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선농인문학서당 #7 - <파이돈>
“보통 사람들은 잘 모르겠지만, 철학에 제대로 전념하는 사람들은 죽는 것과 죽음 이외에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아.” (118)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기록. 앞서 보았듯이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아테나이 시민들로부터 사형을 선고받았고, <크리톤>에서 여러 사람이 그의 탈옥을 기획하나 그는 국법을 지키겠다며 순순히 사형을 기다린다. 드디어 마지막 날. <파이돈>은 철학의 아버지,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날을 그리고 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날 해 질 무렵 독약을 마시고 죽을 때까지 또 한편의 긴 대화를 남겼다. <변론> 및 <크리톤>에 비해 방대하며 치밀한 논의를 담고 있는 이 대화는 소크라테스가 생각하는 죽음의 의미, 나아가 철학이 무엇인지를 이야기한다.
<변론>에서 보았듯 소크라테스가 추구하는 지혜란 죽음과 닮아있다. 참된 지혜란, 제한적인 지식을 갖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이다. 무지에 대한 앎이라고 해야 할까. 한편 죽음은 이 무지의 속성을 지니고 있다.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철학을 좁은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철학에 귀 기울여 보면 죽음과 매우 가깝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기꺼이 맞겠다고 말한다. 이는 무지를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 때문도 아니고, 자신이 정정당당하다는 정의감 때문도 아니다. 도리어 그는 철학자이기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죽음을 ‘추구’한다고 까지 말한다. 그는 철학자로서 거리낌 없이 죽음을 맞겠다고 말한다.
대관절 철학과 죽음이 무슨 관계이기에 그럴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소크라테스가 인간을 어떻게 생각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인간이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뉜다고 생각했다. 바로 ‘혼’과 ‘몸’이다. 살아있는 인간이란 혼과 몸이 결합되어 있는 존재이며, 죽음이란 이 혼과 몸이 서로 분리되는 것을 말한다. <파이돈>에서는 이 혼과 몸의 관계에 대해, 특히 혼의 성질에 대해 매우 긴 논의가 펼쳐진다. 이를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렇다. 몸은 유한하며 곧 소멸되지만 혼은 무한하며 소멸되지 않는다. 혼은 이 몸뚱이의 인간으로 태어나기 이전부터 있었고, 이 몸뚱이의 존재가 사라지는 이후에도 있다. 나아가 혼은 현재적인 개체의 생사에 묶이지 않는 것은 물론 다른 몸으로 태어나기도 한다. 이른바 윤회!
혼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전에, 소크라테스가 몸에 대해 어떻게 생각했는가를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 소멸할 몸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큰 가치를 두지 않았다. 이는 몸이 영원하지 않기 때문만이 아니다. 몸은 감각을, 나아가 쾌락을 추구하며 이는 진실을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대체로 자네는 철학자가 몸에는 관심을 두지 않고 되도록 몸에서 떨어져 혼을 지향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인가?” / “나는 그렇게 생각해요.” / “그렇다면 우선 몸의 쾌락과 관련하여 철학자는 혼을 몸과의 결합에서 최대한 분리시킨다는 점에서 보통 사람들과 다르다는 점이 밝혀진 셈이네.” (120)
이렇게 소크라테스는 사유와 감각을 분리시킨다. 감각이란 몸뚱이가 느끼는 것을 말하며 이는 불확실하다. 나아가 실재를 잘못 파악하기도 한다. 잘못 보는 것, 잘못 들은 것 따위를 얼마나 쉽게 떠올릴 수 있는가. 감각은 실재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니다. 눈과 귀 등은 얼마나 쉽게 속는지. 소크라테스는 감각 대신 사유를 무기로 삼아야 대상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따라서 이때 그가 말하는 사유란 감각을 제거한, 보는 것이나 듣는 것 따위와 무관한 이성의 활동을 이야기한다.
오래도록 철학자들이 문학을, 구체적으로는 시인이나 희곡 작가들을 멀리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감각을 다루는 사람들이며 그들이 내놓은 언어는 사실을 왜곡시킨다. 실재를 보지 못하게 만들고 환영과 같은 것을 감각하도록 만든다. “어느 먼 산 뒷 옆에 바우섶에 따로 외로이 서서, / 어두워 오는데 하이야니 눈을 맞을, 그 마른 잎새에는, / 쌀랑쌀랑 소리도 나며 눈을 맞을, / 그 드물다는 굳고 정한 갈매나무라는 나무를 생각하는 것이었다.”라고 한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글쓴이가 맞는 외로움이나 곤경 따위는 그가 들어앉은 좁은 방 속에 이런식의 이야기로 승화되고, 아니 날아가버리고 마는 것 아닌가. 굳은 갈매나무 따위가 있다고 한들 그것이 무슨 소용인가. 더구나 그의 글을 읽는 우리들은 대부분 갈매나무가 뭔지도 모르는데. 있는지도 모르는, 마치 허상과 같은 것을 강요하고 있다.
“어떤 실재가 어디에선가 혼에게 명확히 드러난다면 그것은 사유 속에서가 아닐까?” / “그렇지요.” / “그리고 혼이 가장 잘 사유하는 것은 청각이나 시각이나 고통이나 감각 등으로 주의가 산만해지지 않을 때일세. 혼이 몸과 헤어져 되도록 혼자 있고, 몸과의 접촉이나 공존을 최소화하며 실재를 추구할 때란 말일세.” (122)
물론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철학가와 문학가가 추구하는 것은 서로 다르지 않냐고. 그렇게 볼 수도 있으나, 플라톤 등은 이처럼 감각을 다루는 사람들 때문에 철학자의 탐구가 방해받는다고 생각했다. 감각을 분리시키는 것, 감각으로 산만하지 않을 것, 혼이 몸과 떨어져 있을 때야 비로소 순수하게 대상을 파악할 수 있다. 따라서 철학자는 죽음을 기다리는데, 죽음이야 말로 이 몸에서 혼이 해방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죽는다면 몸의 감각에 오염되지 않아도 될 것 아닌가. 그렇다면 시인들은 죽음을 어떻게 여겼을까.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결국 순수한 철학이란 죽음 이후에나 가능한 것 아닌가. 이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이 추구하는 대상이 구체적인 사물이 아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눈 앞에 보이는 물리적 사물에 별 관심이 없었다. 도리어 <파이돈>에서 소크라테스는 ‘정의 자체’, ‘미 자체’, ‘선 자체’ 따위에 더 많은 관심을 두고 있다 말한다. 당연히 이것은 눈으로 볼 수 없고 귀로도 들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순수한 사유만으로 다룰 수 있는 대상이다.
"그렇다면 사유할 때 시각을 이용하거나 그 밖의 다른 감각을 사유 속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되도록 사유만으로 개별 대상에 접근하는 사람이 가장 완벽하게 그렇게 할 수 있을 것이네. 자신을 눈과 귀는 물론이요 사실상 몸 전체와 가능한 분리시켜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대상에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사유를 사용함으로써 진리를 추구하는 사람 말일세. 몸이 혼과 함께하면 혼을 혼란에 빠뜨려 혼이 진리와 지혜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하기 때문일세. 심미아스, 누군가 실재에 도달한다면 바로 그런 사람이 아닐까?” (123)
"그러니 우리가 어떤 사물에 대해 순수한 지식을 갖고자 한다면 몸에서 벗어나 대상 자체를 혼 자체로 관찰해야 한다는 사실이 실제로 밝혀진 셈이오. 우리의 논의에 따르면, 우리가 추구하며 우리가 사랑한다고 말하는 지혜는 생전이 아니라 우리 사후에나 획득할 수 있을 것 같소. (...) 생전에 우리가 지식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방법은 몸과 어울리거나 필요 이상으로 몸과 함께하는 것을 되도록 피하는 것이요. 또한 우리가 몸의 본성에 오염되지 않게 하고, 신께서 친히 우리를 해방시켜주실 때까지 우리를 몸으로부터 정화하는 것이오. 그렇게 하면 우리가 몸의 어리석음에 오염되는 것을 피하게 될 것이오. 그리고 우리는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 함께하게 될 것이며, 우리 자신을 통하여 순수하고 오염되지 않은 것 일체를 알게 될 텐데, 나는 감히 그것이 바로 진리라고 말하겠소." (124-125)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대상’, 과연 이것은 무엇일까. 이는 파이돈에서 말하는 ‘자체’라는 표현을 통해 해석해야 한다. 어떤 사물은 특정한 개별 사물로 존재하기 이전에 순수한 사물 자체로 존재하고 있다. 이를 철학의 용어로는 ‘이데아(idea)’라고 한다. 본디 사물에는 이데아라 할만한 무엇 자체가 있으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있는 구체적인 사물은 단지 그와 ‘유사’한 무엇일 뿐이다. 이를 모상模像이라고 한다. 따라서 지금 눈에 보이는 대로 이 사물을 이해한다고 이 사물의 실재를 파악하는 것이라 할 수 없다. 눈으로가 아니라 사유로, 그 자체를 파악할 것. 이것이 소크라테스 등 고대 그리스철학의 주요한 목표였다.
흥미롭게도 그는 현실세계와 무관하게 이데아의 세계가 따로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거기에는 어떻게 갈 수 있는가. 방법을 제대로 알 수는 없다. 다만 몸을 지닌 이 상태로 갈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하다. 그곳은 혼만이 갈 수 있는 세계. 결국 몸과 혼의 분리, 죽음이라는 방법으로 그 세계에 갈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진정한 철학이란 죽음 이후에나 가능할 것이다. 불확실한 존재로서(몸+혼) 불확실한 세계(이데아의 모상)를 파악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 아닐까?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망각과 상기’라는 주제로 이 문제를 해결한다. 죽음 이후에 혼만이 있는 것처럼 죽음 이전에도 혼만이 있었을 것이다. 이때의 혼은 이데아, 즉 그 자체들과 어울려 있었을 텐데 불행히도 태어나면서, 몸뚱이의 껍데기를 입으면서 ‘그 자체’들에 대한 지식을 잃어버렸다. 레테, ‘망각’의 강을 건너왔기에 아무것도 알지 못하는 존재로 태어난다는 말이다. 그러나 혼이 완벽하게 다른 존재가 된 것은 아니어서 우리는 특정한 방법을 통해 그래도 참된 지식, 그러니까 이데아에 대한 앎을 얻을 수 있다. 이것을 ‘상기’, 잊어버린 것을 떠올리는 작업이라 말한다.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철학이란 바로 이것이다. 이데아에 대한 ‘망각’한 앎을 다시 ‘상기'시키는 것. 그가 산파술을 중요하게 생각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 지식을 얻었다가 태어나는 순간 잃어버렸지만 나중에 적절한 감각 훈련을 통해서 전에 갖고 있던 지식을 되찾는 것이 사실이라면, 우리가 ‘배움’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가 전에 갖고 있던 지식을 되찾는 것이 아닐까? 그러니 배움은 ‘상기’라고 부르는 것이 옳지 않을까?”(146)
그러나 죽으면 그 망각한 지식을 다 다시 되찾는 거 아니냐고?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감각에 절어 있게 된다면, 몸의 강한 지배를 갖게 된다면 저 이데아의 세계로 다시 돌아가는데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말한다. 육체에 오래도록 갇혀있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오염되어 순수함과 멀어지면 환영과 같은 존재가 되어 버린다. 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존재가 되어 버린다는 것. 구체적으로는 유령이 그런 존재이다.
“그리고 여보게, 우리는 이런 신체적인 것은 성가시고 무겁고 흙의 성질을 띠며 가시적이라고 생각해야 하네. 그런데 그런 혼은 신체적인 것에 오염되어 밑으로 처지고, 비가시적인 것과 하데스가 두려워 가시적인 세계로 도로 끌려가서 무덤과 묘비 주위를 배회한다고 사람들이 말한다네. 그곳에서 실제로 목격된 그림자 같은 환영은 정화되지 못한 채 풀려나 가시적인 것을 일부 간직하고 있는 혼들의 유령이며, 이들이 보이는 것도 그 때문이라네. (...) 또한 이들의 혼들은 훌륭한 사람이 아니라 열등한 사람들의 혼들로 전생의 나쁜 행실에 대해 죗값을 치르느라 그런 곳을 배회하지 않을 수 없는 걸세. 그리고 이들 혼들은 자기들을 따라다니는 육체적인 것을 향한 욕망 때문에 다시 몸에 갇힐 때까지 계속 방황한다네. 또한 그런 혼들은 십중팔구 생전에 계발했던 그런 유형의 성격에 갇히게 될 걸세”(159)
철학이란 이 몸뚱이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리면 철학은 ‘혼의 해방’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철학과 죽음은 서로 깊이 닮아있다. 그러니 철학자가 자기 죽음을 마다할 이유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소크라테스는 살아서 혼을 잘 보살폈으며, 이제 몸이 죽을 때가 되어 자신이 고대하던 아름다운 세계로 떠날 것을 기대한다. 그는 깨끗한 혼으로 저승의 세계로 들어갈 것을 고대하고 있다. 그 여행의 끝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로서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생전에 몸의 쾌락과 장식은 이롭기보다는 해롭다 여겨 자신과 무관한 것으로 거부하고는 배우는 즐거움에 열중함으로써 자신의 혼을 남에게서 거부하고 배우는 즐거움에 열중함으로써 자신의 혼을 남에게서 빌려온 장식물이 아니라 절제, 정의, 용기, 자유, 진리 같은 혼 자체의 장식물로 장식한 다음 운명이 부르면 언제든 저승으로 떠날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은 자신의 혼에 대해 안심할 수 있다네. 심미아스와 케베스와 그 밖에 다른 사람들이여, 자네들도 앞으로 언젠가는 저마다 저승으로 여행을 떠나게 될 걸세. 그러나 나는 지금, 비극의 등장인물이 쓸 법한 말투를 따르면, 운명의 부름을 받고 있네. 내가 목욕할 시간이 된 것 같다는 말일세. 여인들이 내 시신을 목욕시키는 수고를 하지 않도록, 내가 독약을 마시기 전에 목욕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 (227)
그는 목욕을 마친 후 가까운 사람들에게 작별인사를 하고는 독약을 마신다. 비록 이 세상에 남을 몸뚱이지만 그것을 지저분하게 남기고 싶지 않아서. 그의 깨끗한 몸뚱이는 독약을 마신 뒤 차갑게 식어버렸다. 그의 혼은 어떻게 되었을까? 그가 이야기한 것처럼 저승의 세계에, 참된 인식의 세계에 가 있을까? 몸뚱이를 사는 우리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영원히 알 수 없는 일이다. 죽음만이 그것을 알려줄 테니까.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자연스레 공자와 비교해보게 된다. 둘이 서로 어울리는 것을 기꺼워했는지는 모르나, 어쨌든 후대의 사람들은 그 둘을 함께 이야기하는 것을 즐기니. 소크라테스의 죽음을 보며 공자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흥미롭게도 <논어>에는 공자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담지 않았다. 어쩌면 이는 지혜와 죽음, 철학에 대한 소크라테스의 생각과는 다른 무엇을 보여주는 것 아닐까?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한 철학자의 죽음인 동시에, 철학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그런데 공자에게는 그런 것이 없다. 도리어 공자에게는 몸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가 많이 남아 있기도 하다. 그가 즐겨 먹었던 음식이며, 그가 입었던 옷 등등.
누군가는 삶을 임시적이라 여기고, 누군가는 삶이야 말로 전체라고 여길 것이다. 굳이 나누자면 소크라테스는 전자, 공자는 후자라 할 수 있다. 공자의 죽음이 이야기되지 않는 것은 삶만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공자도 죽고 사라지지 않았느냐 되물을 수도 있다. 그러나 수壽, 오래 사는 것이란 후대 사람들에게 오래 기억되는 것을 말한다. 공자는 무덤 속에 있지만 그는 여전히 제례祭禮로 오늘날까지 기억되는 인물이다.
철학이란 무엇일까. 죽음을 탐구하며 죽음의 세계, 혼의 해방을 탐구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 또 누군가에게 철학이란 이 삶을 이 삶의 테두리 안에서 의미 있게 살아가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어진 운명의, 수명의 한계 안에서 끊임없이 삶을 의미화하는 것. 그렇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에게는 ‘대화’ 자체가, 공자에게는 대화의 ‘상대'가 중요했던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