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닥터스-의학의 일대기

셔윈 눌랜드

by 조영필 Zho YP

제1장 의학의 토템: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기원전 460년경~337년)

26/ 성서의 각권과 마찬가지로 히포크라테스의 저서들도 서로 다른 시기에 여러 작가들의 손끝에서 탄생하여 이전에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던 지식과 치료방법에 관한 전통이 영구적인 기록으로 자리 잡은 것으로 추정된다. 비록 우리가 비교하고 있는 성서 문헌만큼은 아니지마 히포크라테스 전집에도 몇 가지 불변의 진리와 놀라운 이야기들이 포함되어 있다. 그 전체를 하나로 연결하는 것은 종교적 믿음이며 히포크라테스 전집을 만든 것도 저자라기보다 종교적 믿음이다... 그러나 그 전집에서 말하는 힘은 신이나 다른 초자연적인 힘들을 제외한 자연이다.


27/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가장 위대한 공헌은 질병의 원인을 밝히고 치료하는 데 있어서 신의 존재나 신비한 힘의 가능성을 무시하라고 가르친 점이다. 스위스의 의사학자인 어윈 아커크네히트Erwin Ackerknecht는 그것을 "의학의 독립 선언"이라고 했다.

전집 어디를 봐도 질병의 원인을 밝히는 데 있어서 의사가 이해할 수 없는 뭔가가 필요하다고 암시하는 곳이 없다. 모든 증상에는 원인이 있으며 치료는 눈에 보이는 증상만이 아니라 증상이 나타난 환경을 개선하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따라서 발병 환경은 병의 증상 자체만큼 중요한 요인으로 간주해야 한다. 우주가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규칙에 의해 움직인다는 것을 처음으로 믿은 사람들은 그리스인들이었다. 그들은 우리에게 원인과 결과의 개념을 제시했으며 그에 따라 과학의 기초를 마련했다. 히포크라테스는 아리스토텔레스 시대 이전부터 그와 같은 개념을 갖고 있었다. 히포크라테스 전집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과학 논문을 포함한 보물창고다.


호메로스 시대 이후 처음에는 아폴론, 아르테미스, 아테나 등 주요 신들에게 치유의 힘이 있다고 여겨지다가 점차 하급신인 아폴론과 요정 코로니스의 아들 아스클레피오스에게로 그 힘이 옮겨갔다. 아스클레피오스 신화는 그리스 문화 자체가 그러하듯이 여러 초기 문명과 전통이 섞이면서 여러 형태로 생겨났다. 전설에 의하면 아스클레피오스는 수많은 신비요법에 정통했으며 주로 믿음이 깊은 환자가 자신의 신전에서 잠을 자는 동안 꿈에서 본 환영을 이용해서 치료했다고 한다.


28/ ... 간절히 염원하는 병자들에게 둘러싸인 사제들은 아스클레피오스와 전설에 나오는 그의 자녀들인 히기에이아, 파나케이아의 힘으로 치유된 놀라운 사례들을 이야기했다. 아스클레피오스는 신성한 뱀이 휘감긴 기다란 지팡이를 지닌 형상으로 표현되었고 이 초자연적인 기원에서 현대 의학계의 상징이 유래되었다.


30/ 히포크라테스는 기원전 460년 소아시아 서쪽 연안 근처에 있는 코스Cos 섬에서 태어났다... 플라톤의 <대화편>에 나오는 프로타고라스Protagoras와 파이드로스Phaedros 단 두 가지다. 후대 저술가들은 히포크라테스가 아스클레피아드 집안에서 태어난 헤라클리데스의 아들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20세기 발견된 고고학적 증거에 의하면 아스클레피오스 신을 섬기는 숭배자들이 코스 섬에 정착한 때는 기원전 350년으로 의학의 아버지는 그때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히포크라테스가 아스클레피오스의 19번째 직계 후손이라는 전설을 반증할 증거는 충분하지만... 히포크라테스에 대한 대부분의 정보는 그가 죽은 지 500년도 더 지난 2세기에 에베소Ephesus의 소라노스Soranos가 쓴 칭찬일색의 전기에서 비롯되었다...


31/ 히포크라테스는 아버지인 헤라클리데스로부터 의학을 배웠다고 전해진다... 라리사Larissa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나이가 거의 백 살이었으니 히포크라테스는 장수했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히포크라테스가 살았던 시기를 제대로 파악하려면 그의 긴 생애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생애와 겹친다는 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태어나기 10여 년 전 아리스토텔레스가 청년이었을 때 사망했다는 점을 기억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페리클레스와 에우리피데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 아리스토파네스는 그와 동시대 사람들이었다. 그때는 분명 그리스에서 지적 활동이 가장 활발한 시기로 히포크라테스와 헤로도토스, 아리스토텔레스가 각각 의학과 역사학, 문학비평에 한창 생기를 불어넣으며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의 지성을 찬양한 위대한 아버지들의 시대였다. 이따금 급속도로 새로운 사고·행동 양식과 새로운 표현 방법을 발전시킨 서구 문명의 문화에서 나타나곤 하는 정신적 에너지가 만개한 시기이기도 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의학은 히포크라테스 학파와 함께 발달하기 시작했다. 미신, 강령술과 작별을 고하고 탈이 난 신체의 기능을 체계적으로 관찰하며 환자들에 대한 의사들의 기본적인 의무라고 선언한 윤리적 신념을 따르는 히포크라테스 의학은 훗날 의학 사상의 발전에 영향을 미친 기본 틀을 형성했다.


코스 섬 맞은편에 있는 크니도스Knidos 반도에... 히포크라테스 학파가 무게 중심을 환자에게 둔 반면, 크니도스 학파는 질병에 초점을 맞추었다. 오늘날의 의사들처럼 크니도스 학파의 의사들도 생명현상은 물리적·화학적으로 모두 설명된다고 주장하는 환원주의자들이었다... 그렇댜면 어째서 히포크라테스의 학설이 지금까지 살아남아 현대 의학의 기초가 된 것일까?


33/ 고대 그리스에서 크니도스 학파의 접근방법은 근본적으로 약점이 있었다. 크니도스 학파가 성공하려면 그 당시로서는 불가능한 정도의 해부학과 장기의 기능에 관한 정확한 지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는 인체 해부가 허용되지 않았고 보편화된 종교견해에 따라 사망 후에는 즉시 매장해야 하는 시대였다...

... 크니도스 학파는 시대를 앞섰다. 그들의 사상은 르네상스 후기에 이르러서야 빛을 보게 되었다.


35/ ... 코스파와 크니도스파 사이의 경쟁에서 주도권이 바뀐 것은 200년 전 과학계가 장기 병리학에 관대한 입장을 취할 준비가 되었을 때다. 주도권이 바뀌자 현미경이 임상의의 날카로운 눈을 대신하고 분자가 환자를 대신했다...


39/ 체액은 불, 공기, 흙, 물 이렇게 네 가지 원소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기 때문에 뜨겁고, 건조하고, 차갑고, 습한 네 가지 성질과도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다. 따라서 혈액은 뜨겁고 습한 특성, 황담즙은 따뜻하고 건조한 특성, 흑담즙은 차갑고 건조한 특성, 점액은 차갑고 습한 특성을 상징했다...


49/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치료법 가운데 일부는 의학의 기본지식이 되어 거의 2500년 동안 굳건히 그 자리를 지켰다. 치료법에는 하제, 토제, 목욕, 습포제, 사혈, 와인, 독하지 않은 술, 평온한 분위기가 포함되었다...


50/ ... 히포크라테스 학파 의사들은 외상을 수없이 많이 치료했다. 그들은 골절일 때 뼈를 맞추고 부목을 대는 원리를 이해했고 복합골절일 경우 툭 튀어나온 뼈끝을 잘라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피를 뽑고 가슴에서 고름을 빼냈으며 복부에서 체액을 제거하는 일에 능숙했다. 간과 신장에 있는 종기는 짜냈다. 치질, 치루처럼 직장에 생긴 병은 치료율이 높았다...


히포크라테스 학파는 특히 머리에 생긴 상처를 치료하는 데 두각을 나타냈다...


제2장 페르가몬의 역설: 갈레노스(Galenos: 130년~200년)

73/ 갈레노스의 해부학과 생리학 연구는 인체와 병에 걸리는 이유를 새롭게 이해할 수 있는 길을 제시했다. 어쩌면 의학의 아버지라 불려야 할 사람은 히포크라테스가 아니라 갈레노스일지도 모른다.


74/ 소아시아 북서쪽 가장 구석, 에게 해에서 24킬로미터 떨어진 내륙에 카이쿠스Caicus 강의 초록빛 계곡과 접해 있는 그리스 문화와 로마법을 따르는 작지만 번화한 도시 페르가몬이 있었다. 페르가몬 도서관이 알렉산드리아 도서관과 경쟁을 하던 초기에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한 사람은 파피루스 수출을 금지함으로써 페르가몬 도서관이 성장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다. 파피루스를 빼앗긴 페르가몬의 학자들은 그 대신 페르가몬의 종이Charta pergamena라고 알려진 동물 가죽을 이용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양피지parchment라는 단어는 여기에서 파생된 것이다. 양피지는 두루마리로 만들기에는 파피루스보다 불편했지만 코덱스(codex, 옛날 서양에서 책을 만들던 방식의 하나로 나무나 얇은 금속판을 끈이나 금속으로 묶어서 제본하였다)나 책으로 만들기에는 더 적합했다. 지금은 터키의 베르가마Bergama에 흔적이 남아있는, 양피지와 책이 탄생한 페르가몬에서 기원후 130년에 갈레노스가 태어났다.


75/ 갈레노스가 교양있고 크게 성공한 건축가이자 지주인 니콘Nikon의 아들로 태어난 기원후 130년 9월 22일은 그런 식으로 그리스 분위기가 만연해 있던 시대였다. 소년의 이름은 침착하고 차분하다는 의미인 그리스어인 갈레노스galenos에서 유래된 것으로, 갈레노스에 따르면, 어머니가 아니라 아버지의 특성을 매우 훌륭하게 묘사한 단어라고 한다...


갈레노스가 14살이 되기 전까지 그에게 문학과 문법, 산수, 기하, 철학 기초를 가르친 니콘은 벌이가 좋은 대형 가족 농장 운영에 필요한 기술도 가르쳤다. 니콘은 갈레노스가 15살 때부터 18살 때까지 그 당시 모든 주요 학파의 철학을 공부시키기 위해 아들을 떠나 보냈다... 니콘은 그들 중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독립을 유지하는 일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려고 했다... 갈레노스는 평생 동안 자신의 길을 가고 자신만의 방식을 발전시키는 쪽을 선택했고, 한 가지 학파의 철학이나 의학과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으려 했다.


76/ ... 로마 제국에서 관직을 얻게 하려고 아들에게 양질의 교육을 시킨 니콘은 아들을 의학계로 인도하라고 말하는 아스클레피오스에게서 영감을 받은 꿈을 꾸었다... 그가 27살이었을 때 손에 있는 동맥을 열어 복부 종양을 치료하라는 꿈을 꾸었다. 38살 때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Marcus Aurelius 황제와 함께 전쟁터에 가지 말라는 꿈을 꾸었다. 43살 때 꾼 꿈에서는 눈의 구조와 기능에 관한 미완성 논문들을 끝내라고 했다. 의사로 일하는 동안 그는 가끔씩 꿈에서 알려 준 치료법을 이용했다.


77/ 갈레노스는 17살 때 의학 훈련을 시작했다. 그는 페르가몬에서 공부한지 4년 후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집을 나왔다... 스미르나Smyrna와 코린토스Corinth에서 강의나 공개 시연에 참석했다. 152년 대도시 알렉산드리아에 도착한 갈레노스는 그곳에서 특히 중요한 5년을 보냈다.


... 헤로필로스와 에라시스트라토스는 실제로 기원전 3세기에 시신(아마 살아있는 사형수들도)을 해부할 수 있었다... 시신 해부가 자유롭게 허락되었던 기간은 너무나 짧았다. 로마법은 마침내 성급하게 그 기간의 막을 내렸고 몇몇 진지한 해부학자들은 다시 태생적으로 한계가 있는 동물 연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알렉산드리아에서는 초기의 연구결과를 접하는 것이 가능했기 때문에 갈레노스는 틀림없이 인체 구조에 대해 많은 것을 배웠을 것이다. 또한 그는 1세기에 로마인 마리노스가 쓴 20권짜리 저서,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최초의 본격적인 해부학 교재를 읽을 수 있었다...


79/ 158년 페르가몬으로 돌아왔을 때 갈레노스는 이러한 이론 체계에 정통한 의사인 동시에 이미 해부학과 생리학에 관해 쓴 논문 시리즈로 유명한 의사였다. 또한 히포크라테스처럼 외과수술을 할 수 있었다.


그는 12년 동안 훈련을 받으면서 골절과 탈구 치료법과 두개골에 구멍을 내는 수술인 천공술로 머리의 상처를 처치하는 방법을 배웠다. 찢어진 상처는 꿰매거나 끈으로 고정시키고 파열된 혈관은 봉합사로 동여맸으며 피부의 악성종양과 포낭, 용종은 칼이나 달군 철로 제거했다. 흉곽과 복부에 찬 체액을 제거했고 다양한 종류의 헤르니아(hernia 탈장)를 절개한 다음 꿰맸다. 히포크라테스 선서와 희생자들의 비명소리에도 불구하고 신장 결석 수술도 일상적으로 행했다.


갈레노스의 의술과 지역 아스클레피오스 숭배자들과의 돈독한 관계가 그에게 도움이 되었다. 의사를 선택해서 콜로세움 검투사를 돌보게 할 권한이 있던 고위직 사제가 그 자리를 갈레노스에게 준 것이다...


162년 무렵... 그는 페르가몬과 이웃 국가인 갈라티아Galatia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을 때 로마로 이사했다. 32살에 제국의 중심지에서 의사로서의 경력이 시작되었다.


80/ 그 당시 로마는 인구 백만 명의 번영한 대도시로 여러 학파의 의사들 2,000명 정도가 의학적 수요를 충족시키고 있었다. 다섯 개 주요 학파인 교조학파, 방법학파, 경험주의 학파, 생기론 학파, 절충학파... 또한 출산을 도울 뿐만 아니라 여성들에게 의사 역할도 하는 산파가 대략 150명 있었다. 이들 외에도 그 도시에는 신앙 요법가들 100여 명이 살고 있었으며, 주인 가족의 가벼운 병을 치료하는 노예 의사들이 최소한 100명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흥미롭게도 이들 대부분은 132년 바르 코흐바Bar Kochba가 이끈 고대 유대의 반란이 실패한 후에 사로잡힌 유대인들이었다.


81/ ... 갈레노스가 출발할 무렵 로마에는 역병이 이미 한창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가지는 분명하다. 역병이 유행할 때 직무를 유기한 의사는 존경받지 못한 다는 것이다.


갈레노스의 귀환은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가 몸소 초청하여 이루어졌다. 북쪽에서 로마를 위협한 마르코만니Marcomanni 족에 대한 전투가 준비 중이었고 황제는 명성이 자자한 의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 문제에 있어 사실 선택의 여지가 없던 갈레노스는 168년에서 169년에 걸친 겨울 동안 아킬레이아Aquileia에 있는 원정대를 만나기 위해 여행을 했다... 그는 젊은 황태자 코모두스Commodus를 돌보기로 하고 뒤에 남을 수 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황실 의사가 죽자 그 명예로운 자리에 임명되었다.


황제의 보호 아래 갈레노스는 더 이상 라이벌들의 피의 복수를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고 169년부터 180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연구 중 가장 중요한 몇 가지를 완성했다. 그는 과학 연구에 종사할 자유가 있었고 원고를 준비하는 데 많은 도움을 받았다...


83/ 책을 구입하는 데 꽤 많은 돈을 썼다는 사실처럼 수입의 상당 부분을 저서를 발표하기 위해 고용한 필경사들의 보수로 쓴 사실 또한 분명하다...


85/ 갈레노스가 발전시킨 학설은 해부와 생리학 실험, 환자에 대한 임상 관찰을 근거로 한 것이었다...


87/ 갈레노스의 작업에는 또 다른 중대한 약점이 있었는데... 그의 해부학은 동물의 해부학이라는 점이었다...


88/ 얄궃게도 1543년에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Andreas Vesalius가, 1628년에 윌리엄 하비William Harvey가 갈레노스의 잘못을 밝혀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들이 갈레노스의 책이 아닌 자신들의 눈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94/ ... 갈레노스의 명성에 있어서는 유감스러운 일이지만 인체에는 프네우마, 체액, 내재적 열은 물론 레테 미라빌레도 없다...


78/ 그리스인들은 세상에는 정의되지 않고 설명되지 않는 실체가 없는 생기가 있다고 믿었으며 이를 프네우마pneuma라 불렀다. 이 이론에 따르면 우리는 세상의 프네우마로 둘러싸여 있으며 프네우마가 호흡을 통해 폐로 들어가서 폐에서 심장 좌측으로 그다음에는 동맥으로 이동했다. 동맥의 맥박은 동맥의 규칙적인 확장으로 발생했다. 프네우마로 가득 찬 동맥에는 혈액이 없다고 생각했다. 인간의 육체는 이렇게 생명을 유지했다. 반면, 혈액은 정맥으로만 운반되어 신체 모든 부분에 좀 더 물질적인 종류의 영양분을 공급한다고 생각했다. 그리스 사람들은 인체의 필수 요소인 네 가지 체액은 소화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며, 내재적인 열은 심장에서 생성되고 프네우마는 외부에서 전해진다고 믿었다.

94/ ... 동물 두개골 밑부분에서 레테 미라빌레rete mirabile라고 불리는 꼬인 혈관 그물을 발견했기 때문에 뇌 표면에 있는 주름을 통과하면서 지체된 프네우마가 생명 프네우마에서 뇌의 산물인 정신적 프네우마로 전환되기 시작한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95/ 갈레노스는 질병들을 체액의 질병, 조직의 질병, 장기의 질병, 이렇게 세 가지 범주로 분류했는데, 그의 치료법도 당연히 히포크라테스의 방법과 비슷했다...


97/ 1860년 올리버 웬델 홈즈Oliver Wendell Holmes가 매사추세츠 의사협회에 "저는 현재 사용되는 모든 의약품을 바다에 가라앉게 할 수 있다면 인류에게는 다행스러운 일이 될 것이며, 모든 물고기들에게는 불행한 일이 될 거라 확신합니다."라고 말한 데에는 다 이유가 있다.

갈레노스는 히포크라테스의 원칙 중에서 예후의 중요성을 가장 높이 평가했다... 176년 그가 과잉 섭취라고 정확하게 진단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병을 치료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예후가 가장 중요한 요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100/ 우리는 갈레노스가 죽은 후의 150년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다. 단지 4세기 중반 무렵에 그가 의학계의 최고 권위자로 명성을 굳히게 되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을 뿐이다. 그 이후부터 그는 모든 사람들의 인용 출처가 되었다...


101/ ... 다행히 7세기 이슬람 국가의 탄생이 학문에 대한 문화적 갈망을 만들어 냈고, 머지않아 그리스의 과학연구 논문들이 아랍어로 번역되었다...


102/ ... 가장 위대한 의사는 이븐 시나Ibn Sina였다. 11세기에 쓴 그의 대표작 <의학정전Cannon>은 필딩 개리슨의 말을 빌리자면, "중세 시대 권위의 근원"이 되었다...


11세기, 12세기에 마침내 라틴어 저서들로 옮겨진 것은 이 아랍어로 된 자료들이었다. 처음 시작된 곳은 11세기 몬테카시노Monte Cassino의 베네딕트 수도원이었다. 콘스탄틴으로 알려진 카르타고 태생의 어느 수도사가 방대한 아랍 의학 서적들을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리스 학문의 진정한 부활은 1453년 오스만 투르크가 비잔티움을 정복한 후에 그리스 학자들이 이탈리아로 이주하면서 당대의 서적들과 선조들이 남긴 원고들을 가지고 갔을 때야 이루어졌다... 그때서야 비로소 갈레노스가 1300년 전에 중단했던 지점에서 진짜 의학이 다시 시작되었다...


제3장 새로운 각성: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와 의학의 부활(Andreas Vesalius: 1514-1564)

110/ ... 하나는 천문학에서 다른 하나는 의학에서였다... 두 사람 모두 파도바Padova 대학 같은 학교에서 의사로 양성되었다는 점이다... 70세의 니콜라우스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는 아마 1543년 죽음이 임박했을 때... 자신의 저서 <천구의 회전 운동에 관하여De Revoutionlibus Orbium Coelestium>의 초판을 받았을 것이다... 28세의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 <인체 구조에 관하여De Humani Corporis Fabrica>는 최초로 정확한 인체 해부 지식과 그것을 연구하는 데 이용한 방법을 세상에 소개해서 오늘날의 과학적 의학의 길을 닦았다.


114/ ... 기원전 3세기에 설립된 명성이 자자한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museion은 연구와 교육을 위한 지식인 집단의 중심으로 아카데미아와 비슷했지만 훨씬 더 규모가 컸다... 그리고 랍비 아카데미아에서 탈무드 교육기관인 예시바Yeshivoth와 신학교가 탄생했다...


어쨌든 9세기에 본래 의학 연구를 위해 살레르노Salerno에 설립된 학교를 보통 최초의 유럽대학으로 간주한다... 사실 유서 깊은 갈레노스 의학의 보호자들 대다수가 아랍어를 하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대학 당국은 그 문제에 있어서 선택의 여지가 거의 없었다.


11-12세기 아랍 문헌들이 라틴어로 번역되기 시작했을 때 유럽이 그리스 학문을 재발견하고 학자들이 여러 도시에 모이면서 르네상스 시대의 위대한 대학들이 하나둘씩 등장했다...


115/ ... 그러나 이탈리아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르네상스 과학은 이탈리아에서 활성화되고 번영하기 시작했다...


116/ ... 1405년 볼로냐의 의학교가 해부학 실습을 위해 인체 해부를 교육 과정에 포함시키고, 1429년 파도바 대학이 그 뒤를 따랐을 때 주교는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사실 1345년 무렵 귀도 드 비게바노Guido de Vigevano라는 의사가 프랑스에서 해부 과정을 보여주는 교재를 출판했었다. 그리고 1482년에는 볼로냐와 파도바 두 대학의 학생이었던 교황 식스투스Sixtus 4세가 지역 성직자의 승인이 있으면 인체 해부를 허용한다는 교서로 튀빙겐Tuebingen 대학을 후원했다.


식스투스가 교서를 내린 지 거의 10년이 지났을 때 피렌체의 산 스피리토San Spirito 성당의 수도원장이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라는 젊은 화가에게 해부를 허락했다.


118/ ... 1491년 베네치아에서 출판된 요하네스 드 케탐Johannes de Ketham의 <해부Fasciculus Medicinae>에서 교수법이 묘사된 삽화를 볼 수 있다. 교수는 높은 의자에 앉아 해부용 시체를 절개하는 이발사 외과의사를 무시하며 라틴어로 쓰인 갈레노스의 저서를 단조롭게 낭독하고 있고, 학생들보다 교육수준이 조금 높은 조교가 거의 관심이 없는 학생들에게 인체 각 부위들을 가리키고 있다. 절개 혹은 해부는 갈레노스의 의견이 진리임을 입증하기 위해 매년 한두 차례 시행되었다... 실제로 해부학 지식이 필요한 사람들은 예술가들뿐이었다...


122/ 1514년 12월 31일에 태어난 베살리우스는 저명한 의사 집안의 5대손으로 조상들은 모두 왕족을 위해 일하는 학자나 의사들이었다. 안드레아스라는 이름은 합스부르크Hapsburg 가의 약제사로 처음에는 오스트리아의 마르가리타Margaret를, 그 다음에는 그녀의 조카인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를 담당했던 아버지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베살리우스 가족은 브뤼셀에 거주했지만 조상 대대로 살던 마을은 독일 클레베스의 베젤Wesel로 그곳에서 베살리우스라는 이름이 유래되었다.


123/ 일반적인 형식의 입문 교육을 마친 15살의 안드레아스는 브뤼셀을 떠나 루뱅Louvain 대학에서 공부했다... 루뱅에는 우수한 의과대학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1533년 8월, 파리로 떠났다.


이탈리아의 대학과 달리, 파리에 있는 대학들은 가장 보수적인 의학적 원칙과 수업의 본거지였다...


127/ ...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제국 내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야 했다... 1536년 루뱅 의과대학에 이른바 학점 편입을 해서 1537년 봄에 의학학사 학위를 받았다..


128/ ... 그의 학사 논문이 이슬람 의사 알라지가 쓴 책을 부연한 것이라는 사실이 그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학위조건을 모두 만족시킨 후... 바젤Basel로 갔고...


129/ <알라지 주해> 2판이 인쇄된 것을 본 후 베네치아로 간 새내기 의학 학사는 그곳에서 자신이 계획한 해부 목판화를 위해 그림 그리는 일을 도울 만한 예술가를 찾기 시작했다. 베살리우스는 곧 - 아마 티치아노가 소개했을 것이다 - 벨기에 사람 얀 슈테판 반 칼카르Jan Stephan van Calcar를 알게 되었다. 그동안 베살리우스는 파도바에서 박사학위를 따기 위해 임상의학을 공부하고 있었다... 1537년 12월... 좋은 성작으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했을 뿐만 아니라 다음날 그를 외과와 해부학 교수로 임명했다...


... 12월 6일 교수직에 임명된 그날, 시신해부를 시작한 그는 해부하는 동안 외과의사, 조교, 강사 세 가지 역할을 다했다...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졌다...


130/ ... 1538년 4월 <여섯 개의 해부도Tabulae Anatomicae Sex>라는 제목으로 인쇄된 이들 도표 6개는 <파브리카>의 전조가 된 최초의 출판물이었다.


131/ ... 1540년 1월 볼로냐 학생들의 초청으로 볼로냐를 방문한 베살리우스는 연달아 해부학 시연을 펼쳤다...


안드레아스 베살리우스가 의학에 기여한 순간은 짧았던 볼로냐 체류 기간 동안 찾아왔다. 볼로냐에서는 독실한 갈레노스 신봉자인 마테오 코르티Matteo Corti와 함께 해부학 시연을 보여달라고 부탁했다. 해부에 대한 두 사람의 태도는 두 사람 사이의 철학적 차이, 아니 사실은 중세 시대와 르네상스 시대의 철학적 차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였다... 초대 손님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인체에 관한 책'이라고 부르는 교재만이 진정한 교재라는 점을 분명히 밝혔다...


134/ 성직자의 승인을 받은 볼로냐에서의 시연은 성 프란체스코 성당에서 이루어졌다... 200개의 좌석 어디에서도 시야를 가리는 곳은 없었을 것이다. 베살리우스의 해부는 1월 15일 아침, 코르티의 강연 5개가 끝난 뒤에 시작되었다. 코르티는 강연에서 중세 시대 교재를 사용하였고 필요할 경우 갈레노스의 말을 인용하여 교재의 내용을 수정했다...


베살리우스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베살리우스는 난생처음 그 그리스인이 인체를 해부해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베살리우스는 망설이지 않았다. 얼버무리지 않고 대담하게 그는 교재와 의견이 다를 때마다 자신이 옳고 갈레노스가 틀렸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135/ ... 시체 수백 구를 해부했다고 주장하는 - 그러나 그가 1521년에 출판한 책은 세밀하지 않게 대강의 윤곽만을 그린 삽화였다 - 볼로냐 대학의 해부학 교수 기아코모 베랭가리오다 카르피Giacomo Berengario da Carpi를 제외하고 어느 누구도 인체 해부를 기초로 책을 쓴 적이 없었던 것이다...


136/ ... 파도바 당국은 베살리우스가 다음 연구 주제를 준비할 때까지 사형 집행을 얼마간 연기하기까지 했다...


142/ 1542년 8월 출판작업이 모두 끝났다. 바젤의 우수한 인쇄소들을 경험했던 베살리우스는 바젤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파브리카> 작업은 1543년 6월에 완성되었다. 8월에 판매가 가능해졌을 때 대형 목판화 11점과 300점에 달하는 삽화들을 포함해서 2절지로 663페이지였던 <파브리카>는 즉시 서적 제작 기술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인정받았다...


147/ ... 베살리우스가 <알라지 주해> 앞머리에 이책을 바친다고 썼던 니콜라우스 플로레나스Nicolaus Florenas는 그 젊은 학생의 친구이자 후원자였지만 황제의 주치의이기도 했다... <여섯 개의 해부도>는 황제의 수석 주치의인 나르키수스 파르테노펜스Narcissus Parthenopens에게, <파브리카>는 카를 황제에게, <개요>는 황태자인 펠리페에게 헌정되었다...


150/ ... 1556년 카를 황제가 퇴위한 후에... 베살리우스는 이제는 에스파냐의 왕이 된 펠리페 2세의 궁정에 있는 네덜란드 사람들의 의사로 고용되었다.


그러나 에스파냐의 분위기는 카를의 궁정보다 한층 더 숨이 막혔다. 그때 1562년 파도바의 해부학 교수 가브리엘 팔로피오Gabriele Fallopio가 사망하자 베살리우스는 이탈리아로 돌아갈 수 있도록 에스파냐를 떠나게 해 달라고 펠리페에게 청원했다. 펠리페는 거절했다...


제4장 온화한 외과의사: 앙브로아즈 파레(Ambroise Pare: 1510년~1590년)

159/ 앙브로아즈 파레 역시 파리에서 이발사 외과의사로서 도제살이를 하는 동안... 파레는 26살때 파리의 유명병원 오텔 디유Hotel Dieu에서 외과 수련 4년과정을 마쳤다...


... 젊은 파레는 1537년 토리노 포위 공격 현장에 있게 되었다... 파레는 전쟁터 임상 시험을 고안했다. 상처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진 뜨거운 기름을 사용하는 대신, 순한 진정 연고를 만들자는 묘안이 떠오른 것이다... 결국 기름이 떨어져서 어쩔 수 없이 계란 노른자, 장미 기름, 테레빈 기름으로 만든 연고를 사용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총상으로 인한 상처 치료법을 이렇게 배웠다. 책에서 배운 것이 아니다.


162/ ... 외과 수술의 변화에 있어 그러한 분수령을 만든 사람으로는 파레 이전에는 히포크라테스, 파레 이후에는 존 헌터John Hunter가 유일했다...


166/ 이발사들에 대해 덧붙이자면, 수세기 동안 유럽 곳곳에서 사소한 상처와 찰과상을 돌본 것은 이발사들의 손이었다...


167/ ... 마침내 16세기초 의학부가 최종결정을 내렸다. 첫째 공식적으로 이발사들의 지위를 합법으로 인정해서 그들은 그 이후로 이발사 외과의사로 알려졌다... 그것이 앙브로아즈 파레가 1536년 외과의사로서 첫발을 내딛었을 때의 상황이었다.


파레는 고급 가구 제작자의 아들로 1510년, 북쪽으로는 노르망디Normandy와 서쪽으로는 브르타뉴Brittany와 접해 있는 라발Laval - 그 당시는 메인Maine 주의 시골이었다 - 에서 태어났다. 파레 가족이 위그노 교도였다고 믿을 만한 이유는 충분하다... 그의 첫번째 스승은 예배당 목사였는데, 파레는 그와 함께 살았다. 나중에는 이발사 외과의사의 도제가 되어 단기간 내에 오텔디유 병원에서 외과 견습 자리를 얻었다. 그로부터 4년후 참가한 전쟁에서 육군 원수와 함께 토리노에 갔고 그곳에서 앞에서 이야기한 끓는 기름에 관한 결정적인 사건이 일어났다.


... 1541년 파리에서 시행한 자격시험을 치를 수 있었다. 같은 해 결혼해서 세느 강변 왼쪽 퐁 생 미셸Pont St. Michel 끝자락에 자리 잡은 그는 진료소를 차리고 전문이발사 외과의사로 개업했다...


1542년 파리는 군대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브르타뉴의 공작 드 로앙de Rohan의 외과의사로서였다. 파레가 자주 이야기하는 또 다른 뜻밖의 사건이 일어난 것은 페르피냥Perpignan 전투에서였다. 브리삭Brissac 육군 원수는 오른쪽 견갑골 근처에 총상을 입었는데, 육군에서 가장 권위있는 외과의사 서너 명이 찾아도 총알을 발견할 수 없었다. 파레는 육군 원수에게 총에 맞았을 때 자세를 취해 보라고 한 다음 총알을 찾아 제거했다...


제5장 자연, 인간의 조언자: 윌리엄 하비의 혈액순환 발견(William Harvey: 1578~1657년)

191/ 윌리엄 하비는 고전학을 공부하는 학생이었다...


194/ ... 1578년 4월 1일 영국 켄트 해안에 있는 포크스턴Folkestone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토머스 하비는 자수성가한 사업가이자 국제 무역가였다... 그는 토머스의 아들들 중에서 유일하게 상업의 세계에 흥미가 없었다... 그들은 재능있는 큰 형이 의학에 대한 관심사를 추구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195/ 켄터베리에 있는 킹스 스쿨King's School로 보내진 윌리엄은 10살 때 정규교육을 시작했다... 그는 16살 때 케임브리지 대학의 곤빌 앤드 키스 발리지Gonville and Caius College에 입학했다... 하비가 학생이었을 때는 해부학 수업을 위해 매년 처형된 죄인의 시신 두 구를 해부했기 때문에 1597년 학사 학위를 받을 즈음에 그는 관찰한 인체 구조를 해석하는 일에 어려움이 뒤따른다는 사실을 충분히 인지했다.


신참 의사가 바로 파도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196/ ... 하비가 가장 흠모했던 스승은 파리키우스로 병아리 태아와 태아 형성에 대한 파브리키우스의 연구가 훗날 하비의 연구방향을 결정짓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197/ ... 윌리엄 하비가 파도바에서 받은 1602년 4월 28일자 박사 학위증서...


하비는 반지와 모자, 미나도우스가 남긴 키스의 여운과 함께 영국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같은 해인 1604년... 결혼했다...


201/ ... 실제로 베이컨의 방법을 적용한 최초의 의사는 하비다...


202/ ... 1628년 하비가 마침내 혈액 순환에 관한 대작을 발표하기 오래전부터 그 위대한 주제를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207/ 오늘날의 엄격한 기준으로 보면 하비의 '정량적 증거'는 조잡하다... 그는 인간의 심실이 수용할 수 있는 액체의 양이 무게로 대략 57~85그램이라고 추정했다. 평균적인 심장박동이 분당 72번이라고 한다면, 한 시간동안 심장은 57X72X60, 즉 246킬로그램의 혈액을 대동맥으로 내보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보통 사람 몸무게의 3배 이상이었고, 섭취한 음식이 간에서 끊임없이 혈액을 만들어 조직으로 보낸다는 갈레노스의 학설이 틀렸음을 확실히 증명했다...


제6장 ... 지오반니 모르가니...

제7장 ... 존 헌터

제8장 ... 르네 라에네크

제9장 ... 이그나츠 젬멜바이스...

제10장 ... 전신 마취의 탄생

제11장 ... 루돌프 피르호

제12장 ... 조셉 리스터...

제13장 ... 윌리엄 스튜어트 홀스테드

제14장 ... 헬렌 타우시그

제15장 ... 심장이식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