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일럿> 리뷰
“안녕하세요. 한정미입니다!” 여장을 한 조정석이 이 말을 하는 순간! <파일럿>을 향한 관심도 커졌다. 한 미모(?)하는 조정석의 모습과 연기에 대한 기대뿐만 아니라, 오랜만에 만난 여장 남자 코미디 영화라는 점에서 올여름을 기다리게 만든 것. 물론, 기존 여장 남자 코미디 영화와 별반 다르지 않을 듯한 기시감은 여름 성수기에 이륙하려는 영화의 불안 요소! 하지만 이륙한 영화를 만나보니 기시감 미탑승! 대신 다른 요소들이 착석했다.
최고의 비행 실력 보유자, <유 퀴즈 온 더 블럭>까지 출연할 정도로 인기 고공행진 중인 항공 조종사 한정우(조정석). 하지만 올라갈 때가 있으면 내려갈 때가 있는 법. 직장 술자리에서 여성 차별적 발언을 한 그는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다. 다른 항공사에 문을 두드려봐도 블랙리스트에 오른 그를 뽑아주는 항공사는 없다. 설상가상으로 이혼까지 하고, 모아둔 돈도 다 떨어져 가는 신세. 하는 수 없이 이찬원 성지순례를 다니느라 바쁜 엄마(오민애)와 뷰티 크리에이터로 활동하는 여동생 한정미(한선화)에 집에 들어간다. 그러던 어느 날, 한 항공사에서 성 비율에 맞춰 파일럿을 채용한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지원서를 낸다. 이름은 한정미, 성별은 여성, 직책은 부기장으로. 며칠 후, 1차 서류 합격 소식을 들은 그는 여동생의 도움으로 남성이 아닌 여성으로의 가짜 삶을 시작한다.
<파일럿>은 두 개의 엔진을 갖고 있다. 그중 하나는 여장 남자 코미디다. 잘 나가던 조종사가 말실수로 추락한 후, 여동생의 이름과 신분을 빌려 재취업에 성공했지만, 자신의 신분을 들키지 않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 자체가 재미를 전한다. 일하기 위해서는 여성으로 살아야 하는데, 고초가 여간 많은 게 아니다. 여자 화장실에 가야 하는데, 남자 화장실에 가는 건 기본, 한정우로 살았던 말투와 기억, 행동들이 기어이 표출되고, 동기이자 워맨스를 이루는 윤슬기(이주명) 등 자신의 비밀을 숨겨가며 연명하는 한정우의 모습은 웃음을 자아낸다.
여기에 젠더 이슈를 통한 웃음도 첨가된다. 한정미라는 여성으로 살려고 마음먹은 그가 가장 참지 못하는 건 바로 사회적 편견에 알게 모르게 여성을 비하하는 언행, 성희롱까지 당해야 하는 등 남성이었을 때는 전혀 문제기 안되었던 부분이다. 육사 후배이자 함께 비행기 운행을 해야 하는 기장 서현석(신승호)과의 에피소드는 이를 잘 그린다. 남자인지 모르고 한정미에게 추파를 던지는 상황 자체가 주는 재미는 물론, 이를 벗어나기 위해 한정우의 다소 과격한 타파 방법이 웃게 만든다. 이 터프한 모습에 더 빠져드는 서현석의 모습에 그 웃음은 배가 된다.
이런 서사적 구조와 코미디 작법은 <파일럿>만의 장점은 아니다. 영화의 원작인 스웨덴 작품 <콕핏>은 물론, <투씨> <미세스 다웃파이어> 등 여장 남자 코미디 계보를 잇는 작품에서 숱하게 봐왔던 부분이다. 선배 격인 영화들과의 차별화 포인트를 가져가야 하는 건 <파일럿>의 운명. 연출을 맡은 김한결 감독은 이 코미디 장르에 좀 더 깊숙이 파고드는 젠더 이슈와 캔슬컬처를 포함한 소셜미디어 폐해를 가져온다. 이는 <파일럿>의 두 번째 엔진으로서 그 역할을 다한다.
앞서 소개한 듯 영화는 남성에서 여성의 삶을 사는 한정우를 통해 여성들이 겪는 사회적 고초를 투영한다. 비록 코미디라는 장치로 활용될 때도 있지만, 극이 후반부로 갈수록 단순히 휘발되는 게 아니라 묵직한 풍자 요소로서 그 역할을 제대로 한다. 기장은 남성, 부기장은 여성으로 대변되는 직업의 성 우위, 여성을 직업의 숙련도와 포부가 아닌 외모로만 평가하는 사회적 잣대 등 반복되는 젠더 이슈는 점점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여기에 SNS로 대변되는 소셜미디어의 폐해도 중요한 역할은 한다. 핵인싸로서 살아가는 한정우의 삶은 빛 좋은 개살구다. 사회적인 지위와 면모에만 중점을 뒀기 때문에 가족도 그리고 비행기 조종을 좋아했던 자기 자신도 잊고 산다. 진짜 자신의 이름과 성을 가린 채 여성으로 변장해 살아가는 건 어쩌면 과거 진짜 한정우가 아닌 핵인싸 한정우의 삶을 지향했던 그의 과거 모습과 겹친다. 어쩌면 한정미로 살아가는 삶은 예전의 과오를 오롯이 체감하는 형벌처럼 느껴지고, 자기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는 과정으로도 보인다.
소셜미디어의 폐해 대상은 한정우만이 아니다. 진실은 중요하지 않고 화려한 모습에만 현혹되어 반응을 보이고, 어느 순간 자신의 생각과 달라져 팔로우를 취소하고 비판하는 일반 대중의 캔슬컬처 행태도 꼬집는다. <가장 보통의 연애>를 통해 뜬소문으로 사람을 판단하고 평가하는 세태를 멜로 장르로 보여줬던 김한결 감독은 이번엔 코미디 장르로 전작과 유사한 현대인들의 행태를 꼬집는다. 이런 부분으로 인해 <파일럿>은 기존 여장 남자 코미디와의 차별화를 가져가면서도 젠더 이슈, 소셜미디어 폐해 등 현시대의 세태를 반영하는 풍자극으로서 그 소임을 다한다.
두 가지 엔진은 가열차게 움직이지만 그 균형감을 유지하는데 공을 들이다 보니 웃음의 강도와 풍자의 깊이는 다소 아쉬움이 남는다. 난기류를 만나는 것처럼, 태생적으로 지닌 풍자의 메시지가 다소 무거워 간혹 마냥 웃을 수 없는 장면들을 마주하게 되고, 이로 인해 코믹함이 계속 연결되지 못한다.
그럼에도 한 번 이륙한 영화가 안전하게 착륙할 때까지 관객을 사로잡는 건 역시나 조정석이다. 이 역할을 과연 누가 할 수 있을까. 천연덕스럽게 1인 2역을 오가며 웃음을 유발하는 건 물론, 앞서 소개한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다리 역할을 말끔하게 소화한다. 웃음을 줬다가 뺐다 하는 밀당의 고수처럼, 관객을 들었다 놨다 하는데, 남녀노소 누구나 이 영화를 무난히 즐길 수 있는 건 조정석의 힘이라고 본다.
극 중 한정우를 도와주는 여동생 역 한선화는 든든한 지원군이다. 현실남매 포스를 보여주면서 말 맛 제대로 살리는 티키타카 파트너로 극을 살린다. 여기에 이 남매의 엄마 김안자 역의 오민애의 연기도 뒤지지 않는다. 이찬원을 향한 덕심으로 똘똘 뭉친 중년 여성 역을 입체감 있게 그리는데, 핸드폰 받는 자세부터, 말투, 팬덤에 사로잡혀 열정을 바치는 이들의 모습 등 포인트 마다 코믹과 감정 연기를 임팩트 있게 보여줘 몇 장면 나오지 않음에도 기억에 남을 정도다.
<파일럿>은 코믹 판타지다. 설정 자체부터 말도 안 되는 웃음이 그득하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단순히 팝콘 무비로 소비하기엔 아쉽다. 한정우 또는 한정미를 통해 보여준 이야기가 그리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도 한정우처럼 남에게 보여주는 것만 신경 쓰다 자신을 잃어버린 채 비행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다 난기류를 만나 추락하기 전 이 영화를 보고 자신을 돌아보는 건 어떨까. 일단 신나고 쓰디쓰게 웃으면서!
평점: 3.5 / 5.0
한줄평: 여장 남자 코미디로 이륙했다 사회 풍자극으로 착륙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