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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Oct 03. 2018

미국을 사랑한 아버지들

코코(Coco, 2017년 作)



'미국을 사랑한 아버지들 - 코코(Coco, 2017년 作)'


디즈니 애니메이션(픽사는 디즈니에 인수합병되었으므로 디즈니 애니메이션이라 통칭한다)을 볼 때면 때때로(아니 어쩌면 꽤 자주) '이 영화는 순수한 동심들을 위해 받칩니다'라는 외연의 기획의도를 갈갈이 해체하고 싶어지곤 한다. 이에 대해  누군가가 '당신은 세속인이 되어버렸군요'라는 씁쓸한 어조를 내비친다면 수긍할 자세가 되어있고, 좀 더 강한 어조로 변태라고까지 매도한다고 한들 부인하지는 않겠다. 나는 변태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자 변명을 늘어놓겠다. 과거에 혹자들은 미국의 문화가 타국에 스며들기 시작했다는 증거를 세 가지에서 찾았다. 코카콜라, 맥도날드, 미키마우스. 그러니까 언급한 세 가지는 일종의 성조기인 셈이다. 이 논리대로라면 미키마우스의 창조주 디즈니를 미국화의 대표자로 도식화할 수 있을 것이고  그들의 창작, 배포 행위를 '성조기 꼽기'라는 말로 조금은 비딱하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그들의 야욕과 자국 우월주의. 이 지점이 나를 변태로 만드는 지점이다. <코코>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동안 나는 잠시 변태가 되어야겠다.



일본의 적산가옥 형태의 집, 1층에는 한복을 입은 서양 마네킹, 2층에는 이난영의 노래를 들으며 벌어진 중국식 마작 한 판. <코코>는 박찬욱의 <박쥐>의 '행복 한복 집'만큼이나 혼종적이다. 차이 라면 <박쥐>는 다분화된 혼종이고, <코코>는 이분화된 혼종이라는 점 일 것이다. 멕시코가 배경인데 언어는 영어를 쓴다. 미구엘(안소니 곤잘레스)은 분명히 영화 초반 본인을 여장부라고 얘기하지만 짧은 머리에 후드티와 청바지 어딜 봐도 소녀로 보이지 않는다. 그녀가 관통하는 세계는 현세와 사후 세계로 이분화되어 있으며 그녀의 얼굴의 보조개는 한쪽만 존재한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 가사는 때로는 에스파냐어 때로는 영어다.

무엇보다 미구엘에겐 두 명의 아버지가 있다(아마도 이것이 이분화의 근원일 것이다). 한 명은 <Remember Me>를 부르다 급사한 델라 크루즈(벤자민 브랫), 한 명은 <Remember Me>를 작곡하고 급사한 헥터(가엘 가르시아 베르날). 음악 하고 싶어서 집 버리고 나온 아버지들은 결국 모국어를 버리고 영어로 된 노래를 부르고 작곡하다가 죽는다. 게다가 델라 크루즈는 스타가 되자 미국 문화의 산실과도 같은 웨스턴 영화에 출연해 마치 자신이 존 웨인이 된 것처럼 행동하지 않았던가? 말하자면 두 아버지의 음악에 대한 열정은 미국화라는 결론에 젖줄이 닿아 있는 셈이고, 그들이 도착한 사후 세계는 미국이라고 봐도 무방할 것이다.

아메리칸드림을 위해 떠난 멕시코의 아버지들의 부재는 모계 중심의 가족 사회를 창조했는데, 아버지의 미국 주의를 상징하는 음악은 이 집에서 불법이요, 가업을 위해 사위까지 끌어들이며 전통적인 남녀의 성 역할은 전복된 지 오래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이 선택한 사업이 구두 만들기라는 점인데, 떠난 이들 때문에 선택하게 된 경제활동이 누군가를 떠날 수 있게 조력하는 발을 만드는 작업이라니. 이 지점에서 <코코>에는 허파에 바람들어간 아버지들을 또다시 양산해야 하는 어머니들의 무력감이 깃들어 있다.



일견 <코코>는 미국화에 성공한 아버지를 처단하고, 미국화를 포기하고 가정으로 돌아오려고 마음먹었던 바람직한 아버지를 포용하는 가족 중심적인 영화로 보인다. 그런데 눈여겨봐야 될 점은 델라 크루즈가 처단되는 방식이 스크린을 통해 많은 관중들에게 관람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점이다. 만약 이들이 보는 것이 일종의 영화라면 그 장르는 거대한 괴수가 등장하는 할리우드의 블록버스터 영화를 연상케 한다. 멕시코의 가족 회복도 결국 미국 문화를 벗어나지 못하는 셈이라니. 디즈니의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뻗쳐올라가는 자만심은 어쩌면 <코코>의 중핵이다.

역사적 관점의 도식화를 해볼까? 그 옛날 아메리카 대륙에 첫발을 내디뎠던 콜럼버스는 이탈리아인이었고 그를 지지하여 도와준 국가는 스페인이었다. 멕시코는 한때 스페인의 식민지였다. 그래서 그들의 모국어는 에스파냐어이다. <코코>는 이러한 역사적 팩트에 미국 우월주의를 섞는다. 언급했던 것처럼 모국어가 에스파냐어 임에도 그들은 영어를 구사한다는 점에서도 그렇고. 무엇보다 미구엘과 함께하는 강아지 이름은 '단테'란다. 

당연히 이 작명은 지옥, 연옥, 천국을 오갔던 단테 알리기에리의 <신곡>에서 착안한 것일 텐데, 사후세계로 분한 미국에 데려다주는 영물의 이름을 이탈리아인이었던 단테로 명명하면서(아마도 이것은 콜럼버스와 등호의 기호로 연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을 '미친개'로 희화화하여 표현해놓았다. 자신들의 뿌리라고 말할 수 있는 스페인과 이탈리아 위에 본인들을 올려놓은 셈이라고 말한다면 진정 나는 변태인가?

여기에 현재의 미국 이민자 문제(미국으로 넘어오려는 멕시코 이민자 문제)를 결합한다면 <코코>에 대한 나의 변태적 행위가 완성된다. 즉, <코코>는 스페인과 미국의 두 가지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멕시코가 진정으로 원하는 아버지는 우리라는 디즈니의 미국 우월주의의 영화이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국으로 넘어오지 말고 그곳에서 가정을 지키라는 트럼프 주의의 영화인 셈이다. 무서운 것은 이들의 뻔뻔한 자기자랑 솜씨가, 그 상상력이 우리를 완전히 홀릴 정도로 매혹적이라는 것이다. <코코>는 자만심과 동심의 경계를 정말 잘 넘나들고 있는 영화이다.




★★★★ (별 4개)
미국을 사랑한 두 명의 아버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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