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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최선교</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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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문학 평론을 합니다.</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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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03-06T00:36:20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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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끝장내고 싶어, 시작하고 싶어 (5) - 백은선,『가능세계』, 문학과지성사, 201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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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04-09T12:36:58Z</updated>
    <published>2023-04-09T06:39:42Z</published>
    <summary type="html">4. 나가며 : 눈이 내리는 풍경  나는 가장 이상한 것에서부터 시작하려고 했어 고백할 수 없는 시월에 대해 눈 이전의 계절에 대해 스스로를 알 수 없는 스스로에 대해 가장 불가해한 것에 도달하고 싶었어 눈이 내린다 눈이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 머리 위로 어깨 위로 손바닥으로 굽은 등위로 눈이 내린다 눈이 내린다고 누군가 말하지 않아도 눈은 내리니까 눈은</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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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끝장내고 싶어, 시작하고 싶어 (4) - 백은선,『가능세계』, 문학과지성사, 201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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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05-05T18:53:18Z</updated>
    <published>2023-04-09T06:39:29Z</published>
    <summary type="html">나는 눈이 내리는 바다 앞에 서 있다. 바닷물 위로 눈송이들이 떨어져 사라지는 것을 본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천년 동안 서 있었던 것 같다. 내내 그렇게 있으면 세상의 모든 접속사를 이어 만든 커다란 이불을 덮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amp;middot;&amp;middot;&amp;middot;&amp;middot;&amp;middot;&amp;middot;) 나는 아이에게 처음으로 언어를 가르쳐주는 심정이 되어, 스스로에게 겨우 하나씩</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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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끝장내고 싶어, 시작하고 싶어 (3) - 백은선,『가능세계』, 문학과지성사, 201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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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04-09T08:31:40Z</updated>
    <published>2023-04-09T06:38:51Z</published>
    <summary type="html">3. 끝은 다시 시작이 되고 : 접속사와 반복  여기가 마지막이면서도 다음이 있다고 말하는 시인은 &amp;ldquo;끝장내고 싶&amp;rdquo;은 마음과 &amp;ldquo;터무니없는 것을 시작하고 싶&amp;rdquo;은 마음을 한곳에 담아낸다. 끝내고 싶으면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은 하나로 합쳐져 &amp;ldquo;나는 하고 싶어 하다가 죽고 싶어 그런 것을 무어라 해야 할까&amp;rdquo;라는 물음으로 맺힌다(「가능세계」). 누군가에게 하고 싶은</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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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끝장내고 싶어, 시작하고 싶어 (2) - 백은선,『가능세계』, 문학과지성사, 201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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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05-14T00:04:35Z</updated>
    <published>2023-04-09T06:38:34Z</published>
    <summary type="html">2. 절망의 스포일러 : 혼합된 시제  첫 페이지를 펼치는 동시에 마지막 페이지를 함께 읽는 책이 있다고 생각해 본다. 시작하는 순간부터 결말을 알게 된 이야기는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백은선의 시에서는 이 고통이 언젠가 끝날 것이라는 희망이 금지된다. 처음부터 읽게 된 마지막 페이지에는 고통과 절규가 여전할 것이라고 적혀 있기 때문이다. 이야기를</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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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끝장내고 싶어, 시작하고 싶어 (1) - 백은선,『가능세계』, 문학과지성사, 2016.</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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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05-14T00:04:29Z</updated>
    <published>2023-04-09T06:37:49Z</published>
    <summary type="html">1. 절망을 읽는 방법   ─찾을 수 있을까 ─뭘? ─원인을, 원인의 원인을 ─「야맹증」 부분   &amp;ldquo;『가능세계』를 읽으면서 저는 절규를 형상화했구나 싶었어요. (&amp;hellip;&amp;hellip;) 시를 읽다 보면 미친 듯이 절규에 매달린다고 여겨집니다. 매달릴 게 절규밖에 없다는 몸짓 같다고 할까요.&amp;rdquo;* 동료 시인이 증언하는 백은선의 『가능세계』는 한 권 분량의 절규다. 처음부터 끝까</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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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아픈 여자의 &amp;lsquo;쇼&amp;rsquo;와 &amp;lsquo;부정성의 주체&amp;rsquo; (5) - 박서원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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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04-09T07:32:00Z</updated>
    <published>2023-04-09T06:36:57Z</published>
    <summary type="html">그러나 아픈 여자는 결국 피학적 &amp;lsquo;쇼&amp;rsquo;를 최후의 수행으로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한계를 지닌다. 그렇다면 박서원 역시 &amp;lsquo;쇼&amp;rsquo;를 연출함으로써 여성에게 허락된 유일한 승리인 &amp;lsquo;자기 포기&amp;rsquo;로 그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있는 것인가. 아픈 여자가 읽힐 수 있는 방법은 여전히 아픈 여자일 때뿐인 것인가. 만약 박서원식 고통의 종착지가 단순한 마조히즘적 &amp;lsquo;쇼&amp;rsquo;의 연출이라</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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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아픈 여자의 &amp;lsquo;쇼&amp;rsquo;와 &amp;lsquo;부정성의 주체&amp;rsquo; (4) - 박서원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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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04-23T20:16:53Z</updated>
    <published>2023-04-09T06:36:41Z</published>
    <summary type="html">4. 피학적 &amp;lsquo;쇼&amp;rsquo;의 우회성과 부정성의 전복  아픔의 상태가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에, 박서원의 시에서 아픔은 지키고 보호해야 할 것이 된다. 이는 은유로서의 질병이 가부장제의 폭력에 의한 여성 억압의 징후로만 그려진 기존의 독법과는 사뭇 다르다. 고쳐져야 할 것은 &amp;lsquo;나&amp;rsquo;의 아픔이 아니라, &amp;lsquo;나&amp;rsquo;의 아픔을 진단하려고 하는 자들이다. 사라져야 할 것은 화자의</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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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아픈 여자의 &amp;lsquo;쇼&amp;rsquo;와 &amp;lsquo;부정성의 주체&amp;rsquo; (3) - 박서원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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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04-09T06:50:14Z</updated>
    <published>2023-04-09T06:36:20Z</published>
    <summary type="html">3. 진단명 : 없음 혹은 &amp;lsquo;쇼&amp;rsquo;  물론 이것은 초월적 영웅이 되는 것을 허락받지 못한 존재가 시도할 수 있는 유일한 승리라는 점에서 반쪽짜리다. 박서원의 화자가 허락받은 것은 오직 고통을 통한 자기 포기로서의 승리로, 마조히즘적 주체를 탄생시킨다. 그러나 여성의 마조히즘은 쉽게 오독되거나 소거된다. 반쪽짜리 승리인 마조히즘은 특히 그것이 신체적 통증을 유</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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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아픈 여자의 &amp;lsquo;쇼&amp;rsquo;와 &amp;lsquo;부정성의 주체&amp;rsquo; (2) - 박서원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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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04-26T13:25:21Z</updated>
    <published>2023-04-09T06:36:00Z</published>
    <summary type="html">2. 마조히즘적 주체의 생명 본능  박서원 시의 화자는 고통을 먹고 자란다. 단순히 외부에서 유입되는 고통의 윤곽을 드러내는 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적극적으로 갈구한다. 박서원 시에서 고통은 주로 신체적인 통증이나 정신질환의 징후로 그려지는데, 화자는 구체적으로 신체 혹은 정신의 손상을 야기하는 바로 그 고통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야기되는 고통의</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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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아픈 여자의 &amp;lsquo;쇼&amp;rsquo;와 &amp;lsquo;부정성의 주체&amp;rsquo; (1) - 박서원론</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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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3-04-13T06:47:43Z</updated>
    <published>2023-04-09T06:35:34Z</published>
    <summary type="html">1. 들어가며  아프면서 여자인 것을 이야기하는 이 글은 쉽게 실패할 것이다. 아픈 여자라는 단어에 따라 나오는 그 &amp;lsquo;지겨운&amp;rsquo; 도식들을 떨쳐내기란 그렇게 쉽지 않다. 반복되는 단어들은 쉽게 낡아버린다. 이것이 위험한 이유는, 말이 담고자 했던 것 역시 무엇이든 상관없이 함께 낡아버린다는 점이다. &amp;lsquo;가부장제로 인한 여성의 억압&amp;rsquo;이라는 말에 담긴 &amp;lsquo;가부장제&amp;rsquo;나</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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