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언어의 끝>
할아버지 방은 고요한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커튼을 젖히자 정오의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미세한 먼지 입자들이 방 안을 부유했다. 천정에는 아무 것도 없었다. 작은 스탠드 들이 그 방의 유일한 광원인 것 같았다. 묘한 구조다. 스탠드는 책상과 침대 옆, 책장 옆에 서 있었다. 책장 옆 스탠드만 키가 컸다. 책상 위에는 낡은 검정색 전화기, 그 옆으로 잉크병과 문진이 담긴 은색 쟁반이 놓여 있었다. 책상 위는 어제도 사용한 것처럼 깔끔했지만 쟁반 위에는 먼저가 조금 내려 앉아 있었다. 검은색 만년필 두 개도 살짝 먼지이불을 덮고 있었다.
“녹음되는 전화기는 요즘엔 박물관에나 가야 볼 수 있는데.”
지현은 책상 서랍을 열어볼까 하다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1인용 침대는 당장이라도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침대 위에 걸터앉아 방 안을 둘러보았다. 어제 느꼈던 이물감이 떠올랐다. 작다, 이 방은 밖에서 보는 것 보다 한참 작다. 창 밖으로 정원의 전등이 보였다. 벽을 두드렸다. 그렇다면 이 벽 밖은 대리석일 것이다. 같은 모양의 대리석 옆으로 자세히 보면 차이를 알 수 있는 대리석 조각이 붙어 있었다. 그것의 위치라면…….
지현은 책장 앞에 섰다. 나무로 만들어진 책장은 천정까지 고정되어 있었다. 제일 위칸과 두번째 칸 까지만 책이 꽉 차 있을 뿐, 그 아래로는 드문드문 책이 꽂혀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 듬성듬성 뚫린 공간에는 작은 술병이나 컵 같은 기념품들이 놓여 있었다. 기념품들 사이에는 어떤 연관성도 찾기 힘들었다. 의자를 끌고 와 위쪽 책 한권을 꺼냈다. 비어 있다. 전집은 모두 빈 껍데기였다.
“저게 무게를 줄이기 위해 저렇게 둔 거라면.”
지현은 제일 아래 칸에 있는 책을 모두 꺼냈다. 외교부에서 발간한 잡지들과 관련 서적들이 우루루 쏟아져 내렸다. 핸드폰 불을 비추자 불룩 튀어나온 부분이 보였다. 튀어나온 부분을 걷어차자 책장 한 칸이 안쪽으로 힘없이 열렸다.
어둠을 향해 한 발을 딛었다. 오래된 먼지 냄새가 났다. 핸드폰으로 벽을 비추자 거미줄이 지나간 스위치가 보였다. 불을 켜자 커다란 방이 드러났다.
정면에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의자에 앉은 웨딩드레스를 입은 엄마와 그 옆에 서 있는 턱시도를 입은 아빠가 어딘가 불편한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방에 있었을 두 개의 창문은 밖에서부터 막혀 있었다. 침대와 작은 테이블, 두 개의 책상은 두 개의 창문 아래 각각 배치되어 있었다.
책과 박스는 책상 아래 쌓여 있었다. 누군가 급하게 도망을 간 흔적처럼 보이기도 했고, 급하게 책장을 옮기느라 빼 놓은 것 같기도 했다. 박스 안에는 시간이 한참 지난 옷들이 들어 있었다. 지현은 할아버지가 있던 방과 사이의 벽을 만져 보았다. 책장 뒷면인 얇은 합판이 전부였다. 아마도 아빠와 엄마는 이 방에서 생활을 했던 것 같았다. 할아버지가 살고 있던 공간과 합하면 방은 제법 쓸만했을 것이다. 천정을 올려다보니 한쪽 벽 옆에 붙어 있다시피 한 등이 보였다. 할아버지 방에 전등이 없는 것은 이유가 있었다. 할아버지는 아들의 방을 잘라 자신의 방으로 만든 것이다. 누군가 아들의 소지품을 만지지 못하도록.
“할아버지는 자신을 부비트랩으로 설치한 건가.”
아무리 경찰이라도 할아버지의 방을 뒤질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 집에서 나간 물건은 없다던 최여사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책상 하나에는 뽀얀 먼지가 쌓여 있었지만 나머지 하나는 비교적 깔끔했다.
깔끔한 쪽 책상 위 녹색 스텐드를 켜자 희뿌연 불빛이 쏟아졌다. 책상 위에는 <국문학사>, <우리말본>, <음운론의 원리>같은 책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한쪽 귀퉁이에는 연단에서 말하고 있는 윤도현의 사진이 있었다. 안경을 쓴 이십대 후반에서 삼심대 초반의 모습이었다. 서랍을 열자 오래된 사진과 메모, 필기도구 등이 튀어나왔다. 윤도현이 이 책상의 주인인 듯했다. 오른쪽 작은 서랍을 열자 엑셀로 정리된 듯한 서류가 있었다.
“이건 아빠 것일 수가 없는데.”
지현은 의자에 제대로 앉아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문서는 ‘한독문화진흥회’라는 곳으로 송금한 액수를 기입해 놓은 것이었다.
“한독문화진흥회라, 한독문화진흥회.”
몇 번 중얼거린 끝에 그곳이 엄마의 번역 일을 주선했던 단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윤세원은 1986년부터 엄마가 돌아가실 때까지 상당한 액수를 그곳으로 송금하고 있었다. 엄마가 잘 팔리지 않는 번역책으로 생활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할아버지였다.
먼지가 쌓인 책상으로 다가갔다. 책상 위 분홍색 스탠드는 작동하지 않았다. 책상 아래로 기어들어가 전선을 만진 후에야 제대로 된 빛이 쏟아졌다. 책장에는 손바닥 두께의 한자 사전이 몇 종류, 국어 사전이 한 권, 낡은 수필집과 소설들이 꽂혀 있었다.
큰 서랍을 열자 검정색 상자가 보였다. 상자 안에는 책 한권이 들어 있었다. 표지는 오래된 황갈색 닥종이였고, 그 위에 선홍빛 실이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오른쪽 상단에는 성화몽기(聲花夢記)라고 적혀 있고 아래에 희미하게 송씨부인필(宋氏夫人筆)이라고 적혀 있었다. 지현은 핸드폰으로 글씨의 사진을 찍고 번역기를 작동했다.
“성화몽기. 이게 엄마가 찾던 성화몽기구나.”
지현은 한숨을 쉬고 책을 상자에 넣은 후 서랍에서 꺼내 끌어안았다. 그리고 뒤를 돌아 방안을 다시 둘러보았다.
이 방에서는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지현은 생각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떠난 후 이 방엔 어떤 일이 있었던 것일까. 할아버지는 경찰이 찾아올 것을 알았을 것이다. 아들의 물건 어떤 것에도 손을 댈 수 없게 하기 위해 아들 내외의 방을 감추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자신이 직접 그 사이를 지켰다. 할아버지는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얻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라인하르트 사건이 터지기 전까지는.
그토록 아들을 위하던 할아버지가 라인하르트 사건 이후로 정반대 입장에 설 수 있었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어.”
아들이 송환된 후 할아버지는 날조된 사건을 확고한 사실로 만드는 기사를 직접 썼다. 이유는 뭐였을까? 한독문화진흥회에 돈을 보내는 것과 관련이 있었을까? 지현은 아버지의 책상 서랍을 다시 열었다. 한독문화진흥회로 송금한 내역을 기입해 놓은 서류 아래 누런 서류 봉투가 있었다. 봉투를 꺼내자 플라스틱의 작은 테이프가 툭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굵은 만년필로 휘갈겨 쓴 메모도 있었다. 라인하르트, 간첩, 연락책 같은 글씨가 정자체로 적혀 있었고 며느리, 손녀, 신변안전 같은 글자는 크고 거칠게 적혀 있었다. 물이 떨어진 후 마른 자국도 보였다.
지현은 테이프를 들고 할아버지의 책상으로 향했다. 테이프가 들어갔을 때부터 지현의 손은 덜덜 떨렸다. 플레이 버튼을 누르자 낯선 음성이 들렸다.
“임자가 수고를 좀 해야지.”
누군가 흐느끼고 있었다. 거친 숨소리와 낮은 울음이 대답을 대신했다.
“최대한 그럴 듯하게 기사를 작성해 봐. 라인하르트가 그 간첩단의 이름이야. 연락책 같은 건 알아서 잘 만들어 봐.”
“제 아들은 꺼내 주셔야 합니다. 그 아이는 아무 잘못이 없습니다.”
목소리는 거의 울부짖고 있었다.
“임자가 빨리 움직일수록 아들도 빨리 나올 수 있어. 그리고 독일에 있는 며느리 생각은 안하나? 손주 낳았다는 소식이 들리던데? 신변 안전 같은 건 걱정 안하나?”
툭, 소리를 내며 테이프가 멈췄다. 지현은 두 팔에 얼굴을 파묻고 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