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언어의 끝>
<<올해 수확된 밀이 창고에 가득 찼다. 한낮에 그 짐을 싣고 도착한 인부들에게 탁주를 내어주자 몹시 고마워했다.
“대감님 댁에서나 이런 좋은 탁주를 마시지 어디서 이런 걸 마셔볼깝쇼.”
논일이나 밭일을 할 때 그네들도 탁주를 마시고 소리를 하는데, 그들의 술이 우리의 술과 얼마나 다를지는 알 수가 없다. 무릇 술이란 집집마다 맛이 다른 법이니까. 친정의 술과 이곳의 술도 맛이 다르다. 누룩을 빚는 법이 다르고 물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제 누룩을 빚을 때가 되어 예전에 급히 적어 두었던 것을 다시 훑어보고 부엌으로 갔다. 친정에서 만들 던 것과 이곳의 누룩은 만드는 법도 띄우는 법도 다른데, 1년에 한 번 있는 큰 일이다 보니 매번 신경을 곤두세우게 된다.
부엌에 가니 월이가 참모에게 꾸중을 듣고 있었다. 누룩을 만들면서 실수를 한 모양이었다.
“너는 어찌 멍청하게 매번 그걸 잊느냐. 누룩을 망치면 한 해의 술을 망치는 법이거늘.”
월이가 울면서 참모에게 말했다.
“아니, 지난해에 한 번 배운 것을 내 어찌 올해 낱낱이 기억한단 말이오.”
참모의 말도 월이의 말에도 맞는 부분이 있어 나는 쉬이 나서지 못했다. 나도 기억하기 어려워 적어놓고 되뇌지만 월이는 그마저 할 방도가 없다. 제 이름자조차 쓰지 못하는 월이에게 무엇을 바랄 것인가. 애꿎게 참모의 꾸중만 받을 뿐이다. 마음이 아프다.
- 성화몽기 중 일부 발췌>>
지현은 침대에 기대앉은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2시 10분이 지나고 20분, 30분이 되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종소리도, 소음도, 불빛도 아무것도 없다. 고요한 적막만 이어졌다. 새소리도 차소리도 어떤 종류의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이불을 박차고 나와 창 밖을 바라보았다. 정원의 적막함 역시 그대로였다. 그 아래로 반짝이는 불빛들의 개수도 많이 줄어들었다. 많은 이들은 고단한 하루를 끝내고 불을 끈 시간인 것이다.
“꿈이었나.”
어차피 잠도 오지 않는다. 어딘가에서 불빛이 삐져나오기를, 소리가 들리기를 희망하는 마음이 반,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바라는 마음이 절반인 상태로 1층으로 내려왔다.
할아버지의 방을 거쳐 엄마의 책상 위 분홍색 스탠드를 켰다. 뽀얀 불빛이 쏟아져 내렸다. 창문이 막힌 방은 답답했지만 할아버지 방으로 연결되는 문을 열어 놓으니 견딜만했다.
벽에 걸린 사진을 올려다보았다. 사진 속 부모는 어리고 약해 보였다. 그래봐야 지금의 지현보다도 한참 어릴 때 두 사람은 웨딩 사진을 찍었다. 엄마는 대학교 1학년 때 아빠를 만나 학교를 그만두고 결혼했다. 그 시대에는 그것이 룰이었는지 모르겠다. 지금은? 미래에서 보면 놀랄만한 어떤 룰을 지키며 살고 있겠지. 지현은 아무리 봐도 젊은 부모의 얼굴이 낯설다고 생각하며 의자에 앉았다. 벽을 보지 않으려면 몸을 방 안으로 돌려야 했다. 열린 할아버지 방문이 보였다. 할아버지는 이따금 책장문을 열고 이곳을 들어왔을 것이다. 구부정한 노인이 방 안으로 천천히 들어오는 모습을 상상했다.
역사는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뭐라고 표현할까, 지현은 생각했다. 며칠 전에 만났던 경혁의 얼굴이 생각났다. 윤세원이라는 이름을 이야기하며 그가 지었던 반쯤 불쾌하고 또 어느 만큼은 놀라던 표정이 떠올랐다. 경혁은 끝까지 예의를 지키려 노력했지만 순간순간 터져 나오는 할아버지에 대한 반감은 숨겨지지 않았다. 얼마나 대단한 집에서 살았는지 꼭 보고 싶다며 굳이 집까지 찾아온 것도 혐오와 분노의 다른 표현 같았다.
아마도 경혁은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을 ‘부역자’라 표현할 것이다. 부역을 한 사람도 그보다 더 깊게 부역한 사람에 의해 화를 입는다. 인간을 힘의 논리로 줄 세우는 사회에서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결과다. 할아버지가 그 사실을 모르고 그 길을 걷기 시작했다고 해도 적어도 죽기 얼마 전에는 깨달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할아버지보다 나은가? 지현은 입술을 깨물며 생각했다.
소크라테스는 ‘나는 내가 모른다는 것을 안다’고 말했다. 적어도 출발점은 그곳이어야 한다. 지현에게는 모든 상황이 난제였다. 지현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일뿐 아니라 그 일이 일어나게 만든 역사적 맥락조차 모르고 있었다. 지금까지 일어난 상황을 외면하고 싶지 않다면 이제라도 알아야 한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모르는 거야.”
지현은 눈을 감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래서야 이스라엘의 법정에 선 아이히만과 다를 게 없지 않은가. 지현이 한국과 엄마 이외의 가족에 대해 무지하게 된 것은 분명 엄마의 책임이 있었다. 엄마는 두려움과 무서움 때문에 지현을 통제했다. 덕분에 엄마가 돌아가신 후, 완벽하게 한국에 대해 아는 것이 없는 상태로 사건들의 한가운데 던져졌다. 엄마는 일이 이렇게 진행될 줄 몰랐던 것일까? 그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 그게 다일까? 모든 정보가 열려 있는 상태에서, 정보가 너무 홍수처럼 쏟아져서 문제가 되는 지금의 현실에서 ‘몰랐다’는 것이 과연 변명이 될 수 있을까?
20세기 이전 권력을 가진 자들은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 정보를 통제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2세는 왕실에 감자 밭을 만들고 엄중히 경비를 서는 시늉을 하되 훔치는 자는 그냥 놔두라고 병사들에게 지시했다. 당시 감자는 짐승의 먹이로 여겨져서 누구도 키우거나 먹으려 하지 않았기에 왕은 권력을 이용했다. ‘왕이 지키는 귀한 작물’이라는 정보를 조작하고 퍼뜨려 농부들이 ‘훔쳐’서라도 심고 싶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감자는 지금까지 독일 식탁에 없어서는 안 될 음식이 되었다. 그냥 그런 것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그나마 좋은 일에 정보를 조작했기에 널리 알려졌다. 그렇지 못한 일로 정보를 조작하는 경우는 셀 수 없이 많을 것이다.
이제 정보는 흘러넘친다. 의지가 있다면 알 수 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렇게 알아낸 것이 ‘진실’이라고 과연 말할 수 있을까? 지현은 할아버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할지 망막했다. 오경혁처럼 할아버지를 자랑스러워하며 그의 행적을 알기 위해 최선을 다할 수 있을까?
지현은 이 상황을 제삼자처럼 바라보고 평가하는 스스로에 대해 놀랐다. 생각해 보면 지현은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마음이 가는 쪽은 엄마였다. 엄마는 어떤 시간을 보낸 것일까. 엄마의 입장이 되어 시간을 돌려 보았다.
엄마는 낯선 독일에서 살았을 것이다. 그때라면 한국인이 거의 없었을 수도 있다. 결혼한 부부로 아마도 아이를 갖고 싶었을 것이고, 다행히 임신했을 것이다. 임신으로 힘든 와중에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가족인 남편이 사라졌을 것이다. 무서운 죄목을 가지고. 여차하면 자신과 뱃속의 아이도 같은 운명이 된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지현의 마음이 아팠다.
엄마는 남편의 무죄를 확신했을 것이다. 자신의 부모에게, 시부모에게, 그녀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어떻게 된 상황인지 알아봐 달라고 했을 것이다. 특히 시아버지에게는 울며 매달렸을 것이다. 시아버지는 걱정하지 말라고, 힘을 써보겠다 말했을 것이다. 그렇게 며칠, 몇 주가 지나갔을 것이다. 피가 마르는 심정이 되어 숨을 쉴 수도 없을 때 남편이 출소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것이다. 아마도 엄마의 마음은 뛰었을 것이다. 이제 자신만 한국으로 돌아오면 남편을 만날 수 있다. 그동안 독일에서 했던 모든 일을 내팽개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준비를 했을 것이다. 지현의 가슴이 쿵쾅거렸다.
그러나 돌아올 수 없었을 것이다. 상황이 좋지 않으니 그곳에 있어야 한다고 모든 사람이 만류했을 것이다. 가까웠던 사람부터 천천히 연락이 끊겼을 것이다. 외로웠을 것이고 불안했을 것이다. 그리고 남편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것이다.
“엄마는 할아버지가 쓴 기사를 읽었을까?”
그랬을 것이다. 몇 주 혹은 몇 달이 지난 후에라도 어떻게 해서든 그 기사를 찾아 읽었을 것이다. 아마도 시아버지를 향한 원망이 쌓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진행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것이다. 좌절했을 것이다. 절망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살기 위해 정을 붙이고 살던 뷔르츠부르크를 떠나 베를린으로 이사를 했을 것이다. 주변에 아는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는 낯선 곳에서 나를 낳았을 것이다. 지현은 입을 틀어막았다. 엄마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졌다.
베를린 마테 지구 어딘가에서 갓난 나를 혼자 키웠을 것이다. 잠이 오지 않는 밤이면 자신이 어떤 일들을 거치며 이곳에 오게 됐는지 생각했을 것이다. 누가 자신에게 등을 돌렸는지 헤아려봤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을 원망할 수도 없다는 생각에 곧 이르렀을 것이다. 이따금 창 밖에서 자신을 지켜보는 누군가는 없는지 커튼 뒤에서 숨을 죽였을 수도 있다.
아이는 여느 아이들처럼 어느 정도 버릇없고 어느 만큼 사랑스럽게 자랐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가장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아이와 나눌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이 자랐던 골목과 예전에 맡았던 향기와 친구들과 들었던 노래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도 아이와 나눌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추억, 소망, 염원을 담아 독일어를 한글로 한 자 한 자 번역했을 것이다. 어쩌다 화가 나면 독일어로 소리를 지르는 딸을 슬픈 눈빛으로 바라보면서. 지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