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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피플 Oct 09. 2020

파도를 넘어 제주로

 석굴암에서 일출을 보고 숙소로 내려왔다. 선생님은 모든 프로그램이 끝났으니 집으로 돌아가도 좋다고 말했다. 나는 평상복으로 환복 하기 전에 오늘을 기념하기 위해 인증 사진을 찍었다. 범승이가 정성을 담아 찍어준 사진 속 나는 평온하고 자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내일을 고민하지 않고 오늘만 즐겁게 살아가는 아이들이나 지을법한 미소였다. 선생님에게 절복을 돌려주고 숙소 밖으로 나가니 연주와 영민이가 인증 사진을 찍고 있었다. "나 먼저 갈게, 나중에 보자!" 하고 작별 인사를 건네니 연주와 영민이가 사진을 찍다 말고 달려왔다. 그리고 내게 제주도로 여행을 오면 꼭 연락하라고 당부했다. 나는 조만간 제주도에서 다시 보자는 농담으로 받아쳤다. 선생님이 스타렉스에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숙소 문 앞에 범승이가 나를 보고 고개로 인사를 했다. 나는 범승이를 향해 손을 흔들면서 스타렉스에 탔다. 스타렉스는 숙소에서 점점 멀어져 소나무길에 진입했다. 앞으로 남은 여행은 어떻게 끝내면 좋을지 고민했다. 작년이 지나고 새해가 찾아왔고, 앞으로 조금 더 도전적인 사람이 되고 싶었다. 결국, 배를 타고 제주도로 여행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좋아하지만 바라만 보고 있던 바다. 그 바다 위로 올라가 직접 파도를 넘어 제주도로 여행을 간다는 건 생각만 해도 낭만적이었다.


 마지막 여행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니 어느새 불국사역에 도착했다. 내가 스타렉스에서 내리자 선생님은 "내년에 또 봐요."라고 말하고 핸들을 돌렸다. 나는 스타렉스가 눈에서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선생님이 떠나고 불국사역 근처에 카페를 찾아 들어갔다. 몸을 녹이고, 잠을 깨워줄 '녹차'를 한 잔 주문했다. 가리워진 커튼 사이로 햇볕이 은은하게 들어오는 곳으로 자리를 잡았다. 배를 타고 제주도로 가는 방법을 찾아보기 전에 잠시 휴식이 필요했다. 솜이 들어간 포근한 의자에 앉아 머리를 뒤로 젖히니 몸이 축~하고 늘어졌다. 새벽 5시에 일어나서 피곤했던 건지 그대로 잠이 들었다. 딸-깍! 하는 소리에 놀라서 눈을 떠보니, 직원이 테이블 위에 녹차가 담긴 주전자를 놓고 살금살금 돌아가고 있었다. 내가 자는 모습을 보고 깨우고 싶지 않았던 모양이다. 나도 직원이 민망하지 않도록 한동안 눈만 뜨고 움직이지 않았다. 직원이 카운터로 돌아간 걸 확인하고 나서야 녹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떫떠름한 녹차가 혀를 자극해서 머리가 조금씩 맑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녹차 주전자를 모두 비우고 나서야 정신이 온전히 돌아왔다. 본격적으로 제주도로 가는 배편을 찾기 시작했다. 마침 가까운 부산에 제주도로 가는 배가 있었다. 그런데 몇 번을 시도해도 온라인 예매가 불가능했다. 부산 여객 터미널로 직접 전화를 하니 당분간 배를 수리하고 있어 운행을 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부산 말고 다른 배편이 없는지 찾아봤다. 다행히도 여수에서 내일 새벽 1시에 출발하는 배가 있었다. 제주도 도착 시간도 아침 8시로 다음날 바로 여행을 시작할 수 있겠다 싶어 배표를 예약했다. 그런데 문제는 불국사에서 여수로 가는 교통편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먼저 불국사역에서 신해운대역까지 기차로 이동하고, 다시 부산 버스터미널에서 여수로 가는 버스를 타야 했다. 불국사에서 여수까지 이동 시간만 무려 6시간이 걸렸지만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신해운대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불국사역으로 갔다. 불독이 캐리어에 들어가 얼굴만 쏙 빼고 시무룩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불독 주인들이 나를 발견하고 동시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제는 정말 고마웠어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도 못했네요." 불독 주인들은 고맙다고 인사하며 내게 초콜릿을 줬다. 우리는 부산행 기차를 기다리면서 잠시 동안 이야기를 나눴다. 불독 주인들도 강아지를 데리고 하는 여행은 처음이라고 말했다. 부산에서 살고 있는데 새해 일출을 보러 불국사에 왔다고, 그런데 술을 너무 많이 먹는 바람에 늦게 일어나서 일출을 보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해줬다. 유쾌한 사람들이었다. 부산행 기차가 도착하고, 우리는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말을 하고 헤어졌다. 2020년 1월 1일, 새해 첫날. 기차를 타고 있는 사람들은 활기가 넘쳤다. 두 명씩 짝은 지어 앉아 있는 할머니들은 똑같은 파마머리를 하고 있었다. 할머니들의 파마머리는 기차 바퀴에서 나는 두구두구 소리에 맞춰 덩실덩실 움직였다. 할머니들 앞에는 잔뜩 신나서 가족사진을 찍고 있는 아저씨고 있었다. 아저씨는 오른손으로는 카드 지갑이 덜렁거리는 휴대폰을 들고, 왼손으로는 넘어지지 않기 위해 의자를 꽉 잡고 있었다. "찍을게요, 아버님! 여기 보세요~" 아저씨는 아버님, 어머님, 여보를 번갈아가면서 외치며 열심히 카메라 셔터 버튼을 눌렀다.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가득한 기차는 겨울이 지나고 봄이 찾아온 것처럼 따뜻했다.


 신해운대역에서 내려 지하철을 타고 버스터미널로 갔다.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확인하니 30분 뒤 여수로 출발하는 버스가 있었다. 매표소에서 버스표를 사고 간단히 배를 채우기 위해 국숫집으로 갔다. 허리까지 높이 올라간 의자, 철판으로 길게 만들어진 테이블, 약수터 바가지로 우동 국물을 우리고 있는 아주머니. 어느 버스터미널에서나 볼 수 있는 정겨운 풍경이었다. 주문한 지 5분 만에 국수가 나왔다. 뜨끈한 멸치 국물에 유부와 김가루가 올라간 국수를 먹는데 특별한 맛이 느껴지지 않았다. 몸이 피곤하니 미각도 잠시 마비가 된 것 같았다. 그저 목으로 국수를 넘기는 만큼 배가 불러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살기 위해 먹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들이켰는데, 오히려 국수를 모두 먹으니 졸려서 죽을 것만 같았다. 실눈을 하고서 여수로 가는 버스를 찾았다. 버스 기사 아저씨에게 버스표를 보여주고, 무거운 캐리어를 트렁크에 넣었다. 버스로 올라가 좌석 번호를 확인하는데, "하느님 아니 부처님 감사합니다."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따로 요청을 하지 않았는데도 내 좌석이 일인용 좌석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일인용 좌석은 옆좌석이 없어서 양옆의 손잡이를 모두 사용할 수 있었고, 앞뒤 좌석과도 여유가 있어 편하게 뒤로 누워서 갈 수 있다는 엄청난 장점이 있었다. 절대 휴식이 필요한 나 같은 사람에게 안성맞춤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좌석은 사람들로 가득 찼고, 버스는 후진을 해서 여수로 출발했다. 나는 누구보다 편한 자세 누워 한 손으론 불독 주인들이 준 초콜릿을 들고, 한 손으론 볼록하고 튀어나온 배를 문질렀다. 마지막으로 남은 식량인 초콜릿까지 모두 먹으니 절로 눈이 감겼다. 그러다 '덜컹' 버스가 멈추는 충격에 눈을 떴는데, 여수 종합 버스터미널 간판이 보였다. 나는 3초 동안 눈을 감았을 뿐인데 3시간이 지나있었다.

 여수 종합 버스터미널에서 버스를 내리고 제일 먼저 문구점을 찾았다. 여행을 하면서 기록할 노트가 필요했다. 서울에서 출발할 때 넉넉하게 노트를 3권이나 샀는데, 여행이 끝나기도 전에 모두 사용해버렸다. 마지막 제주도에서의 여행을 기록할 노트를 사기 위해 문구점에 갔다. 미닫이 문을 열고 허름한 문구점에 들어가니 쾌쾌한 냄새가 났다. 오래된 문구점에는 노트의 종류가 많지 않았다. 내가 필요한 손바닥만 한 스프링 노트는 영국 국기 디자인이 전부였다. 여수와 영국이라니, 무슨 연관성이 있을까? 하고 생각해보니 내가 둘을 연결하고 있었다. 내가 영국에서 2년 동안 살았었고, 내가 여수에서 지금 여행을 하고 있었다. 보물처럼 발견한 노트를 사서 거리로 나왔다. 제주도로 배가 출발하는 새벽 1시까지는 아직도 4시간이나 더 남아 있었다. 버스에서 잠을 얼마나 잘 잤는지 더 이상 졸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온몸이 빳빳하고 근육이 삐걱거려 찜질방을 찾아봤다. 버스터미널 근처에 찜질방이 하나 있었다. 웬 떡이지? 하고 가보니 찜질방이 아니라 목욕탕이었다. 지금 내겐 목욕뿐만 아니라 간단하게 식사도 하고, 편하게 누워서 쉴 수도 있는 찜질방이 필요했다. 인터넷으로 조금 더 검색을 해보니 버스터미널과 여객터미널 중간 지점에 찜질방이 하나 있었다. 만들어진지 얼마 되지 않아 시설도 좋았고, 찜질방 안에서 야경을 볼 수도 있다고 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택시를 잡아서 찜질방으로 이동했다.


 택시에서 내리니 음침한 동네가 나왔다. 범죄 영화에서 마약을 밀반입하는 항구 같았다. 어두운 거리에는 종종 가로등만 보일 뿐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고, 항구에 정박된 배에서는 파도 부딪히는 소리만 들렸다. 주차장을 넘어 찜질방으로 걸어가는데 갑자기 '슈웅~' 하고 오토바이 한 대가 지나갔다. 순간 너무 놀랜 나머지 "사람 살려!" 하고 고함을 칠 뻔했다. 긴장을 놓지 못하고 찜질방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모든 가게의 간판은 물론이고 복도등도 모두 꺼져 있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찜질방 입구 3층을 눌렀다. 문이 열리자 밝은 조명이 쏟아져 내렸다. 선물 박스와 양말이 달린 크리스마스트리, 반지르르 광을 내는 깔끔한 바닥 그리고 창문 너머로 보이는 화려한 야경을 보자 안전한 찜질방이라는 사실에 마음이 놓였다. 직원에게 1일 숙박 이용권을 결제하고, 번호키와 찜질옷을 받아서 들어가려던 찰나. 다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3살 정도 아이의 손을 잡은 부부가 들어왔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무엇을 본 건지 잔뜩 겁에 질려 울기 시작했다. 귀신이라도 본건가? 싶었는데 아이는 의자에 앉아있는 곰돌이 인형을 가리키고 있었다. 부부는 아이를 진정시키기 위해 곰돌이 인형은 살아 움직이지 않는 '인형'이라고 소개했다. 아이는 조금은 안정이 됐는지 울음을 그쳤다. 그러나 여전히 인형을 보면서 경계를 하고 있었다. 보고 있던 직원이 곰돌이 인형을 창고로 집어넣었다. 그러자 아이는 찜질방에서 처음으로 미소를 짓고 로비를 폴짝폴짝 뛰어다녔다. 덕분에 그 자리에 있던 어른들도 덩달아 미소를 지었다.


 찜질방 안으로 들어가니 정말로 야경이 보였다. 매번 사방이 막힌 찜질방만 가다가 바다가 보이는 찜질방에 오니 아이처럼 신이 났다. 해안도로를 따라 건물들의 불빛이 별빛처럼 흐드러졌고, 바다에 비친 여수의 모습은 굵은 붓으로 그린 수채화처럼 역동적이었다. 제법 우아한 정취가 흐르는 찜질방 야경을 감상하고 목욕탕으로 들어갔다. 목욕탕에는 따뜻한 온탕이 3개 차가운 냉탕이 1개 있었다. 간단히 샤워를 하고 제일 뜨거운 온탕으로 들어갔다. 몸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워서 따가웠다. 뜨거운 열기에 늘어진 근육들이 부글부글 끓었다. 눈을 감으니 입에서 "아~좋다!" 하는 소리가 절로 났다. 그런데 20분 정도 지나니 오히려 가슴이 답답해졌다. 지금 바로 냉탕에 들어가면 답답한 가슴이 '뻥!'하고 뚫릴 것만 같았다. 냉탕에 들어가기 전에 찬물을 손에 담아 가슴에 적셨다. 물이 차가워 나도 모르게 발을 동동 굴렀다. 방금까지 온탕에 있었지만 냉탕에 들어가니 털이 스면서 소름이 돋았다. 그러다 시간이 지나니 몸이 찬물에 익숙해졌다. 머리까지 모두 물속에 집어넣고 수영을 했다. 온몸 구석구석으로 찬물이 밀려들어와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한참 동안 수영을 하고 나오니 배가 고팠다. 찜질옷을 입고 매점으로 갔다. 만두, 핫도그, 떡볶이 등 맛있는 음식들이 많았다. 그런데 내 눈에는 '왕뚜껑' 밖에 보이지 않았다. 넓은 뚜껑 위에 라면을 올려 두고 호호 불어 먹을 생각을 하니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창문을 바라보고 앉아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정수기 뜨거운 물로 만든 라면이지만, 면발 하나하나가 살아 움직이는 듯 고들고들했다. 종종 면발에 섞여서 올라오는 작은 건더기들은 식감의 재미를 더했다. 라면 특유의 짜고, 달콤한 맛이 머리까지 핑~하고 돌아 에너지를 만들었다. 같이 먹을 김치도 없었지만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뒤로 누워서 야경을 보면서 소화를 시키고 있는데, 갑자기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 새로 산 노트에 지금 생각나는 문장을 적어보고 싶었다. 특별한 문장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사물함으로 뛰어가 노트를 가지고 돌아왔다. 이번엔 앞으로 누워 노트에 글을 채워 넣었다.


제주도 가는 배 기다리면서
새로 산 노트에 낙서하기

한 글자, 두 글자 꾹꾹 눌러 담아
문장 하나를 완성하는 일을 재밌다.

특히 별생각 없이 아무 말이나
끄적끄적거리는 건 더욱 신이 난다.

모든 문장이 메시지를 담고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

쉬는 동안에는 정말 아무 의미 없는
글을 써보련다.



 글을 쓰다 보니 어느새 새해가 지나, 1월 2일 00시가 되었다. 출발 시간까지 딱 한 시간이 남았다. 여객 터미널로 이동하기 위해 카카오 택시를 불렀다. 카카오 택시는 1분 거리에 택시를 부르다가, 10분 거리의 택시를 불렀다. 그러다 "택시를 찾을 수 없습니다."라는 안내 메시지를 띄웠다. 몇 번을 다시 해도 택시를 찾을 수 없다는 메시지는 변하지 않았다. 조급한 마음에 직접 나가서 잡기로 했다. 밖으로 다시 나오자마자 실수란 걸 깨달았다. 지나다니는 사람도 없는 음침한 동네에 택시라고 있을 리 없었다. 찜질방 직원에게 콜택시 전화번호를 물어보려고 발걸음을 다시 돌리는데, 전조등을 켜고 달려오는 차가 한대 보였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다. 차 위에 모자를 달고 있는 걸 보니 택시가 분명했다. 반가운 마음에 아이처럼 폴짝폴짝 뛰면서 양손을 흔들었다. 택시가 멈추고 창문이 내려갔다. "이 시간에 여기서 뭐해요?" 아저씨는 의아한 표정으로 내게 물었다. "제주도에 가는 배를 타려고 찜질방에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근데 배가 출발할 시간이 30분밖에 안 남았네요." 나는 택시에 타서 긴급한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택시 아저씨는 10분이면 여객 터미널에 갈 수 있다고 말하며 헛웃음을 터뜨렸다. 나는 그제야 창문을 열고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즐길 수 있었다.


 여객 터미널에 도착하자마자 매표소로 달려갔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배로 들어간 것 같았다. 모바일 예약증을 보여주자 승선권을 출력해줬다. 여객 터미널에서 나오니 비닐로 만들어진 공간이 있었다. 직원들이 유니폼으로 보이는 두꺼운 패딩을 승객들을 기다렸다. 알고 보니 배를 타기 위해선 간단한 검문을 거쳐야 했다. 내가 직원에게 신분증과 승선권을 보여주자, 직원은 나를 위아래로 쓱~ 훑어봤다. 비행기 입국 심사처럼 긴장되진 않았지만 직원의 태도에 기분이 나빴다. 검문소를 지나니 골든스텔라호라고 적힌 배가 보였다. 배 앞에 서는 순간 크기에 압도당해 숨이 막혔다. 배가 얼마나 큰지 한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야 전체를 둘러볼 수 있었다. 200m 정도로 길게 늘어진 배의 옆면에는 네모난 모양의 창문이 줄을 지어 뚫려 있었다. 창문 너머로는 배 천장의 조명들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입구로 걸어가는데 배에서 진한 기름 냄새와 웅장한 모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인간의 기술이 얼마나 대단한지 새삼 실감했던 순간이다. 웬만한 오피스텔보다 큰 배가 바다 위에 떠있으니 말이다. 그러나 배의 입구로 들어가는 방법은 철로 만들어진 초라한 사다리 밖에 없었다. 심지어 사다리는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고, 발판 사이사이로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가 보였다. 5명만 올라 가도 부서질 것만 같은 사다리를 10명이 넘는 사람들이 올라탔다. 나는 조금이라도 몸무게를 줄여보기 위해 최대한 몸을 아래로 낮춰서 걸었다. 몸을 아래로 낮춘다고 몸무게가 줄어드는 게 아니라는 것은 나도 잘 알고 있었다.


 배 위로 올라가니 차들이 길게 늘어져 주차되어 있었다. 대형 화물차, 봉고 트럭, 승용차 그리고 오토바이까지 모든 바퀴에는 고정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잠가두면 바퀴가 움직이진 않겠지만, 심한 파도로 인한 미끄러짐을 방지하기 위한 용도 같았다. 대형 화물차 뒤로는 담배를 피우면서 수다를 떨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주차장 중간에 객실 입구라고 적힌 간판이 보였다. 안으로 들어가니 객실 입구로 올라가는 계단과 화물용 엘리베이터가 있었다. 평소라면 안전하게 계단으로 올라갔을 텐지만, 짐이 잔뜩 늘어난 캐리어를 들고 계단을 올라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화물용 엘리베이터를 타서 확인하니 객실 3층을 제외하고 선언 외 사용 금지라는 말이 붙어있었다. 얌전하게 3층 버튼을 누르니 문이 닫히고 천천히 올라갔다. 3층에서 문이 열리니 촌스러운 하늘색 바닥이 보였다. 로비로 넘어가는 복도 중간중간에는 개인 화장실이 딸린 1등급 객실이 보였다. 살짝 보이는 1등급 객실은 고시원만큼 작아서, 15만 원이 넘는 가격 대비 매력적이진 않다고 생각했다. 1등급 객실을 지나니 원형 모양의 로비가 나왔다. 간단한 과자와 음료를 파는 매점, 삼삼오오 수다를 떨거나 보드게임을 할 수 있는 휴게실, 승무원들이 지루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는 안내데스크까지 로비에선 다양한 편의시설을 운영하고 있었다.


 나는 로비를 건너 1등급 객실 반대편으로 넘어갔다. 2등급 객실이 보였다. 2등급 객실은 10명 정도 되는 승객들이 잘 수 있는 공간이었다. 골든스텔라호에는 2등급 객실이 총 4개가 있었다. 돌아보니 바다가 보이는 자리는 모두 사람들이 차지하고 없었다. 나는 로비에서 가장 가까이 위치해있어 비상시 빠르게 대피할 수 있는 2등급 객실에 자리를 잡았다. 객실 바닥은 오래돼서 바래진 빨간색 카펫이 깔려있었는데, 사람들은 개의치 않고 제집 안방처럼 누워있었다. 따로 제공하는 이불도 없어 두꺼운 잠바로 몸을 덮고, 중앙에 설치된 작은 TV를 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객실 구석에는 손자와 함께 누워 있는 할아버지도 보였다. 할아버지는 손자가 두발을 굴리면서 휴대폰으로 게임하고 있는 걸 구경만 해도 즐거운지, 종종 어깨를 들썩이면서 웃었다. 밖에선 '붕'하고 배가 출발하는 뱃고동 소리가 들렸다. 앞으로 7시간 동안 배를 타고 가야 하니, 나도 객실에서 편한 자세를 찾아야 했다. 먼저 캐리어에서 패딩과 수건을 꺼냈다. 수건을 돌돌 말아서 베개를 만들고, 패딩은 반대로 돌려 양팔을 집어넣고 바닥에 누웠다. 객실은 생각보다 더 불편했다. 오래된 카펫 때문이 아니라 딱딱한 바닥이 문제였다. 평생을 침대에서만 자다가 바닥에서 자려고 누우니 허리가 아팠다. 눈을 감고 있었지만 "과연, 내가 잠들 수 있을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게다가 배가 움직이기 시작하고 파도를 넘을 때마다 객실도 조금씩 넘실댔다. "뱃멀미하면 어떡하지?"라는 걱정까지 생겼다. 그러나 나는 배가 출발한 지 30분도 지나지 않아 객실에서 가장 먼저 잠든 승객이 되었다. 의문과 걱정이 아무리 대단해도 피곤함을 극복할 순 없었다.

 제주도에 도착하기 1시간 전, 추워서 잠에서 깼다. 일어나니 온몸이 찌뿌드드했다. 지금 이 상태로 더 자면 몸살이 걸릴 것 같았다. 차라리 배나 좀 돌아보는 게 좋겠다 싶었다. 3등급 객실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했다. 2등급 객실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가니 3등급 객실이 있었다. 3등급 객실에는 사람들이 빼빼로처럼 여유도 없이 빽빽하게 누워 있었다. 심지어 어느 3등급 객실에는 일부 사람들이 시끄럽게 게임을 하면서 놀고 있었다. 덕분에 같은 객실의 다른 사람들은 잠을 자지도 못하고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있었다. 2등급과 1등급 객실은 10만 원이 넘게 차이 나지만, 3등급과는 1만 원도 차이가 나지 않아서 2등급으로 예매했다. 시시한 여행 중에 결정한 최고의 선택이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2등급을 예약한 내가 너무 자랑스러웠다. 3등급 객실을 지나니 텅 빈 오락실과 노래방도 있었다. 노래방 건너편엔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이 보였다. 문을 열고 나가니 바다에서 강한 바람이 불어왔다. 객실에선 느껴지지 않았던 파도들이 밖으로 나오니 온전히 느껴졌다. 파도는 배 표면에 부딪혀 수도 없이 부서지고 있었다. 배는 그런 파도 위를 부드럽게 올라타 앞으로 나아갔다. 바다를 조금 더 생생하게 보고 싶은 마음에 안전대를 잡고 고개를 살짝 내밀었다. 부서지는 파도에서 흩날리는 물이 얼굴에 닿고, 얼굴에 닿은 물이 바람을 타고 날아가는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동시에 바다 아래로 떨어지는 아찔한 상상이 들어 다시 고개를 안으로 집어넣었다. 힘차게 넘실대는 선박 위에서 중심을 잡기 위해 안전대를 잡고 새벽 바다 풍경을 감상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보니 구름들 사이로 숨어있는 별들이 보였고, 지평선 너머로 태양이 떠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다. 새벽 바다 위에서 만큼은 별들은 달이 아니라 태양의 친구였다. 한참 동안 새삼스럽게 넓은 바다를 빤히 보고 있으니 나라는 존재가 참 작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다 위에선 사람도 한없이 겸손해졌다.

 바다 위의 하늘이 온통 붉게 물들고 나니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10분 뒤 제주도에 도착한다는 소식이다. 객실로 다시 들어가니 사람들이 분주하게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사람들의 표정에는 피곤함과 설렘이 동시에 묻어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불국사에서 제주도까지 도착하는데 20시간이 걸렸다. 3년 전에 시베리아 열차를 타고 러시아를 횡단했을 때도 오늘만큼 힘들진 않았다. 누군가 나에게 "배 타고 제주도 갈만해요?"하고 묻는다면 주저 없이 "아니요."라고 답할 것이다. 다음부터 제주도에 간다면 무조건 비행기를 이용하고 싶은 마음이다. 그러나 시시한 여행을 위해 배를 타고 제주도에 온 걸 후회하지는 않는다. 시시한 여행은 특별함이나 편리함을 바라고 시작하지 않았으니까, 오히려 사소함이나 불편함을 통해 잃어버린 감각이 살아나길 바랐으니까. 사실 오늘 배를 타보지 않았다면, 파도가 넘실대는 바다 위를 즐길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도 몰랐을 것이다. 그리고 비행기가 얼마나 편하고 안전한 교통수단인지도 지금처럼 실감하지 못했을 것이다. 멀리서 야자수 나무가 삐쭉삐쭉 피어난 섬이 보이기 시작하니, 가슴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 과연, 비행기를 타고 제주도에 왔어도 지금처럼 설레는 마음이 들었을까? 앞으로 제주도에서 펼쳐질 새로운 여정은 어떤 모양일지 궁금했다. 그리고 시시한 여행이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서도 종종 불편함을 찾아 산책을 떠나보고 싶은 마음이 몽실몽실 피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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