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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무드 Feb 22. 2024

Ep.12 엄마와의 휴전선, 지뢰는 그에게서 터졌다.

7년 연애 종료.



전세 2년. 계약을 끝내고 나는 생각보다 빨리 적응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기도 하지만, 나한테 선택지는 없었다.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이 방법이 차선책이었다. 엄마의 자살시도를 여러 번 목격한 내가 엄마랑 떨어져 산다는 건, 불안 그 자체였지만 한 편으론 당장 오늘 부딪힐 분쟁 같은 건 없으니 평화로웠다. 27년 만에 처음 혼자 살아본 거라 동네도 어두컴컴하고 편의점 하나 없었다. 커튼을 열면 밖에서 집 안이 훤히 보였고 방음도 잘 되지 않아 앞집 옆집 소리까지 다 들렸던 터라 적응하기까지 몇 개월은 극도의 불안을 느꼈었다.


의지할 곳이 필요했다. 혼자 살아본 건 처음이라 장거리 연애 중이었던 남자친구에게 자주 전화를 걸었다. 엄마와 해소되지 않은 감정은 잘 들춰보지 않았기에 늘 앙금같이 남아있었고, 회사에서 쌓인 스트레스부터 정리되지 않은 감정들이 복잡하게 얽혀 남자친구에게 터트리곤 했다.


힘든 일과 부정적인 요소들은 한 번에 쓰나미처럼 몰려오지 않나. 그 해, 나는 7년 사귄 남자친구와 이별마저 겪었다. 결핍된 감정들을 그에게서 채워지길 원했고, 내가 싫어하고 기피하던 엄마의 행동을 그에게 하고 있었다. 그의 입에선 이별얘기와 함께 사회생활을 못하는 사회 부적응자라는 말까지 나왔다. 인과응보, 내로남불, 업보 모든 것이 터져버렸다. 지뢰였다. 그 당시 남자친구도 타지생활 2년 차였고, 나의 투정이 그에겐 짐이었을 수도 있었다. 그의 입에서 나오는 이별선고는 진심이었다. 7년 연애가 그렇게 종료됐다.


견딜만했다.

아무렇지 않았다. 나를 이끌어주길 바랐지만, 그럴 사람이 아니란 걸 좀 일찍 느꼈던 터일까. 생각보다 그렇게 아프지 않았다. 모든 연락망을 차단했다. 뒤돌아보지 않았고, 정말 잘 지내길 바랬다. 진심으로 잘 되길 빌었다.


그렇게 서로 잘 지낼 것만 같았다. 한 달 후 그는 계속 친구를 통해 연락을 하거나, 걸쳐있는 지인들을 통해 내게 안부를 전했다. 다시 재회하고 싶지 않았다. 너무 오래 사귀었다고 생각했고, 지금 헤어짐은 서로 각자의 길로 갈 수 있는 기회일 거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도 만나봤다. 사귀기로 했지만, 다른 사람과의 새로운 시작은 쉬운 일은 아니었다. 줄 곧 헤어짐을 통보받았다. 이유인 즉, 넋이 나간 사람 같다던가 혹은 본인들을 좋아하는 느낌을 못 받겠다는 이유였다.


혼자 지낼 시간이 필요했던 걸까. 7년이라는 시간은 쉽게 지워지진 않았다. 가슴이 아프거나 슬프거나 이별의 아픔 같은 것들과는 다른 결이었다. 그의 부재는 이상한 감정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는 더 이상 연락이 없었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다시 한번 느낄 때쯤 내 생일이었다. 차단해 둔 그의 연락처를 다시 차단목록에서 마저 지우고 정말이지 남이 되었구나를 체감할 때쯤 문자 한 통이 왔다.


’ 생일이네, 매년 챙겨줬는데 이젠 챙겨줄 수가 없구나. 잘 지내고... 생일축하해 ‘라는 문자를 보고 처음으로 오열하며 울었던 것 같다. 이 문자에 답장을 하지 않으면 정말 끝이었다. 고심 끝에 한 번은 만나야 되겠다 싶어서 마지막으로 한번 보자고 보냈고 그는 3시간에 걸쳐 우리 집으로 왔다.


7년의 시간은 종료되지 않았다. 서로 몇 달간의 이별기간을 겪고 조금은 달라진 태도로 서로를 대해보자 했다. 서로가 정말 맞는지, 우리는 결혼을 할 건지. 안일했던 사이를 조금은 구체적으로 대해보자는 결론을 냈다.


독립 후 싱숭생숭했던 마음도 잔잔해지고, 그와의 재회도 조금은 단단해지며 평온해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안 좋은 일은 한 번에 몰려오듯 그의 아버지의 투병소식을 듣게 된다. 간암 4기 선고를 받으셨다고 한다.


만감이 교차했다. 아버지를 뵌 적이 몇 번 있었다. 늘 환한 웃음으로 맞이해 주셨고, 늘 환대해 주셨던 모습. 누룽지를 잘 먹는 나를 위해 내가 그의 집에 놀러 갈 때면 늘 누룽지를 쟁반 가득 구워주셨던 모습, 부산에 오면 늘 회를 사주셨던 아버지의 모습, 부산역에 도착하기 전엔 늘 그에게 차키를 건네주시며 주희 데리러 차 타고 가라고 해주셨던 모습, 한 번은 같이 저녁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미숙한 요리실력으로 떡국을 끓여드렸는데 맛있게 드셔주셨던 모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병문안을 갔다..

할아버지가 떠나시기 전에 모습과 냄새가 비슷했다.


아버지에게 인사를 했지만, 늘 반겨주시던 모습은 볼 수 없었고, 나는 그에게 어쭙잖은 위로보단 아버지 손 많이 잡아드리고 사랑한다고 말해드리고 많이 안아드리고, 못했던 얘기들을 해 드리라고 말해주었다.


사랑하는 아버지를 보내드린다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이고, 아픔이기에 내가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그 말뿐이었다.


그는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씀드렸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 해, 그 날에 떠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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