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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 민주주의?

<중국의 충격> 1장 "자유"•"민주"

by 기픈옹달
"문제로 삼고 싶은 것은 이러한 전체로서의 허위가 전체로서의 진실성을 띠고 일본에 쉽게 확산되고 있는 일본의 상황이다. 즉 '자유도 민주도 없는, 안전보장에 위협이 되는 중화인민공화국'이라는 인식이 일본의 풍토에 더없이 용이하게 수용되고 있는 일본의 지적 풍토를 문제시하고 싶은 것이다. <중국의 충격: 1장 중국과 "자유"•"민주"> 31쪽."


미조구찌 유조는 중국에 대한 편협한 시선을 문제로 제시한다. 이는 일본에만 그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국 땅인 한국에서도, 2004년 쓰인 이 글 이후 15년이나 지났지만 기본적인 인식의 틀은 바뀌지 않았다. '자유도 민주도 없는, 안전보장에 위협이 되는 중화인민공화국' 여기에는 중국을 통해 자신의 우월을 강조하려는 그리고 중국을 위협으로만 간주하는 낡은 사고가 있다고 비판한다.


우선 진실성의 문제. 과연 중국에는 자유와 민주가 없는가? 언뜻 보면 이 말은 맞다. 우리는 중국인이 하지 못하는 것을 수 없이 나열하여 늘어놓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중국에서 공산당 타도를 외칠 수 있을까? 티벳이나 위구르 문제는? 왜 그들은 선거를 하지 않는가? 일당 '독재'의 나라에 무슨 민주가. 그러나 이것 역시 하나의 측면일 뿐이다.


"쩡이의 회고는 천안문 사건 당시의 일을 말한 것이라는 점에서 진실이라 하더라도, 이것은 현재 중국에서 체제의 틈새를 메우고 '민주'의 공간이 형성되고 있다는, 도 실은 그 체제 자체가 틈새투성이라는, 일본인으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중국 특유의 사실에 대해 고의로 눈을 감고 있는 것이다." 32쪽."


여기서 주목해서 읽어야 할 것은 '체제 자체가 틈새투성이'라는 표현이다. 중국을 단일한 하나의 체제로 보아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형식적으로야 일당 독재체제의 사회이지만 실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은 어떤가. 자신들의 정치적 의사, 토론의 공간이 전혀 부재한가? 이런 관점에는 모든 가능성이 소거된, 중국을 하나의 단일한 덩어리로 보는 입장이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중국 사회를 경험해보면 그 특유의 틈새라고 할만한 것이 부지기수로 존재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생각보다 사회가 품고 있는 예외성의 여백이 넓다. 저자는 그 틈새 속에, 천안문 사건 이후 '민주'의 공간이라 부를 만한 것이 형성되고 있다고 본다. 더불어 더 중요한 것은 그 특유의 여백, 또 다른 변화와 가능성에 대해 고의로 눈을 감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무시, 의도적 맹목성은 어디서 유래하는가? 자유와 민주에 대한 단일한 사고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저자의 진단이다. 예로 드는 것이 1949년 중국혁명을 피해 미국으로 도망친 후스에 대한 평가이다. 당시 그에 대한 일본 좌익 지식인의 평가는 좋지 않았다. 왜? 적어도 50년대 지식인들에게 미국의 민주와 자유가 그대로 통용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미국이 주도하는 서방의 구도에 대하여, 그 이질성에 의해 서방의 '자유'•'민주'가 상대화 되었으며, 게다가 동방의 프롤레타리아 '민주'•'자유'가 서방의 부르주아 '민주'•'자유'보다 질적으로 낫다고 하는 인식조차 존재했었기 때문이다. … 그런데 이번에는 철저히 중국의 '민주'가 부정되거나 무시되고 있다. 이제 중국의 '민주'는 절대적인 미국의 '민주'를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일찍이 미국의 '민주'도 세계 속에서 상대화되었었다는 그 시대의 기억은 사라지고, 중국통 지식인들까지도 중국에는 중국의 '민주'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을 고려치 않는다. 이리하여 사람들 사이에 반反'민주', 반反'자유'의 중국정부라는 선험적인 전제가 공유되게 되어, 쩡이의 언술이 진실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34쪽.



저자는 이것이 냉전의 구도를 그대로 답습한 것이라 평가한다. 이미 백색 세계와 적색 세계의 이항 대립구조가 깨어졌음에도 한쪽에서 다른 쪽을 이데올로기적으로 평가, 제단 하는 습속이 그대로 작동하는 것이다. 과거 서방의 기준, 관념적 세계를 기준으로 중국을 환상하는 사람들이 이제 다시 서방의 기준으로 중국을 환멸하고 있다는 게 저자의 평가다. 흥미로운 점은 평가는 달라졌지만 관점, 중국을 보는 잣대는 달라지지 않았다는 점이다. 서방의 역사와 사회를 보편적 기준으로 삼아 평가하는 태도.


따라서 새로운 질문이 제시되어야 한다. 그 질문이란 '중국이란 무엇인가'는 질문이다.


"그것이 환상이든 환멸이든 그들이 대상으로 삼아왔던 '사회주의'가 서양이 낳은 역사 이론에 근거한 관념적인 지식에 불과했으며, 실제 현실 중국에 있어서 '사회주의'란 무엇인가, 더 나아가 중국에 있어 '근대란 어떤 것인가', 중국에 있어 '중국이란 무엇인가'의 검증이 이루어지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사회주의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될 뿐, 중국의 16~17세기 이래의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지 않았다. '근대'도 아편전쟁의 '서양의 충격'을 통해서 이해되었을 뿐, 중국의 16~17세기 이래의 역사적 전개과정 속에서 이해된 적은 없었다. 요컨대 중국을 원래 유럽과는 축을 달리하는 세계로 바라보는 관점이 극히 희박했다. 35쪽"


극히 희박한가? 도리어 부재한다고 보는 것이 옳지 않은가? 나에게 끊임없이 돌아오는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중국을 평가할 수 있는 잣대를 가지고 있는가? 그 낡은 잣대, 중국에 자유와 민주가 없으며 억압과 굴종만 있는 사회라는 그 잣대를 버리고 중국을 평가하고 탐구할 수 있는 잣대 말이다.


저자는 중국 고유의 역사 과정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서구의 역사로는 탐구할 수 없는 고유의 것이다. 저자는 다른 글에서 중세와 근대의 이분법적 구도를 타파하기 위해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고 제안하기도 했다. 중세라는 표현은 근대의 도래를 필연적으로 바라는 문명과 야만의 구도 속에 가능한 말이기 때문이다. 근대라는 하나의 도달해야 할 역사적 과제와 목표 없이 한 사회와 국가를 서술하는 것이 가능한가? 저자는 가능하다 말한다. 그래서 다른 글에서 '근세'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간단히 줄이자면, 중국은 나아가 아시아는 서양의 충격 이전에 나름의 역사 발전의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거꾸로 말하면 또 다른 식의 근대가 있었다는 말. 따라서 역사는 단절이 아니라 연속이다.


"나는 중국의 혁명을 일반적으로 말하는 사회주의 혁명, 즉 유럽태생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으로 보지 않는다. 중국은 16~17세기 이래 균분상속이라는 유럽 및 일본과는 완전히 다른 관습과 제도에 기반해 있었고, 민간에는 상호부조의 사회 시스템이 확대되고 있었다. 이 시스템(종족제와 비밀결사 등의 형태를 가진)의 형태는 유럽 및 일본과 같은 세습적인 사유재산제도와는 달리, 사유와 공유가 서로 연계된, 혹은 공동적 사유(共同的 私有)가 주요한 형태였으며, 이것이 중국적인 '사회주의'의 기저를 이루었다." 37쪽.


여기서 어떤 사람들은 '중국적'이라는 말에 토를 달 수 있을 것이다. 사회주의라는 말에 '중국적'이라는 말이 가능하냐며. 사회주의란 그것이 어떤 모습이 되었든, 마르크스의 전통에서만 가능하다고 보는 입장이 있겠다. 그러나 거꾸로 저자의 관점에서 질문을 하자면 그런 태도야 말로 서방의 관점만을 따르는, 기존의 낡은 관점을 수호하고자 하는 태도에서 기인하는 건 아닐까? 역사에는 하나의 발전 도식만이 있다는, 나아가 혁명은 오직 하나의 혁명만 있다는, 감옥 문을 열고, 단두대를 광장에 놓았던, 그리고 공화주의를 부르짖었던 그 혁명밖에 없다는.


이런 말은 어떤가? '중국식 민주주의' 이 역시 수많은 말이 들러붙은 표현일 테다. 누군가는 발끈하면서 그런 말이 가능하다면 박정희식 민주주의도 가능하지 않겠냐 말한다. 물론 그 질문에는 70~80년대를 거쳐오면서 '민주화'라는 말을 사용한 우리의 역사적 맥락이 들어 있다. 그러나 그렇게 도달한 87년대의 체제가 곧 민주주의를 오롯이 설명하는 건 아니지 않나. 그래서 우리도 이제 '형식적 민주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는 건 아닌가?


'중국식 민주주의'라는 말은 어렵다. 두 가지 질문이 들러붙기 마련이다. '중국식'이란 무엇인가? 저자의 논의를 빌리면 최소한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 야만의 열등한 방식, 문명 세계 고유의 혹은 최소한 중국혁명 이후의 정치체제가 가지고 있는 자체의 방식. 또 하나의 질문은 이렇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다당제와 의회 입법, 직선제를 가리키는 말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그 다음은?


하나 뱀꼬리를 붙이면, 오늘날 일부에서 회자되는 '민주화'라는 비꼼, 경멸의 언어는 바로 저 협소한 정의에 대한 물음이 함께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요약하면 이렇다. 군부독재도 없고 다당제의 의회 입법과 직선제가 이루어졌지만 그것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민주주의라는 말조차 이제 빛바랜 낡은 표현이 되어 버린 게 아닌가. 그런 현실에서 민주주의를 붙잡아 먼지를 털고 반딱반딱 빛나게 닦는 것이 최선의 길인가? 다시 중국으로 돌아오면 어쨌든 저들은 저들의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거기에 민주주의라는 낡은 훈장을 달아준들 그게 뭐 대단한 일인가 싶기도 하다. 중요한 것은 현재의 변화를, 현재의 문제를 담아내는 언어, 주제, 질문을 찾아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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