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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음이론 Nov 10. 2021

1-1. 허연 곳에 살게 되었다.

영원히.

"올해도 드럽게 덥네. 뒤지것다 뒤지것어"

"소맥이나 말아 잡수고 언능 자요"

"그려~ 간다"

 놈의 허리는 차라리 끊어져버렸으면 좋겠다. '주 두 병에 자 하나 긴' 봉다리 쥘 손아구만 남아있다.

내일은 비가 온다고 해서 아마 작업을 못 나갈 듯싶다. 그렇다면 소주 5병은 족히 사고 들어가야 된다. 지금 먹을 두 병에 내일 아침, 점심, 저녁. 하루만 비가 온다면 좋겠지만 올여름은 영 장마가 길게 느껴진다. 어쩌겠나, 술 먹고 비 그칠 때까지 자면 되지. 술 사고 안주 사고 오늘은 신호등도 안 걸리고 일이 착착 계획대로 되는 것 같다. 술맛이 좋으련지, 오랜만에 현장에서 쌀밥 좀 먹어서 힘이 나는 건지, 역시나 사람은 일을 해야 되나 보다.

다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할 일이 있다. 내 집 화장실 문 앞은 비가 매번 새는 곳이다. 올 장마가 어찌나 길던지 도저히 화장실 바닥이 마르지 않더라. 걸레를 놔도, 대야를 놔도 아무 소용없어 그냥 내버려 뒀다. 대신 막힌 하수구를 조금이나마 뚫지 않으면 방바닥까지 차오르는 뭣 같은 상황이 벌어지기 때문에, 하수구를 뚫고 얼른 한잔 하련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옷걸이를 펴서 만든 쇠꼬챙이부터 챙겼다. 팔, 다리 걷어붙이고 본격적으로 사투를 시작했다. 하수구 안에는 뭐가 잔뜩 꼬여서 나올 생각을 안 한다. 오기가 생겨 온 몸에 근육을 쥐어짜며, 빤쓰 바람에 줄다리기하듯이 용쓰고 있다.

'야~ 야~ 야~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인데~'

중요한 순간에 꼭 전화가 온다. 내일 비 때문에 작업 일정이 바뀌는 얘기 하려나보다. 화장실 문 앞에 작업조끼를 벗어뒀는데 손이 짧다. 하수구를 막은 놈이 거의 다 나왔는데... 한 손에는 쇠꼬챙이를 잡고 있는 힘껏 반대쪽 손을 뻗어서 휴대폰을 겨우 꺼냈다.


'뽁'

동시에 하수구를 막아놨던 녀석이 드디어 나왔다.


'쿵'

하수구에서 허연 무언가가 쏟아져 나온 것 같다. 눈앞에 보이는 것은 온통 허옇고 매스꺼운 느낌만 계속된다.

'어우 점심을 너무 많이 먹었나? 토 나올 것 같... 욱... 윽...'

무슨 일인지 전혀 모르겠다. 지금은 그냥 편안하다. 별 생각이 없다.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됐는지는 모르겠다.


이 세상은 당최 이해할 수 없는 현상으로 가득하다.

- 일정한 간격마다 거대한 등대가 빛을 비춘다. 크기가 얼마나 큰지 눈이 너무 부시다. 눈을 감아봐도 억지로 가려봐도 등대가 비추는 빛은 막을 수가 없다.

- 눈 부신 시간이 되면 가시덤불이 솟아오른다. 온몸을 감싸 안아서 너무 따가워 죽겠다.

- 간간이 너무 추워서 온 몸이 파르르 떨린다. 사계절이 굉장히 짧게 지나가나 보다.

- 그래서인지 감기 기운이 있다. 기침이 멈추지 않아 토할 듯이, 아니 장기가 밖으로 나올 만큼 구역질을 한다.

- 그래도 이런 느낌이 들고나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편안해진다. 어쩌면 하늘을 나는 느낌에 중독돼서 여기를 못 나가고 있는 것 같다. 아직 술을 마시지 않았는데 만취한 느낌이랄까.


한참이 지나고 그냥 눈이 떠졌다.

"이름이 뭐예요? 김길동 씨 맞아요? 맞으면 고개 끄덕여보세요"

난생처음 보는 아가씨가 뜬금없이 말을 걸어온다.

'삐비빅 삐비빅'

옆에서는 기계 알람 소리가 들려온다.

'켁, 켁'

기침이 계속 나오는 터라 말이 안나오......

목 구녕에 뭐가 박혀있다. 갑갑하고 죽을 것 같다. 앞에 보이는 아가씨는 계속 내 이름을 불러대는데 대답은커녕 기침이 멈추지 않는다.


기분 나쁜 꿈을 꾼 것 같다. 다시 눈이 감기고 편안한 세상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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