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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무드 Feb 25. 2024

Ep.13 죽음도 사랑으로 환원될 수 있나요?

슬픔도 잠시, 곧바로 현실, 그리고 동거 시작


01

삶과 죽음, 사랑과 이별 그 대척점 사이에서의 무수한 생각들에 대해 고민해 보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온전히 보내줄 수 있을까.

온전히 이별하지 못하더라도 그 사람의 선택을 온전히 응원할 수 있을까.


할아버지를 보내드린 지 1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아직 죽음이라는 것이 낯설다.

아버지를 보내드릴 때도 그랬다.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면서 알게 된 건 시간은 그 어떤 가치보다 귀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의 유한함을 자꾸 잊어버린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들과 내일도 함께일 거라는 믿음. 그 믿음이 주는 착각 속에서 하루를 보낸다. '영원한 건 절대 없어'라는 노래 가사를 자주 흥얼거리면서도 또다시 영원을 믿는다. 이별을 마주하게 될 날이 오늘은 아닐 거라며 애써 외면하던 죽음이 기어이 내 앞으로 찾아왔을 때, 할아버지의 영정 사진을 보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더라. 조금 더 자주 찾아뵐 걸, 짬을 내서 전화라도 드릴 걸, 명절 때 방에 틀어박혀 핸드폰만 하지 말고 말동무가 되어드릴걸. 그 후회들은 내 안의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나의 목구멍을 깊숙하게 찌르곤 했다.


이렇게 아이러니하게도 우리는 매번 죽음을 목전에 앞두고서야, 혹은 그것과 얼굴을 마주해야지만 지나가버린 일상의 소중함을 떠올린다. 삶의 기반에는 언제나 죽음이 깔려있음을 깨닫게 된다.


내일이 아닌 '오늘'을 좀 더 잘 살아보기 위해 내가 원하는 것에 솔직해지게 되는 것. 오늘을 담보로 삼아 보장할 수 없는 내일을 대출받는 삶, 그 안에서 손발이 꽁꽁 묶인 채 오늘을 낭비하지 말기. 영원한 헤어짐을 겪고 난 후 내가 느낀 것 들이다.


나에게 아버지와 다름없었던 할아버지, 그에게도 무뚝뚝하고 표현하지 못했지만 세상에 둘도 없는 아버지를 떠나보내고 난 뒤,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서로를 위로할 수 있는 무언가가 더욱이 단단해지고 돈독해졌다. 가장 힘들 때 옆에 있어 준 사람과 평생 함께 한다면, 그 슬픔이 사무칠 때 의지가 되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스쳤다. 그와 재회를 하게 된 시기도 아마 첫 만남 때처럼 이미 정해진 인연이 아닐까라는 생각도 해봤다.






02

우리는 재회하고 2년 정도 서로에 대해 신중히 생각했다.

그렇게 그와 만난 지 8-9년 차. 우리는 ‘동거’라는 카드를 꺼냈다. 자세히 말하자면, 나의 첫 독립기간 즉 전세 2년 계약이 끝나고, 나는 현재 집에서 재계약을 할지 아니면 재건축하는 곳에 들어가서 2년 더 살다가 내 이름으로 구매한 집 재건축 공사가 끝나면 들어가 살지 고민이 많았다. 다른 대안으로는 그가 살고 있는 타지에서 함께 동거를 해보다가 결혼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장거리 연애가 너무 힘들었어서 그와 살아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와 같이 살아보고 결혼이 아닌 거 같으면 발을 뺄 생각이었나. 아니면, 엄마집 근처에선 살기 싫으니 타지에서 좀 살다가 다시 올라오고 싶었나. 그 당시엔 조금 더 이기적인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결론은 그와의 동거를 택했다. 엄마와 아빠는 나의 결정에 몇 날 며칠 동안 듣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자취방 앞에 한 카페에서 몇 시간 동안 얘기를 했다.


‘동거라는 건 말이다. 책임감 없는 어린애들의 행동이다. 네가 그 친구와 헤어지게 되면 너에게 따라다닐 꼬리표 같은 게 될 것이고, 결혼도 안 했는데 책임져야 할 일이 생기면 꼴이 우스워진다. 어른들의 시선에선 이혼녀 못지않은 꼬리표를 달고 다니게 될 거다. 차라리 결혼을 해라. 아니면 조금 더 사귀다가 헤어져라.’라는 얘기들이었다. 왜 동거를 나쁘게만 생각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 또한 생각보다 보수적인 면이 강하지만 내가 평생 살 사람을 결정할 때 동거 또한 사람을 알아볼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엄마를 설득하기보단 난 무조건 하고 싶어라는 자세로 임했었다.


자식이기는 부모가 없다고 하던가. 엄마의 얼굴엔 걱정이 가득했다. 하지만, 나는 외면했다. 별게 아니라고 생각했고 연애의 연장선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엄마가 허락한 건 아니지만, 그의 어머니랑 식사자리를 하고 싶다고 내게 말했다. 엄마는 딸 보내면서 자식 내놓고 키운다는 소리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그때 느꼈다. 내 엄마가 맞구나.. 결혼을 한 건 아니지만 그때 조금 엄마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동거를 하기로 마음먹었고, 결혼은 아니지만 다 큰 성인 남녀가 동거라는 걸 한다고 하니 부모님끼리 만나서 미니 상견례 같은 자리를 마련해 달라고 하셨다. 대구에 한 호텔에서 양가 어머니들과 우리 둘넷이서 자리를 함께 했다.


엄마가 먼저 운을 띄웠다. 결혼을 전제하에 이 아이들이 같이 산다고 합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대화를 시작으로 둘이 그렇게 하겠다니 믿어줍시다. 단, 결혼을 전제하에 하게 되면 너희가 살 집은 어떻게 마련하겠느냐 라는 얘기부터 어머니 입에선 갑자기 혼수는 어떻게 할 거냐라는 얘기가 나왔고, 엄마는 얼굴을 붉히셨다. 동거 얘기에서.. 집은 우리가 알아서 반반씩 내고 살아보겠다고 하는 얘기에서 혼수는 어떻게 할 거냐라는 어머니의 발언은 그를 포함에서 모두를 당황시켰다. 그 말 한마디에 엄마는 기분이 많이 언짢으셔했고, 나도 그에게 무슨 소리인지. 따질 틈도 없이 유야무야 자리가 끝나버렸다.


어머니 말인 즉, 결혼을 전제하에 동거를 한다고 했는데 추후 결혼을 하게 될 경우 집은 옛 방식처럼 남자가 하고, 여자가 혼수를 해오는 건지, 아니면 반반씩 할 건지에 대해 물으셨던 거 같고, 엄마와 나 그리고 그의 입장에서 들었을 땐 혼수 해와라라고 해석한 꼴이 되었다. 아직도 어떤 취지에서 그렇게 말씀하신 진 모르겠지만, 아마도 내가 겪어온 바. 말 주변이 없으시고 생각나는대로 말하시는 성향이 있어서, 전자의 내용이 맞을듯하다.


결론은 우리는 우선 그의 원룸 계약일까지 그 집에서 지내다가 전세를 구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 사이 우리는 결론을 내렸다. ‘결혼’을 하기로. 양가 부모님께 결혼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천천히 결혼식 준비를 해보자라는 얘기가 나왔고, 그의 집도 만기가 다가오고 있었기에 우리는 집을 구하러 다녔다.


하지만 타지에서 집 구하기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부산에서 평생 살던 그와 경기도에서 평생 살던 우리가 전세사기가 판치는 판국에 집을 구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주로 회사가 끝난 후 집을 보러 다녔는데, 이상한 매물만 보여주고 수다만 떠는 부동산 사무실 아줌마, 아니면 설명은 안 하고 돈에서만 맞추어 현관문만 턱! 열어주는 부동산 아르바이트생 혹은 매물을 보고 갔는데, 허위매물을 올려둔 공인중개사 등 집 구하는 일이 이렇게 힘든 건 줄 몰랐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엄마에게 SOS를 청했고, 엄마가 내려와서 집을 보러 같이 다녀주셨다. 엄마가 내려오기 전 2군데 매물을 알아봤었고, 엄마가 내려오고는 부동산 여러 군데를 더 갔었다. 전세사기가 판치는 시기에다가 재개발 재건축 얘기로 온 동네가 시끌시끌한 데다가 집 값은 거품이 끼기 시작할 시기였다. 주택담보대출 이자는 고정금리는 없어지고 있을 시기에 이자 또한 금리가 매우 높았다. 또 나는 주택 한 채를 보유하고 있어서 신혼부부 LH도 해당이 안 되고 전세를 구하려 했지만, 결국 그의 명의로 집을 구매하기로 했다.


27년 정도 된 주공아파트 18평 방 두 개, 화장실 1개 집을 찾았다. 그의 앞으로 집 대출을 받게 될 경우 고정금리 3%대 대출도 가능했다. 회사도 가깝고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난다고 해도 출퇴근 거리가 꽤 괜찮은 곳이었다. 그렇게 구한 집은 우리의 신혼집이 되었다. 1.5룸 원룸에서 18평 아파트로 가게 된 우리는 장족의 발전이었다. 그 집을 계약하고 기분이 이상했다. 이제 정말 결혼을 하는 거구나.


계약이 완료되고 이때부터 엄마의 컨트롤하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집을 구한 건 맞지만, 그 후 뭐부터 해야 할지 하나도 몰랐다. 리모델링 일정을 잡는 것부터 이사일정을 잡는 순서며 견적 내는 법 등 아무것도 찾아보지도 못하고 부동산 사장님한테 근처 벽지집, 화장실 공사, 싱크대, 샷시 등 전화번호 한 개씩만 받아서 배팅하듯 공사를 시작했다. 뭐 하나 아는 게 없으니 매일 엄마랑 전화를 했고, 자재는 뭘 써야 한다. 창문은 로이유리 8T여야 한다. 제대로 한 게 맞느냐 등 전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리모델링 공사는 마감이 되었고, 75% 정도 만족한 집에 페인트 공사.. 마감처리 등 몇몇 마감이 맘에 들지 않는 곳이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들어왔어야 했다. 며칠 뒤 엄마는 냉장고, 공청기, 세탁기, 건조기 등의 혼수(?)를 보내주셨다.


이게 결혼인 건가. 나는 갑자기 효녀가 되었고, 그는 얼마를 썼고, 나는 얼마를 엄마가 해줬는지 계산적이게 되었다. "엄마가 이거 이거 저거 사줬으니까 얼마, 이 집에 들어간 것까지 하면 이 정도가 내쪽에서 더 쓴 거군!" 이렇게 말이다.


결혼에 있어서 5:5는 없는 거 같았다. 딱 절반을 하려면 적어도 우리가 모아둔 돈에서 했어야 했다. 쥐뿔도 없이 몸만 내려오다시피 한 나는 나의 결정은 없이 주로 엄마와 그의 결정대로 대부분 일어났다. 우리의 싸움도 여기서부터 일어난 듯 했다. 대부분 이 시기에 겪는 일이라지만, 막상 겪어보니 기분도 마음도 모두 별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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