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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홍인표 Jun 19. 2024

화수분

돈도, 미안하다는 말도


문자를 잊지 않는다.

-미역국 못 끓여 줘서 미안해. 밥 챙겨 먹어.-

-엄마도 애 낳느라 고생했어. 밥 챙겨 먹어.-


내 생일은 공휴일 다음 날이다. 하루를 쉰 다음날이라 친구들이 곧잘 잊어버리는 생일이다. 어려서부터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 게 내심 좋았다. 친구를 집으로 초대해 생일파티를 할 형편도 아니었고, 선물을 주고받는 것도 부담이었다. 자존심이 상해 말도 못 하는데 생일 전날이 빨간날이라 차라리 아무도 모른 채 지나가는 게 다행이라 여겼다.


다 커서는 대체휴일제가 생기는 바람에 생일이 공휴일과 묶여 황금연휴로 지나가기도 한다. 요즘은 나를 낳느라 애쓴 엄마에게 전화를 드리는 날 정도가 되었다. 이마저도 아직 생일을 잊지 않고 챙겨주는 엄마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딸자식이 마흔이 훌쩍 넘었는데도 생일날 아침, 엄마의 문자는 아직도 미안하다는 말로 시작한다.

매사 뭐가 미안하다는 것일까.

그만큼 해줬으면 됐지, 뭘 못 해줘서 맨날 미안하다고 할까.


_

"내가 OOO 아버진데 그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닌가."

요 며칠 시끄러운 유명인의 아버지 인터뷰를 보았다. 부모의 노력과 희생으로 만들어진 자식의 성과라지만 경험해 보지 못한 부모의 당당함에 생각이 많아진다. 늘 미안하다고 하는 부모보다 당당하게 요구하는 부모가 더 나을 수도 있겠거니, 겪어보지 못해 꽃 같은 상상도 해본다.



"마음에 드는 거 골라."

"그냥 가자. 엄마는 필요한 게 없고, 마음에 드는 것도 없어."

"제발! 이러는 게 날 더 힘들게 해. 그냥 이거 사달라, 이게 마음에 든다, 말을 해. 그게 날 돕는 거야."

"뭐 하러 돈을 써. 필요한 게 없는데."


딸네 집에 들렀다가 돌아가는 고속버스 터미널 백화점에서 어김없이 실랑이를 한다. 개중 제일 깔끔하고 좋은 옷을 골라 입고 왔을 테지만 구질구질한 꼴이 보기 싫었다. 보란 듯이 백화점 옷을 사주고 싶었던 건데 자식 돈 쓸까 봐 이것도, 저것도 싫다고 하니 진이 쏙 빠지고 만다.


-나는 자식이 생기면 당당하게 이거 사달라, 저거 먹고 싶다, 말해야지.-

보고자란 게 빤해서 남한테조차 뭘 사달라고 하지도 못하면서, 낳아본 적 없는 자식에게 으름장 놓듯 다짐했다.


_

유명인의 아버지가 자식의 능력 덕분에 당당하게 일을 벌이고, 돈도 썼을 테다.


그래서 엄마가 내게 미안하다고 말하는 게 되레 미안해진다.

내가 잘 났으면, 잘 되었으면,

엄마가 미안하다는 소리 대신 당당하게 돈도 쓰고 하고 싶은 일도 마음껏 했을 텐데,

나도 미안하고 엄마도 미안한 삶이다.


돈 문제로 속상한 유명인의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가족만큼 지긋지긋한 족쇄도 없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살이 썩어 떨어져 나갈 때까지 견뎌도 겨우 끝날까 말까 한 고통.


그런데도 오늘은,

내게 엄마가 막 가져다 쓸 돈이 많았으면, 그냥 자식 돈이나 쓰면서 편하게 살게 해드리면 얼마나 좋을까,


날이 더워 하나 마나 한 쉰밥 같은 생각을 해본다.




사진 출처: 구글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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