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있는 시간이 남긴 변화
서울에 올라오기로 했을 때, 가장 먼저 기대한 것은 친구들이었다. 가까운 곳에 살게 되면 지금보다 자주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혼자 보내는 시간은 줄어들고, 외로움도 자연스럽게 옅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지방에서 혼자 살 때도 늘 외로운 것은 아니었다. 다만 하루를 보내고 돌아와 길게 대화를 나누는 일이 드물었다. 그래서 서울에서의 독립은 생활의 변화이면서 동시에 관계의 변화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막상 서울에 와서 가장 먼저 알게 된 것은, 가까운 거리가 곧 자주 만난다는 뜻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나와 친구들은 모두 바빴다. 각자의 회사에서 하루를 버티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지쳐 있었다. 야근은 흔했고, 퇴근 시간은 자주 늦어졌다.
"이번 주는 어려울 것 같아."
"다음에 보자."
약속은 자연스럽게 미뤄졌다. 서로의 피곤함을 아니까 쉽게 서운해 할 수도 없었다. 퇴근 후 원룸으로 돌아오면 방 안은 늘 고요했다. 불을 켜고 가방을 내려놓는 순간, 하루 종일 바깥에 있던 소음이 한꺼번에 사라졌다.
그 적막이 유난히 크게 느껴지는 날이 있었다. 그럴 때면 생각했다. 서울에 살면 덜 외로울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외롭구나. 서울은 많은 사람이 사는 도시였지만, 혼자 있는 시간까지 줄여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모두가 바쁘게 움직이는 만큼, 각자의 시간은 더 단단하게 나뉘어 있었다. 지금 돌아보면 서울에 오기 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서울은 생각보다 팍팍하고, 사람을 자주 만나는 일도 쉽지 않다고. 아마 그때는 제대로 듣지 않았던 것 같다.
당시의 나는 서울이라는 도시 자체를 하나의 가능성처럼 보고 있었다. 지방을 벗어나면 생활도 생각도 조금은 달라질 것 같았다. 그래서 조금은 무모하게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처음에는 혼자 보내는 시간을 잘 써보려고 했다. 강의를 듣고, 책을 읽고, 신문을 펼쳤다. 스스로를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밀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혼자 하는 일은 의지가 약해지는 순간 금방 무너졌다.
어느 날은 책 대신 휴대폰을 들었고, 짧은 영상 하나로 시작한 시간이 어느새 한 시간을 넘겼다. 퇴근 후 아무 생각 없이 보는 영상은 생각보다 쉽게 하루를 채웠다. 영화와 드라마도 비슷했다. 보다 보면 시간이 지나 있었다. 문제는 그렇게 하루를 보내도 마음이 가벼워지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
매일 쓰던 일기도 조금씩 달라졌다. 처음에는 그날의 감정과 생각을 적었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남길 문장이 줄어들었다.
오늘도 비슷했다. 별일 없었다. 그 정도로 끝나는 날이 많아졌다. 기록은 짧아졌고, 생각도 함께 짧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때 알았다. 나는 쉬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을 멈춘 채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다시 책을 펼쳤다. 한 권을 읽다가 오래 머무르게 되는 문장을 만났다. 글을 쓰라는 말이었다. 대단한 문장은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누군가의 문장이 아니라, 내 생각을 다시 꺼낼 계기가 필요했던 것 같다.
그래서 책 속 문장 하나를 적고, 그 아래에 짧게 내 생각을 덧붙이기 시작했다. 몇 줄 뿐인 기록이었다. 하지만 그런 문장이 하루씩 쌓였다. 조금씩 하루가 달라졌다.
몸은 여전히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머릿속은 예전보다 오래 움직였다. 하나의 문장을 붙잡고 있으면 생각이 예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어졌다.
"왜 이 문장이 남았을까. 왜 오늘은 이 생각이 오래갈까" 질문은 또 다른 생각을 만들었다. 어쩌면 사유라는 것은 거창한 일이 아니라, 이렇게 작은 문장 하나를 오래 붙잡는 일인지도 몰랐다. 요즘은 매일 조금씩 다른 생각을 기록한다. 정리되지 않는 날도 많고, 문장이 마음처럼 나오지 않는 날도 있다.
그래도 예전과 달라진 점은 분명하다.
하루를 그냥 흘려보내지 않게 되었다.
외로움은 사라지지 않았지만, 이제는 그 안에서 나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생겼다.
아직 성장이라는 말을 쉽게 붙일 수는 없다.
다만 예전보다 조금 더 오래 생각하고, 조금 더 자주 기록한다.
그리고 아마 그 변화가, 지금의 나를 조금씩 다른 방향으로 옮기고 있는 중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