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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란잔 Jan 11. 2021

아마존에게 맡겨진 웨스턴

탠저린(TANGERINE, 2015년 作)

아마존에게 맡겨진 웨스턴 - 탠저린(TANGERINE, 2015년 作)


극악의 형태로 발현된 행위들로 인해 학습된 도덕률이 배반 당할 때, 참을 수 없는 불편함에 짓눌리곤 한다. (나의 경우로 국한해 예를 들자면) 부모에게 가해지는 자녀의 폭력, 노인에게 가해지는 미성년의 폭력, 아동 살해, 집단적 성폭행 등. 불협의 간극이 최대치에 도달했을 때 경험하게 되는 메스꺼움. '내(my) 세계'에만 없을 뿐 '네(your) 세계'에는 존재하는 일들. 라즈믹(카렌 카라굴리안)의 택시가 세차장을 통과할 때까지의 이물감은 이런 종류의 것이었을까.


운전석에 앉은 남자의 얼굴이 조수석에 앉은 트랜스젠더의 가랑이 사이에 파묻혀 있다. 약 120초에 걸친 이 시퀀스 동안, 아니 신디(키티나 키키 로드리게즈)가 다이나(미키 오하간)에게 폭력을 가하는 약 8초 남짓의 교차편집을 제외한 약 112초의 시간 동안, 우리는 반강제적으로 택시 뒷자리에 앉아 자신의 입과 손을 쉴 새 없이 흔들어대는 한 남자의 행위를 목도해야만 한다. 앞서 그의 택시 조수석에 탑승한 매춘부가 트랜스젠더가 아니라는 이유로 쫓겨나는 장면이 있었기에 그나마 충격이 덜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가 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이 시퀀스와 구성이 상당히 유사한 시퀀스는 마지막에 있다. 얼굴에 소변을 뒤집어쓴 신디를 위해 알렉산드라(마이아 테일러)가 가발을 벗어주는 세탁소에서의 시퀀스. 두 시퀀스 모두 어떤 의미에서든 '위로'라는 행위를 공유한다. 위로의 방식도 유사하다. 남근과 가발을 건네주는 형태의 위로. 이는 모두 알렉산드라에게 '나는 사실 남자다 혹은 불완전한 여자다'라는 정체성의 시인을 요구하는 행위이다. 세차 기계가 차량 내부까지 닦아내지 못했듯, 세탁기는 신디의 더럽혀진 옷을 세척하지 못하고 윙윙 기계음만 내며 돌고 있다.

두 개의 시퀀스가 동일한 층위의 것임을 인정할 때, 세차장에서 라즈믹의 행위도 위안의 행위에 불과하다는 것에 동의해야 한다. 그와 동시에 그것이 견인했던 불편함은 '내 세계'에서만 통용될 뿐 '네 세계'에서는 불가함을 인정해야 한다.

트랜스젠더, 매춘부, 이민자가 중심이 된 이야기. 이렇듯 <탠저린>은 소외 계층에 천착하려는 듯 보인다. 이 지점에서 드는 의문. 그들 아니 그녀들의 삶 속으로 깊숙이 들어간 영화에 왜 2.35 : 1의 시네마스코프가 필요한 것인가. 물론 아이폰 5s로 촬영한 것을 스크린으로 옮기면서 발생하는 기술적 한계가 원인 일수도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 나는 정확한 설명을 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제작비의 한계가 낳은 결과물일 뿐이라고 말한다면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과 같은 의문을 갖는다. 모큐멘터리 스타일의 영화를 표방하려 했다면 홈 비디오처럼 찍는 게 더욱 생동감 넘치지 않았을까. 차라리 화면에 빈 공간을 최소화해 압박감을 전달해 주는 것이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라즈믹의 장모는 사위를 좇기 위해 택시에 올라탄다. '로스앤젤레스 자체가 잘 포장된 거짓말이야!' 택시 기사에게 읊조리던 그녀의 한마디가 아니었다면 본편의 배경이 어디인지 끝내 알 수 없었을 것이다. 미국 어딘가라고 짐작만 하고 있던 곳에 부여된 LA라는 아이덴티티. 모뉴먼트 밸리를 통과하면 도착하게 되는 미국의 서부 도시. 데미언 셰절이 재즈를 신격화하던 그곳. 공간의 정체가 탈로 나는 순간 본편의 화면비는 미장센 자체가 주제가 되었던 그 옛날 서부극을 소환해 낸다.

서부는 참 많이 변했다. 말에 올라 총을 들었던 그 시절의 사내들은 더 이상 이곳에 없다. 여자끼리의 문제라며 한발 물러나 마약을 태우는 체스터(제임스 랜슨)가 있고, 더럽혀진 입으로 어린 딸에게 서슴없이 입맞춤을 하는 라즈믹이 있다. 여성들의 상황은 더욱 처참하다. 포주에게 늘 몸을 내어준다고 말하는 다이나(미키 오하간)가 있고, 남편의 외도에도 그럴듯한 저항 한번 못하는 라즈믹의 부인 예바(루이자 네르시시안)가 있다.

알렉산드라와 그녀의 손님 존(스콧 크린스키)이 실랑이가 벌어졌다. 경찰차 앞 유리창을 통해 보이는 사태를 해결하는 것은 조수석에 탄 남성 경찰관이 아닌 운전석에 탄 여성 경찰관이다. 서부는 아니 21세기의 미국은 더 이상 남성들의 손에 맡겨질 수 없는 곳이다.

본편은 도넛 타임에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신디와 알렉산드라의 대화로 시작된다. 신디는 알렉산드라에게 가슴이 생겼다며 농을 던진다. 유방을 만들기 위해 여성 호르몬 주사를 맞는 남성들을 유방을 도려내 전사가 되었던 아마조네스의 일원들과 동일한 위치에 둘 수 있을까. 반남반녀의 존재들. 그것이 가능하다면, <탠저린>은 존 웨인이 신디와 알렉산드라로 치환된 일종의 로드 무비다. 이제 웨스턴의 수호자는 카우보이가 아닌 아마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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