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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언어의 끝 04화

4. 숨겨진 그림자

소설 <언어의 끝>

by 지안

“그들은 우리의 말을 지운다. 그것은 곧,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세계를 지우는 것이다.”


지현이 복사본의 일부분을 가리키며 말했다.


“이게 그런 뜻입니까?”


경혁의 물음에 지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들이 누구인가 했더니 일본을 말하는 거였군요. 언어를 빼앗기면 이렇게 간절해지는 모양이네요. 엄마도 어쨌든 독일에서 한국말을 뺏긴 기분이었을 테니까요.”


“지현 씨도 언어학을 전공했다고 들었습니다. 번역하신 하버마스 책은 읽었습니다.”


“번역은.”


지현은 말을 끊고 한숨을 쉬었다. 엄마가 어떤 생각으로 번역을 하고 있는지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엄마는 왜 그렇게 절실하게 번역에 매달렸던 걸까.


“제게 습관 같은 거였여요. 엄마가 하는 걸 계속 지켜봤기 때문이기도 하고, 독일어로 떠오르는 생각을 엄마에게 한국어로 옮겨서 말한 달까, 그런 기분을 내내 가지고 살았으니까요. 엄마에게 언어는 현실이 아닌 다른 종류의 세계 같은 것이었어요. 어떤 의미에서는 초월한 것 같은 느낌도 있었죠. 하지만 저에게 언어는 그냥 말이에요. 매일 말을 다루고 언어를 만지죠. 광고문구를 만들고 카피를 써요. 누군가의 욕망을 은밀하게 자극해 돈을 쓰게 만드는 것이 제 직업이니까요. 엄마의 언어가 절실하고 신성한 것이었다면, 제 언어는 낡고 비루하고 처치곤란이에요. 아무튼 제 얘기는 재미없으니 그만하고, 원본 얘기로 돌아가죠.”


경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 복사본으로 눈길을 돌렸다. 지현이 말했다.


“독일은 문화재 보호가 엄격해요. 이게 대학소유인지 누군가 맡긴 것인지 그것부터 알아봐야 해요. 복사는 깐깐한 사서를 설득하는 것으로 충분했지만 원본을 가져오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예요. 아마 대학평의회나 주문화청 승인이 필요할 수도 있어요. 일단 전부 복사하는 것부터 대학 평의회 승인을 받아오라고 해서 포기했어요. 시간이 너무 촉박했거든요. 원본이 남아 있다고는 하나 엄청나게 낡은 상태예요. 이 부분 뒤쪽으로는 훼손이 걱정된다며 담당자가 더 이상 진행해주지 않았어요.”


“어쩐지 제게 도움을 주실 생각이 전혀 없으신 것 같네요.”


경혁이 애써 웃으며 물었다. 지현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좀 더 여유가 있었다면 가능했겠지만 지금은 제 일로도 벅차요. 갑자기 생긴 할아버지가 유산을 준 덕분에 상황이 복잡해졌거든요.”


“할아버지가 계신 것은 몰랐습니까? 혹시 성함이?”


“윤 세자 원자를 쓰세요. 저에게 유산을 상속하시긴 했는데 조건이 할아버지 집에서 1년 이상 사는 거예요. 물론 1년 산 후에도 집을 팔 수는 없고 제가 계속 살던지, 기증하던지 둘 중 하나만 할 수 있지만요.”


“윤세원? 얼마 전 사망한 전직 문화부 장관이요?”


불현듯 움직이기 시작한 자동차 지붕 위에 누워 있던 고양이처럼 경혁의 목소리에는 갑작스러운 긴장 같은 것이 섞여 들었다.


“아버님 성함이?”


“윤 도자 현자를 쓰세요.”


제대로 놀란 표정이 된 경혁이 테이블 앞으로 몸을 내밀었다. 지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길게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정해원 선생님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이유를 이제 알겠네요.”


경혁이 급하게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잔에는 얼음조차 남지 않았다. 지현이 웃으며 물었다.


“그래요? 엄마가 왜 그랬을까요? 전 늘 그게 궁금했거든요.”


입안에서 얼음이 아득아득 소리를 내며 씹히는 사이에도 경혁의 시선은 지현의 얼굴에 내내 머물러 있었다. 한동안 침묵하던 경혁이 마침내 자세를 고쳐 잡으며 말했다. 좀 전보다 빨라진 말투로 중얼거렸다.


“전 역사를 전공했습니다. 석사는 1930년대 한국 독립군을 중심으로 한 무쟁투쟁으로 받았어요. 하지만 현대사도 나름 관심을 갖고 공부했죠. 지금 제 머릿속에 떠오르는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도 될지 확신이 서지 않네요.”


“한국의 역사에 관한 이야기인가요? 아마도 할아버지와 제가 관련된 이야기라 그렇겠죠? 뭐든 말씀해 주세요.”


경혁의 시선은 창 밖으로 멀어졌다. 머리를 쓸어 넘기며 생각을 정리하는 듯싶더니 마침내 결심한 듯 지현을 바라보았다.


“할아버지를 이전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아니오. 제가 한국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독일의 일반 고등학생 수준이에요. 할아버지는커녕 아버지 이야기를 들은 적도 없어요. 아버지 성함을 알게 된 것도 몇 년 안 돼요. 엄마는 정말이지 단 한마디도 해주지 않았어요.”


“두려우셨을 겁니다.”


“엄마가요?”


“네.”


경혁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현은 더 궁금해하는 표정이 되었다.


“윤세원 씨는 1930년대 초반 출생일 겁니다. 1932년 33년 뭐 그쯤일 거예요. 제 기억이 정확하다면. 일본어와 영어가 능통했어요. 일본 유학도 하고, 미국 유학도 간 사람이니까요. 기자 출신으로 알려져 있는데 1970년대가 이력의 최고 정점이었죠. 윤세원 씨는 당시 독재자의 입이었어요. 연설문도 쓰고 통역도 했죠. 독재자가 죽은 후에도 윤세원 씨는 살아남았어요. 정치 언저리에 머물다 신문사로 돌아가 고문으로 활동했죠. 칼럼이 꽤 유명했어요.”


지현은 고개까지 끄덕이며 경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윤세원 씨가 모시던 독재자는 죽었지만, 그다음에도 우리나라에서는 독재자가 대통령이 됐습니다. 1985년 정부는 뮌헨에서 대규모 간첩단을 검거했다고 발표했어요. 독일에 유학 중이던 대학생들이 북한 공작원과 접촉했다는 거였죠. 검거된 인물 중 한 사람의 활동명이 라인하르트라고 해서 <라인하르트 사건>이라고 이름이 붙었는데, 당시 십여 명의 유학생들과 전남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치인들이 연관되었다고 발표됐어요. 유학생들은 한국으로 송환되었고 정치인들은 다 체포되었죠. 사형을 선고받은 사람도 있고 무기징역 정도를 받은 사람도 있어요. 공통점은 다들 혹독한 고문을 받았다는 거죠. 그 사건이 터졌을 때 윤세원 씨는 아, 뭐더라. 꽤 화끈거리는 제목이었는데.”


핸드폰을 몇 번 두드리던 경혁이 소리를 질렀다.


“아, <숨겨진 붉은 그림자 마침내 떠오르다>”


창가에서 책을 읽던 남자가 흘끗 고개를 들고 두 사람 쪽을 바라보았다. 경혁이 미안하다는 듯 남자를 향해 고개를 숙이고 목소리를 낮춰 말을 이었다.


“윤세원은 <숨겨진 붉은 그림자 마침내 떠오르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직접 썼어요. 당시 1면을 꽉 채웠죠. 정부의 발표는 몇 줄 안 됐지만 누구라도 그 기사를 읽으면 간첩단 사건을 믿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요?”


“그 사건은 조작된 것이었어요. 2년 전에 재심을 거쳐 결국 무죄로 결론이 났습니다. 살아 있는 분들은 국가 배상도 받았습니다. 그러니까 <라인하르트 사건>이란 것도 간첩이라는 것도 애초에 없었던 겁니다.”


경혁은 물을 마시고 한숨을 쉬었다.


“그 사건을 들여다보면서 전 늘 그 부분이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윤세원 씨의 아들, 그러니까 윤도현 씨는 간첩단 사건에 연루된 유학생 중 하나였어요. 당시 뷔르츠부르크 대학에서 박사과정 중에 있었고 아내와 태어난 지 얼마 안 되는 딸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었죠. 윤도현 씨는 당연히 송환됐고 혹독하게 고문을 당했던 것 같아요. 사건이 벌어지고 한 달 정도가 지나 석방이 됐지만 두 달이 안돼 사망했으니까요. 그 사건에서 석방된 사람은 윤도현 씨가 유일했습니다만 사망했기 때문에 누구도 그 일을 수면 위로 들어 올리지는 않았습니다.”


경혁은 눈을 감은 채 한동안 있다 안경을 벗었다. 다시 뜬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순식간에 몇 년쯤 나이를 먹은 것 같았다. 지현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겨우 숨을 쉬고 있었다.


“윤세원은 그것이 조작된 사건이라는 걸 알았을 겁니다. 타깃은 유학생들이 아니라는 걸 조금만 생각해 봐도 알 수 있는 사건이었으니까요. 1980년 전남 광주에서 민주화운동이 있었어요. 당시 정부는 쿠션으로 얼굴을 덮은 것 마냥 그 사건을 눌렀지만 1985년 즈음엔 조금씩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거든요. 간첩단 사건은 그런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기획된 거였어요.”


경혁이 말을 고르는 듯 깍지를 낀 손에 힘을 주었다.


“<라인하르트 사건> 직후 당시 유력 대선 후보였던 정치인은 배후로 지목되어 가택 연금에 들어갔고 결국 대선에도 나오지 못했죠. 증거? 그런 것도 없었어요.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가 윤세원이 쓴 <숨겨진 붉은 그림자 마침내 떠오르다>였을 정도니까. 당시 윤세원은 정치의 핵심에서 벗어나 있긴 했지만 그가 가진 네트워크로만 돌려도 사건의 진상은 충분히 파악할 수 있었을 겁니다. 신문사 고문이자 논설위원이었다니까요. 다만 당장 아들을 구할 정도의 힘이 없었을 뿐이죠.”


안경을 고쳐 쓴 경혁이 지현 앞에 놓인 물 잔을 바라보았다. 지현이 물 잔을 건네주자 단숨에 바닥이 드러났다.


“왜 그랬을까요? 아들까지 희생된 조작사건을 자신의 손으로 정당화시키는 작업을 윤세원은 왜 기꺼이 수행했을까요?”


대답을 원하는 듯 경혁은 지현을 바라보았다. 지현의 눈시울도 붉게 변해갔다.


“윤도현 씨의 가족, 그러니까 아내와 딸에 관한 것은 알려진 것이 없어요. 그들은 한국으로 송환되지 않았죠. 정해원 선생님의 입장이 되어 보면 상황이 이해가 됩니다. 얼마나 두려우셨을까요? 남편이 험한 일을 당했는데도 권력의 입이 되어 날뛰는 시아버지를 보면서 얼마나 무서우셨을까요? 딸인 지현 씨에게 한국에 대해, 가족에 대해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은 것이 이해가 됩니다. 비슷한 일에 연관되어 한국에서 살아가신 분들도 엄혹한 세월을 보냈어요. 교육이나 직업 선택도 마음대로 하지 못했으니까요. 그 모든 것을 정해원 선생님은 아마 알고 계셨을 겁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지현의 머릿속은 많은 이야기가 쌓아 올려졌다 이내 무너지기를 반복했다.


“그런데 윤세원의 집에 지금 계신다고요?”


경혁이 바지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지현에게 내밀었다. 지현은 손수건을 눈가에 올린 채 한동안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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