 남부 전선이 안정되자 떠이선군은 북쪽으로 방향을 돌렸습니다. 떠이선군은 "찐을 파괴하고 레를 돕는다(Diệt Trịnh phù Lê)"는 구호를 내세워 북부 주민들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응우옌 후에가 이끄는 떠이선 북벌군은 1786년 찐 가문의 근거지이자 베트남의 수도인 탕롱(Thăng Long, 현 하노이)을 순식간에 점령했습니다. 당시 찐 군주였던 찐똥(Trịnh Tông)은 붙잡혀 자살함으로써 찐 가문의 실질적인 통치는 1786년에 막을 내렸습니다.


레 왕조의 공식적 종식 (1789년): 떠이선 반란은 아이러니하게도 레 왕조에 권력을 회복시키려는 구호를 내세웠지만, 결국 찐과 응우옌 모두를 물리치면서 레 왕조의 권위는 완전히 상실되었습니다. 레 왕조는 1789년에 공식적으로 종식되었습니다.


떠이선 혁명은 1771년에 응우옌냑, 응우옌후에, 응우옌르 세 형제가 주도한 농민 봉기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들은 남부의 응우옌 가문과 북부의 찐 가문을 차례로 무너뜨리고, 명목상의 존재였던 레 왕조까지 멸망시키면서 베트남을 통일했습니다. 특히 응우옌 후에(Nguyễn Huệ)꽝쭝(Quang Trung) 황제로 즉위하여 탁월한 군사적 능력으로 청나라의 침공까지 격퇴하며 강력한 통치력을 보여주었습니다.


하지만 떠이선 왕조의 통일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응우옌 가문의 마지막 후예였던 **응우옌 푹 아인(Nguyễn Phúc Ánh)**은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떠이선 왕조와 오랜 전쟁을 벌였고, 결국 1802년에 떠이선 왕조를 무너뜨리고 베트남을 재통일하여 **응우옌 왕조(Nguyễn Dynasty)**를 세웠습니다. 그가 바로 베트남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의 초대 황제인 자롱(Gia Long) 황제입니다.


이처럼 레-찐 체제는 내부의 사회적 불만과 찐-응우옌 간의 장기적인 대립으로 약화된 상황에서, 떠이선 반란이라는 강력한 외부 세력의 등장으로 인해 최종적으로 붕괴되었습니다. 그리고 떠이선 왕조는 베트남 역사에서 중요한 통일의 순간을 가져왔지만, 그 통일은 일시적이었고 궁극적으로는 응우옌 왕조의 통치로 이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베트남 역사에서 '홍덕(洪德)'은 주로 **연호(年號, Era Name)**를 뜻합니다.

특히, 후 레 왕조(後黎王朝) 시기 레 성종(黎聖宗, Lê Thánh Tông) 황제가 사용했던 연호 중 하나입니다. 레 성종은 1460년부터 1497년까지 재위했으며, 그의 치세는 베트남 후 레 왕조의 가장 강력하고 번성했던 시기로 평가받습니다.

'홍덕' 시기에 다음과 같은 중요한 일들이 있었습니다:

홍덕형률(洪德刑律) 반포: 베트남 역사상 가장 중요한 법전 중 하나로, 유교적 이념과 베트남 고유의 관습법을 결합하여 국가 통치 체제를 확립했습니다.

성리학 보급: 유교를 국가 통치 이념으로 강화하고, 성리학을 적극적으로 보급하여 사회 질서와 교육을 정비했습니다.

영토 확장: 남쪽으로 참파(Champa)를 정벌하고 서쪽으로 라오스까지 영토를 확장하여 메콩강 유역에 이르는 대월(大越)의 최대 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역사서 편찬: 《대월사기전서(大越史記全書)》와 같은 중요한 역사서가 편찬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베트남 역사에서 '홍덕'은 단순히 연호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레 성종의 치세와 그가 이룩한 정치, 법률, 사회, 문화적 업적을 상징하는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트남에서 군주가 '황제(皇帝)'를 칭하기 시작한 것은 10세기 중반,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확립한 이후입니다.

가장 명확하게 기록된 시점은 **968년 딘보린(Đinh Bộ Lĩnh)**이 12군벌을 통일하고 **딘 왕조(Đinh Dynasty)**를 세우면서 **스스로 황제(皇帝)**의 칭호를 사용하고 국호를 **대구월(大瞿越)**로 개칭한 때입니다. 딘보린은 '선황제(先皇帝)'로 불렸습니다.

이후 베트남의 여러 왕조들은 대외적으로는 중국에 대해 '왕'을 칭하며 책봉-조공 관계를 유지했지만, 대내적으로는 독립된 주권을 상징하는 '황제' 칭호와 독자적인 연호(年號)를 사용하는 '외왕내제(外王內帝)'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요약하자면:

최초: 968년 딘 왕조의 딘보린이 스스로 황제를 칭했습니다.

이후: 대부분의 베트남 왕조들은 대내적으로는 황제를 칭하고, 대외적으로는 중국에 대해 왕을 칭하는 '외왕내제' 체제를 유지했습니다.

근대: 19세기 이후에는 대놓고 황제를 칭하기도 했으며, 마지막 왕조인 응우옌 왕조는 1945년까지 황실을 유지했습니다.

따라서 베트남은 10세기 독립 이후부터 독자적인 황제 칭호를 사용하며 중국과는 다른 독자적인 주권 의식을 확립했습니다.



응우옌(Nguyễn) 가문이 '군주(Chúa)' 칭호를 사용하게 된 배경은 찐(Trịnh) 가문과는 다소 복잡한 과정을 거쳤으며, 황제가 직접 하사한 칭호는 아니었습니다.


응우옌 가문이 '군주(Chúa)' 칭호를 사용하게 된 배경

찐-레 왕조의 분열과 응우옌 가문의 남하:

후 레 왕조 중기에 막등용(Mạc Đăng Dung)이 황위를 찬탈하고 막 왕조를 세우자, 레 왕조의 충신인 응우옌 킴(Nguyễn Kim)찐 끼엠(Trịnh Kiểm)이 레 왕조 부흥 운동을 주도했습니다. 응우옌 킴 사후, 그의 사위인 찐 끼엠이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찐 끼엠은 응우옌 킴의 아들 응우옌 우옹(Nguyễn Uông)을 죽이고 권력을 독점하려 했습니다. 이에 응우옌 킴의 또 다른 아들인 **응우옌 호앙(Nguyễn Hoàng)**은 찐 가문의 견제를 피해 1558년 스스로 레 황제에게 요청하여 베트남 남쪽 끝 지역인 순화(順化, Thuận Hóa)와 광남(廣南, Quảng Nam)의 진수(鎭守)를 맡아 남하했습니다. 이것이 후에를 중심으로 한 응우옌 가문 세력의 시작이었습니다.


독자적인 세력 형성:

남하한 응우옌 호앙은 그곳을 거점으로 점차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고, 영토를 확장하며, 독자적인 행정 및 군사 시스템을 정비했습니다. 처음에는 명목상 레 황제와 찐 군주의 지배를 받았으나, 점차 독자적인 '제국'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습니다. 1600년, 응우옌 호앙은 더 이상 찐 정권에 자금과 병력을 보내지 않겠다고 선언하며 실질적인 독립을 천명하고, 수도를 오늘날의 후에(푸쑤언)로 천도했습니다. 이 시기에 그는 '군주(Chúa)'임을 선언했습니다.


'군주' 칭호의 사용: 응우옌 호앙과 그의 후계자들은 '군주(Chúa)' 칭호를 사용하며 남방(당응쫑)을 통치했습니다. 이 칭호는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영토와 백성의 '주인'이자 '통치자'임을 대내외에 선언하는 의미가 강했습니다. 특히, 응우옌 푹 코앗(Nguyễn Phúc Khoát) 군주(무왕 武王) 대에 이르러 1744년 신하들의 건의로 '국왕(國王)' 칭호를 스스로 사용하며 독자성을 더욱 강화하기도 했습니다. (대외적으로는 여전히 중국에 대해 '왕'을 칭했으나, 실제로는 황제급의 대우를 받았습니다.)


황제가 칭호를 하사했는가?

결론적으로, 레 황제가 응우옌 가문의 수장들에게 '군주(Chúa)' 칭호를 직접 하사한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응우옌 가문은 찐 가문의 압력과 자신들의 독자적인 세력 확립 과정에서 사실상 독립적인 통치권을 행사하며 스스로 '군주' 칭호를 사용했습니다. 이는 찐 가문이 레 황제를 명목상으로만 남기고 실권을 장악했듯이, 응우옌 가문도 남부에서 독자적인 권력을 구축하는 과정에서 자신들의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 사용한 것입니다.

오히려 찐 가문은 응우옌 가문을 '반란 세력'으로 규정하고 오랫동안 '찐-응우옌 전쟁'을 벌였지만, 응우옌 가문은 남부에서 굳건히 자신들의 '군주'로서의 통치권을 유지했습니다. 명목상 레 왕조에 대한 충성을 다짐하면서도 실질적으로는 찐 가문과는 대등한 혹은 그 이상의 독립적인 세력이었음을 '군주' 칭호를 통해 과시한 것입니다.

즉, '군주' 칭호는 황제의 하사라기보다는 스스로의 힘으로 획득하고 선언한 실권의 상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