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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경궁과 김애실 수채화전

by 지현

입춘 추위라고 하더니 며칠 동안 연달아 강풍과 한파가 계속된다.

연일 계속되는 영하의 추위지만 그래도 오늘은 한낮 최고 기온이 0도까지 오른다니 바람만 세게 불지 않으면 걷기에는 괜찮을 텐데 생각하며 약간의 기대를 갖고 집을 나선다. 다행히 하늘은 맑고 햇빛도 따스해 보인다.


오늘은 창경궁에서 걷고 인사동으로 가서 전시회에 가려고 한다.

혜화역 4번 출구에서 10명이 모였다. 주머니 속에 따뜻한 손난로 핫팩도 하나씩 넣고 무장을 단단히 하고 나타난다.

역에서 나와 명륜동 쪽으로 들어가려니 초입에 대명길이라고 길 이름이 적힌 명판이 서 있다.


대명길이 끝나니 성균관대 입구 쪽 창경궁로와 만난다. 창경궁 돌담을 따라 남쪽으로 조금만 더 내려가면 곧 창경궁의 정문인 홍화문에 이른다.


창경궁은 이웃에 있는 창덕궁과 달리 관광객으로 붐비지 않아서 조용히 산책하기 좋은 곳이다. 봄이 되면 갖가지 꽃으로 둘러싼 꽃대궐이 되어 더욱 아름답지만 겨울에도 오래된 소나무들이 울창해서 운치 있고 바람도 막아주니 추운 날씨에도 걷기 좋다. 눈이 오면 설경은 말할 것도 없고.

홍화문 안에 들어서서 정면으로 보이는 명정전으로 곧장 들어가지 않고 명정문이 보이는 옥천교 앞에서 기념사진을 한 장 찍고 왼쪽으로 옥류천을 따라 내려간다. 종묘로 가는 방향이다. 옥류천은 창경궁의 담장 아래서 지하로 흘러 들어가고 산책길은 되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우리는 돌아서 이번에는 대온실 쪽으로 간다. 여러 전각들을 지나고 춘당지 옆길로 해서 북쪽 끝에 있는 대온실에 이르러 그리 들어가니 역시 따뜻하다.

오늘 창경궁 온실을 찾은 첫째 이유는 이 따뜻한 쉼터 때문이기도 하지만 또 다른 이유는 동백꽃 때문이다. 창경궁 온실의 동백꽃은 해가 바뀌고 새해에 들어 서울에서 제일 먼저 구경할 수 있는 꽃이다. 온실 안에는 꽤 오래된 큰 동백나무들이 몇 그루 있어 해마다 연초에 오면 탐스럽게 핀 동백을 볼 수 있다. 오늘도 붉게 핀 동백이 보는 사람을 기쁘게 맞아준다. 동백나무 외에도 키 큰 오렌지 나무가 서 있어 꼭대기에 달린 샛노란 오렌지 세 개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최근 몇 년 동안 서울과 주변에 신설된 대규모 온실을 이미 여러 군데 둘러보고 온 터라 창경궁 대온실은 이름이 무색하도록 규모가 아담하다. 분재 식물이 많고. 하지만 100년 이상 된 한국 최초의 서양식 온실이라는 역사적인 의미도 있고 무엇보다 추운 겨울에 창경궁 산책 도중에 따뜻한 쉼터를 제공해 주니 여간 중요하고 고마운 곳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따뜻한 쉼터지만 이 안에서 따뜻한 물 한 모금을 마실 수는 없다, 또 궁궐 안에서는 도대체 음식물 섭취가 불가능하고 물만 마실 수 있다.

간식 시간은 따로 못 갖더라도 연못 앞 벤치 옆에 어정쩡한 자세로 선 채 솜씨 좋은 친구 Y가 집에서 손수 끓여 온 따뜻한 호박죽을 한 모금씩 마시며 잠시 쉬는 시간을 갖는다.

벤치에 앉아 보지도 못하고 곧 출발하여 하얗게 얼어붙은 연못 춘당지를 돌아간다. 어떤 친구는 예전에 이 연못에서 스케이트도 탄 적이 있었다는데.


다음 목적지는 인사동의 갤러리인데 아무리 빨리 걸어도 약속 시간에 못 맞추어 갈 것 같다. 친구에게 전화하니 그럼 전시장 옆의 식당으로 먼저 오라고 한다.

창경궁에서 창덕궁으로 통하는 함양문을 지나서 창덕궁의 정문인 돈화문으로 간다. 돈화문은 오늘 공사 중인 모양으로 옆문으로 나가라고 한다.


창덕궁 앞에서 큰길로 나오니 안국역 쪽으로 경찰 버스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아까 우리가 창경궁 돌담길을 걸어올 때는 그 길에 많은 관광버스들이 늘어서 있어서 관광철도 아닌데 웬 관광버스들이 이렇게 많은가 하고 놀랐는데 그 버스들은 각 지역에서 시위대를 태우고 온 버스들이란다. 그리고 지금 이 경찰버스들은 그 시위대를 지키는 버스들이다. 근처에 헌법재판소가 있기 때문이다. 시위대는 안국역 사거리에서 낙원상가 가는 길에 자리 잡고 앉아 시위를 하고 있다. 빨리 정국이 안정되어야 할 텐데 추운 날씨에 여러 사람이 고생이 많다.


우리는 종로소방서와 운현궁 앞을 지나서 인사동 골목길로 들어서서 친구가 말해준 식당을 찾아간다. 언젠가 와 보았던 식당이다. 골목입구에서 마침 친구를 만난다. 친구가 예약을 해 놓아서 식당에는 우리를 위한 식탁이 이미 차려져 있다. 불고기 정식으로 푸짐한 점심을 먹고 전시장으로 향한다.

전시회는 ‘수평과 지평’이라는 수채화 작가들의 모임이 기획한 전시로 창립 20 주년 기념전이라고 한다. 인사아트플라자 전관을 대관하여 단체전과 여러 부스에서 개인전도 하는데 규모가 상당히 큰 전시회다. 1층의 단체전도 보고 4층의 부스로 가서 친구의 작품을 본다. 친구 김애실 작가는 원래 전업작가는 아니고 은퇴 후에 시작하여 십 년 넘게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는 취미화가이다. 그가 “사랑의 열매"라는 주제로 그린 그림들에서 정말 탐스럽고 실하게 열린 ‘열매’들을 볼 수 있다. 퇴직 후에 숨은 재능을 끌어내고 후반기 인생을 그림과 함께 열심히 풍요롭게 살아서인지 작가의 얼굴이 밝고 건강해 보여 정말 보기에 좋다.


전시회 관람을 마치고 5층 카페에 올라가니 여기에도 그림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이 그림들은 회원 작가들이 기증하는 것이라고 한다.

5층 카페는 벽의 그림들도 좋지만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이 진짜 그림이다. 북쪽으로는 북악산이 정면으로 보이고 바로 옆에는 고풍스러운 붉은 벽돌의 천도교 대교당 건물도 보인다. 어디 외국 여행지에 앉아 창밖을 내다보고 있는 기분이 든다. 거기다가 함박눈까지 내리기 시작해서 낭만적 분위기를 더해준다.

그러나 이런 낭만적 분위기에 취하는 것도 잠시였고 눈이 온다니까 모두들 집에 갈 길을 걱정하며 주섬주섬 외투를 입기 시작한다. 우리는 어느새 눈이 오는 것을 이렇게 겁내는 나이가 되었을까?

집에 돌아갈 시간도 되어 갤러리에서 나와 우리는 양 편으로 갈라진다. 한편은 안국역 쪽으로 다른 한편은 종로 쪽으로.

나중에 사진에서 보니 몇몇 친구들은 그 사이에 제법 쌓인 하얀 눈길을 걸으며 붕어빵까지 사 먹어 가며 10대 소녀들처럼 눈을 맞으며 인사동길을 즐긴 것 같다.


집에 와서 보니 오늘은 11500 보 걸었다고 한다.


2025년 2월 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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