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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찐주언니 Jan 17. 2024

나에게 아무것도 남은 게 없는 하루

그럼에도 수고했다!

일주일중에 하루만 아무 일도 안 할 수 있다면, 주부에게도 휴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어디 가서 우리 엄마는 집에서 논다고 하지 마! 내가 세상 젤 듣기 억울한 말이니까."

우리 집 누구도 나에게 "엄마는 집에서 놀잖아"따위의 말을 한 적도 없는데도 나는 가끔 아이들과 남편 앞에서 이렇게 얘기하곤 한다. 이 말을 하는 날은 너무너무 바빴고 지쳤고 힘들었는데 나에게 남은 거라곤 하나도 없는 그런 날이다. 그리고 바로 오늘이 그날이다.


저녁형 인간인 나는 어제저녁부터 새벽 1시까지, 집 치우고, 운동하고, 영어공부를 하다가 늦게 잠들었다. 워낙 12시는 넘어야 자는 사람이다 보니 다음날 아침 애들 도시락 싸는 게 늘 버겁다. 7시간 이상은 자고 싶은데 이리저리 뒤치락하다 보니 오늘도 겨우 5시간 조금 넘게 잤나 보다. 6시 50분 알람에 맞춰 눈을 겨우 뜨고 내려와 도시락을 쌌다. 막내는 맵지 않게 볶음밥, 첫째와 둘째는 어제 먹고 남은 닭갈비로 볶음밥. 메뉴가 볶음밥이라 좋아하지 않을 테지만 배가 고프면 알아서들 먹겠지..


늦지 않게 도시락을 싸고, 애들을 깨워 준비시키고 미리 시동 걸어놓은 차에 태웠다. 남편이 아직 퇴근을 하지 않아서 오늘은 내가 라이드를 해야 하는 날이다. 매일 같은 시간 7시 50분에 집에서 학교로 출발한다. 늘 같은 시간에 출발하는데 오늘따라 왜 그리 차가 많은지 겨우겨우 시간에 맞춰 학교에 도착했다. 늦는걸 너무도 싫어하는 첫째는 후다닥 가버리고, 둘째는 느긋하게 가고, 막내를 차에서 내리는데 책가방?? 왜 없지??

막내 책가방은 항상 내가 차에 싣는데 바로 장 보러 갈 생각에 책가방을 문 앞에 두고 온 게 이제야 생각이 났다. 집에 오는 중인 남편한테 전화 걸어 막내 책가방 좀 학교로 갖다 달라고 부탁하고 막내만 교실에 후다닥 넣고 다시 차를 탔다. 오늘 아침 바깥온도 영하 20도. 이번주는 쫌 위니펙 답네. 


시동을 걸고, 히터를 빵빵히 틀고 나는 바로 월마트로 향했다. 잠이 덜 깼는지 가까운 길을 두고 삥 둘러서 가는 나. 나 여기로 왜 온 거니..? 왜 하필 이 길로 온 거니..? 아침부터 피곤하다 피곤해..

금방 갈 거리를 오랜 시간 걸려 도착한 월마트. 주차를 하고 이것저것 장을 봤다. '여기에 없는 물건은 슈퍼스토어에 가서 사야겠군. 일단 근처 코스코부터 가자.'

계산하고, 다시 차를 타고 5분 거리 떨어져 있는 코스코로 향했다. 주차장에 주차를 하고 내리려는 순간 생각난 내 코스코 카드. '아... 어제 남편이 갖고 갔다..'

다시 남편에게 전화를 걸어 막내 가방은 갖다 줬냐. 어디냐. 집에 가는 길에 코스코 들려서 나에게 카드를 주고 가지 않으련? 물으니 그렇게 하겠단다.

주차장에서 남편을 만나 코스코 카드를 받아 들어가 장을 봤다. 장본 것들을 차에 싣고 보니 겨우 두 군데 들렀는데 오늘은 제법 많은 것들을 샀다는 생각이 든다. 트렁크가 이미 꽉 찬 걸 보니..

이제 마지막으로 슈퍼스토어에 들리자. 주차장에 들러 주차를 하고, 장을 보고, 계산하고, 차에 싣고 집으로 가는 길. 슈퍼스토어가 마지막이 아니었어. 진짜 진짜 마지막으로 집 바로 앞에 마트 하나만 더 들러야지. 

주차하고, 고기사고, 계산하고, 차에 싣고, 집으로 왔다. 4군데의 마트를 들렸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집에 오자마자 장본 것들을 전부 집 안으로 들여서 냉동고, 냉장고, 팬트리에 하나하나 채워 넣는다. 그러는 동안 내 눈에 계속 들어오는 오늘 아침에 못한 설거지들. 하아.... 일단 짐정리부터. 

장본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세탁실 앞을 지나는데 어제 건조기에 돌려놓고 차마 개어놓지 못한 빨래들이 산처럼 쌓여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그 옆에 오늘은 꼭 다리미질을 해야 할 빨래들도. 하아...

정리는 일단 대충 했으니 빨래부터 개자. 수건이 없다. 사람이 다섯 명. 그래서 빨래가 산을 이루었다.


한숨이 계속 나온다. 벌써 시간은 11시 30분이 넘어가는데 장 보다가 길에서 사 먹은 커피 한잔이 전부다. 배가 너무 고픈데 겨우 나 하나 위해서 밥상 차리긴 싫지만. 라면 같은 거 말고 밥을 먹고 싶은데 먹는다면 뭘 먹지.. 시간은 될까.. 졸리고, 피곤하고, 일은 많고, 시간은 계속 흘러간다. 눈물이 날 거 같다. 집안일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잠깐 앉아서 쉴 시간도 내겐 허락되지 않는 걸까. '지금 이거 말고도 할 일이 태산인데 영어공부를 하는 게 말이나 되냐고. 앉아서 영어공부할 시간이 있다는 게 말이나 되느냐고. 나 혼자 하루가 30시간이 아닌데!?!' 내가 계속 한숨을 푹푹 쉬면서 빨래를 개니까 남편이 잠도 안 자고 설거지를 해준다. 밤근무를 끝내고 왔기 때문에 얼른 자야 할 텐데 잠도 못 자게 하는 마누라인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설거지를 끝낸 남편은 아침도 못 먹고, 점심도 못 먹고 일단 잠을 자러 들어갔다. 벌써 12시가 넘었다. 어제 먹고 남은 국과 밥으로 점심을 대충 때우고 저녁 준비를 한다. 아이들 데리러 가기 한 시간 전. 내가 한 일이라곤 겨우 아침에 일어나서 장 본 것 밖에 없는 것 같은데 나는 왜 이렇게 피곤한 건지, 왜 겨우 한 시간밖에 안 남은 건지.. 나는 그 이유를 정확히 알지만 그 이유를 입 밖으로 꺼내는 순간 그까짓 일을 하고도 힘들다고 투덜거리는 투덜이가 되는 것 같아 마음이 상한다.


더 이상은 안 되겠다. 너무너무 피곤하다. 30분만 자자. 

침대에 누워 30분간 기절을 했다. 일어나자마자 씻고 아이들 픽업을 하러 또 차를 탄다.

학교에 도착해 주차하고, 애들을 데리고 나와 차에 태워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늘 저녁이 뭐냐고 묻는 아이들에게 오늘은 아무 말도 하기가 싫다. "몰라 몰라.. 주는 대로 먹어.."

집에 오자마자 저녁을 차리고 오후 4시 20분밖에 되지 않았는데 일찍 저녁식사를 시작한다. 배고파 죽는 아이들이 허겁지겁 밥을 먹고, 식탁만 대충 치우고 나니 5시. 설거지할 새도 없이 큰 아이 수영 데려다줘야 할 시간이다. 남편에게 부탁하려고 했으나 남편이 일이 생긴 관계로 수영도 내가 데려다줘야 한다. 가는 길에 커피 한잔만 사가지고 가자고 큰아이와 이야기하고 레슨 30분 전에 집에서 출발했다. 커피는 개뿔.. 길이 많이 미끄럽다 보니 도저히 커피 사갈 시간이 안된다. 커피는 과감히 포기하고 수영장으로 향했다. 쉬지 않고 달려 시간 맞춰 왔는데 주차할 자리가 없어서 주차장을 두 바퀴 돌다가 겨우 주차를 하고 수업시작시간에 딱 맞춰 들어갔다. 큰 아이는 내게 눈치를 주며 "엄마, 늦을뻔했잖아." 하는데 '안 늦었잖니? 나는 뭐 늦게 올라고 늦게 왔니? 그럼 네가 운전해!' 등등 쏘아붙일 말이 많았지만 조용히 참아주기로 했다. '사실은 나 너랑 말다툼할 기분이 아니야..'


수영시간 45분 동안 가만히 앉아서 기다린다. 나는 얼이 나간 얼굴로 가만히 앉아서 생각한다. 난 오늘 종일 뭐 했지..? 왜 나 운전한 기억밖에 없는 거지? 집에 가면 뭐 해야 하지? 오늘 진짜 당땡긴다. 달달한 거 당긴다.  진짜 너무하네. 나는 위해 쓴 시간은 오늘 하나도 없었네. 영어공부는 개뿔. 이런 내가 시험을 패스하면 그게 진짜 대단한 거지. 중얼중얼..


수영이 끝나고 패딩을 끌어안고 차까지 달려간다. 너무 춥다. 추운데 계속 왔다 갔다 하니까 더 피곤했나 보다. 눈길이라 미끄러워 운전 중에도 계속 긴장을 하고 있었다. 할 일이 머릿속에서 떠나지가 않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일들을 다 하기엔 오늘 내 체력이 바닥이라 우울했다. 나 자신을 아껴주는 차원에서 하루는 쉬고 싶은데 영어점수도 받아내지 못한 내가 그럴 자격도 없는 것 같아 슬펐다. 나는 오늘 온 가족을 위해 살았지만 정작 나는 행복하지가 않았다. 만약 내가 원하는 영어점수를 얻어낸 후에 이리도 바쁜 하루를 보냈다면 나 자신에게 오늘도 수고했다고 말해줄 수 있을까? 아직 받아내지 못한 영어점수가 문제인 건지, 종일 차 타고 왔다 갔다 한 오늘의 하루가 문제인 건지 헷갈렸다. 벌써 저녁 7시가 되어간다.




엄마로서의 일을 하지만, 내가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싶다.

10년 동안 아이들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나를 위해서 이제는 내가 하고 싶은 일도 하고 싶다.

그런데 아이들이 다 학교를 다니는 지금에도, 그래서 아이들이 학교가 있는 동안 혼자 있을 시간이 있음에도 나는 그 시간들을 온전히 나를 위해 충분히 사용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답답할 뿐이다. 


주부는 아이들이 집에 있으면 2배로 힘들 뿐. 원래 그 자체로 힘든 직업이다.

직업이라 말하기도 부끄러운 직업이며,

일이라 말하기도 부끄러운 많은 일을 한다.

주부라는 일을 하기에도 벅찬데 공부까지 하기엔 내 욕심이 지나친가 하는 생각이 든다.


욕심이 지나친가 하는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욕심쟁이가 되고 싶은 나다.

엄마로서도 아내로서도 나로서도 열심히 살고 해내고 싶은 욕심쟁이.


그래도 드는 생각은,

현명한 엄마가 되자.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될 일을 구분하고

우선순위를 항상 기억하고

너무 지치고 힘이 드는 날이면 그냥 다 놓고 쉬기로. 그래도 된다고.

아무도 나에게 해를 가하지 않으며 

아무도 나에게 다그치지 않을 것이기에.

내가 나에게 조금만 더 넓은 아량으로 대하자고.

오늘 하루종일 운전만 한 나에게. 내가 그토록 종일 운전하고 다니지 않았다면 아이들은 학교를 제시간에 가지 못했을 것이고, 가족들이 오늘 저녁을 무사히 먹지 못했을 것이고, 우리 딸은 수영을 가지 못했겠지. 

내가 있어서 해낸 일들이고 내가 있어서 오늘하루가 무사했던 거라고. 

아주 수고했고 기특하다고.

하지만 내일은, 아니 당분간은 장 보러 다니지 말고, 필요한 운전이 아니면 돌아다니지 말고 공부에 집중해 보자고. 


시간이 너무 빠르게 흘러가서 벌써 1월 중순이 지나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다. 시간은 계속 빠르게 흐를 텐데 나도 그 흐름을 타자고. 투덜거려도 좋으니 오늘은 이만 놓아주고 새로운 내일을 맞이하자고. 

어제 못 잔 잠을 오늘 보충해 주고 내일은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하자고.


오늘 나에게 남은 건 아무것도 없지만, 내일은 온통 나의 것들로 남기는 하루가 되길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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