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월급에만 의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2-2)
맞벌이인데도, 늘 외벌이처럼 느껴졌다.
수입은 들쭉날쭉했고, 생활은 늘 아슬아슬했다.
한 달 벌어 한 달 쓰는 일상이 반복됐고,
미래를 계획한다는 건 우리에겐 사치처럼 느껴졌다.
남편의 월급은 주택 대출 상환과 생활비,
그리고 약간의 저축으로 빠듯하게 쓰였다.
내 프리랜서 수입은 1년에 몇 번 들어오는 비정기적인 목돈.
그나마 저축을 유지할 수 있는 숨통 같은 존재였다.
그러던 어느 날, 코로나 시기.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흔들리며 세 달간 실직했다.
모아둔 돈으로 급한 불을 끄며 하루하루를 버텼지만,
'고정 수입이 끊긴다'는 건 상상보다 훨씬 더 큰 공포였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우리 둘 다 속으로는 한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이게 겨우 3개월인데도 이렇게 힘든데, 1년이면? 몇 년이면?'
그 생각만으로도 숨이 턱 막혔다.
마음의 준비만으론 버틸 수 없다는 걸 그때 처음으로 절감했다.
아이들은 아빠와 함께 있는 시간이 많아져 좋아했지만,
회사에서 제공되던 차량을 반납하자,
둘째 아이가 유난히 불안해했다.
차가 없어진 걸 감지했고, 시간이 지나자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빠는 왜 일 안 해?"
말끝을 흐리는 아이의 표정을 보며, 우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평소처럼 웃으려 애썼지만, 아이의 맑은 눈은 이미 변화를 읽고 있었다.
그 시기, 우리 부부는
아이들을 등교시키고 뒤 두 시간가량을 함께 걸었다.
아무 말 없이 걷기도 하고,
말없이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서로를 다독였다.
지인들도 소식을 듣고 하나둘 찾아왔다.
특히 가장의 무게를 아는 남자 지인들은
말을 잇지 못하고 우리 앞에서 울컥했다.
함께 울어주는 그 진심이
말보다 더 큰 위로가 되었다.
그럴 때면, 오히려 우리가
"우린 괜찮다"며 그들을 다독여야 했다.
그 마음들이 참 고마웠다.
하지만 아무리 괜찮은 척해도,
마음은 점점 예민해졌다.
사소한 말에 다투고,
평소라면 넘겼을 일에도 쉽게 날이 섰다.
그러다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내 귀에서 심장 뛰는 소리가 들려."
그 말에 숨이 멎을 줄 알았다.
평소엔 누우면 3초 만에 잠들던 사람이었다.
그가 그렇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평생 의지하던 바위 같은 사람이,
모래처럼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겉으론 허허 웃으며 넘겼지만,
그 무너짐은 우리 몸과 마음에 깊이 새겨지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퇴직금도, 밀린 월급도 받지 못한 상태.
게다가 내가 낙찰 성과로 벌어들인 돈까지 합치면
1억 가까운 금액이 미지급된 상황이었다.
나는 이 악물었다.
죽는 날까지라도 쫓아가, 단 1원 한 푼까지 받아내겠다는 마음으로.
사장의 가족들에게 직접 찾아가서라도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필요하다면, 1인 시위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우리 신랑이 어떤 사람인데,
10년 이상을 출퇴근 시간 없이, 힘든 환경에서도 의리 하나로 버텨온 사람이다.
그 모든 시간을 짓밟고 무시한 그 사장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하지만 더 아팠던 건..
그 모든 심정을 단 한 마디도 꺼내지 않고,
속으로만 삼키는 남편이었다.
나는 울었다.
억울해서,
분해서,
그리고 너무 속상해서.
무력감과 분노가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지금도 매달 50만 원씩,
마치 연금처럼 겨우겨우 돌려받고 있다.
이자도 없는 그 돈은 통장에 들어오지만,
기쁘지도 않고, 반갑지도 않은
'강제로 당첨된 연금복권' 같다.
숫자는 찍히지만,
그 숫자를 볼 때마다
마음 한 조각도 함께 찢겨 나간다.
그래도 불행 중 다행이라면..
그 돈이 아직도, 내게 돌아오고 있다는 것.
한참 시간이 흐른 뒤,
남편이 조용히 말했다.
"사장이 나한테 그러더라.
자기가 너무 큰 상처를 줬던 것 같다고... 미안하다고."
그 말을 듣는 순간,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밀려왔다.
이미 지나간 시간을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그 한마디가 남편에게, 그리고 나에게
조금은 숨을 쉴 틈을 만들어주었다.
분노와 무력감으로 얼어붙었던 마음 한 귀퉁이가
그제야 아주 조금, 풀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시간들은 내게
한 가지 또렷이 남겼다.
"믿음은 따뜻해야 하지만,
세상은 냉정하게 알아야 한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