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여섯 시, 미리 꺼내 두었던 니트와 패딩을 껴입었다. 배꼽까지 올라오는 이민가방과 88리터 캐리어, 그리고 기내용 캐리어와 백팩까지 챙겨 집을 나섰다. 부모님 차에 짐을 싣고 공항으로 향했다. 다른 날과 다르게 차 안은 조용했다. 그 누구도 먼저 입을 떼지 않았다. 흘러나오는 노래를 제외하면 진공에 가까울 정도의 침묵이 이어졌다. 한숨 자려고 했지만 어째서인지 눈을 감아도 잠은 오지 않았다. 셋이 살 던 집에 둘만 남겨질 부모님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일까. 인천대교를 건널 땐 하늘이 어두워져 있었다. 시부모님 차를 타고 온 남편도 거의 같은 시간에 공항에 도착했다. 우리는 양손에 짐을 끌고 체크인 카운터로 향했다.
항공사 직원은 편도행 티켓인 걸 확인하더니 짐짓 당황한 듯했다.
“죄송하지만 혹시 거주 목적으로 가시는 거예요?”
“네, 남편이 거기 회사에서 일하게 돼서요.”
근로 허가를 나타내는 서류 한 장을 보여주었다.
“잠시만요.”
직원은 주변에 있던 동료들을 부르더니 얘기를 나눴다. 작게 말해서 들리진 않았지만 표정으로 미루어보건대 안 좋은 소식인 게 분명했다. 직원은 한참을 얘기하더니 날 보며 말했다. “아내분께서는 힘드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뭐가 힘들다는 건지. 비행기를 탈 수도 없다는 걸까. 예상치도 못했던 상황이 닥치자 어떤 질문도 하지 못한 채 우물쭈물 대고 있었다. 직원도 확실하지 않았는지 일단 알겠다며 탑승권을 끊어주었다. 가방들을 맡기고 나니 몸이 한결 가벼워졌다. 저 멀리서 부모님 네 분이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여권과 탑승권을 손에 쥐고 다 같이 출국장으로 향했다.
이제 보안 검사를 통과하고 출국 심사를 마치면 당분간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저 미소를 머금고 인사하는 것뿐.
“잘 다녀올게요.”
“그래, 너희 둘이 잘 이겨내리라 믿어. 마스크 잘 쓰고, 코로나 조심하고.”
아버님은 평소에도 코로나에 관한 영상을 유튜브에서 보시고 우리에게 매번 '조심해라, 외식하지 마라, 사람 많은 데 가지 마라, 마스크는 꼭 KF94로 써야 한다, 택배 상자도 하루 뒀다 뜯어라'라고 말하셨다. 오늘만큼은 아버님도 하고 싶은 말이 많지만 참는 게 눈에 보였다. 부모님들도 우리도 어엿하게 인사를 나눈다. 여기서 웃지 못하는 사람은 단 한 명, 아까부터 입을 꾹 다물고 있던 엄마다. 서른이 넘은 직업 군인 아들이 휴가 나왔다가 들어갈 때면 어김없이 우는 우리 엄마.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는 듯 눈물을 뚝뚝 떨구기 시작한다. 유리알 같은 눈물이 엄마의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예상했던 일이지만 직접 보고 있자니 식도 한가운데 죄책감이 걸린다. 이런 마음을 감추고 나는 꿋꿋한 어른이라도 된 양 엄마를 껴안으며 말했다.
“좋은 일로 떠나는 건데 왜 울어. 영상통화 자주 하면 되지. 못 보는 것도 아닌데.”
품 안에 들어온 작은 어깨는 당장이라도 부서져버릴 것만 같았다.
우리가 출국장에 들어갈 동안 엄마는 울음을 멈추지 못했고, 시부모님과 아빠는 온 힘을 다해 괜찮다는 표정을 짓고 손을 흔들었다. 출국장을 통과하니 분위기는 차분해졌다. 문을 닫은 면세점이 있었고, 피로와 설렘이 반쯤 섞인 공기를 마셨다. 게이트를 향하는 길에 직원이 했던 말이 다시 떠올랐다. '아내분께서는 힘드실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크로아티아까지 갔는데 도착하자마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지는 않았다. 입국 심사 때 보여줄 서류들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잠시 후 탑승 안내 방송이 나왔다.
크로아티아에 온 지 반년이 넘은 지금, 엄마는 그동안 몇 번이나 울었을까. 가끔 엄마의 눈물로 만들어진 작은 웅덩이를 떠올린다. 빨래가 금방 마르는 한여름날에도 마르지 않는 깊은 곳. 이제야 고백하지만 어릴 적엔 이곳을 싫어했다. 바라보고 있으면 연약해지는 기분이 들어 보고도 모른 척했다. 나는 저렇게 웅덩이를 만들지 말아야지 다짐한 날도 있었다. 하지만 엄마가 날 뱃속에 품었을 때의 나이가 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연약해서가 아니라 사랑할 땐 누구나 다 웅덩이 하나쯤 만들어낸다는 것을. 내 세계를 다정하게 만들고 있었던 건 다름 아닌 엄마의 웅덩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