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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선우은실</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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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criticism-siloo</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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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문학평론가 선우은실입니다.</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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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7-28T10:08:39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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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내가,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7) - -최근 소설 속 삼인칭 서술 양상과 &amp;lsquo;당사자성&amp;rsquo;의 확대 가능성을 논하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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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2-10T00:41:25Z</updated>
    <published>2024-08-16T06:13:24Z</published>
    <summary type="html">* 이렇듯 최근 서사는 현실의 독자가 개별적인 자기 삶을 허구적 인물의 이야기에 투영함으로써 보다 보편적인 문제로 확장시킬 수 있게끔 시도하고 있다. 이것이 이 글에서 반복적으로 강조해 왔던 &amp;lsquo;서술자&amp;rsquo;의 문제임은 말할 것도 없다. 이제 우리는 일련의 문학이라는 허구적으로 상정된 세계를 통한 &amp;lsquo;당사자 되기&amp;rsquo;의 시도가 꼭 당사자 자신 내지는 일인칭이 아닌 형태</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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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내가,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6) - -최근 소설 속 삼인칭 서술 양상과 &amp;lsquo;당사자성&amp;rsquo;의 확대 가능성을 논하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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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8-27T06:52:19Z</updated>
    <published>2024-08-16T06:12:26Z</published>
    <summary type="html">outro.&amp;nbsp;삼인칭의 엄정함과 일인칭의 삼인칭화:&amp;nbsp;최은영과 문진영을 되살피며  최근 삼인칭 소설은 우리 시대의 현안이라고 할 수 있는 문제들을 복합적으로 다루는 과정에서 서술자적 자아를 전면화함으로써 총체적 전언을 시도하며, 또는 적극적으로 물러남으로써 그 숨긴 태도를 읽도록 요청한다. 이처럼 그 삼인칭 서술자의 활용에 차이가 있을 수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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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내가,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5) - -최근 소설 속 삼인칭 서술 양상과 &amp;lsquo;당사자성&amp;rsquo;의 확대 가능성을 논하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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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8-27T06:52:19Z</updated>
    <published>2024-08-16T06:07:30Z</published>
    <summary type="html">돌봄 소설 삼인칭의 거리 두기-공현진&amp;nbsp;「어차피 세상은 멸망할 텐데」를 중심으로  노동이라는 테마가 돌봄이라는 주제로 확장되고 있으며, 삼인칭으로 쓰이고 있다는 것은 박지영의 소설 「쿠쿠, 나의 반려밥솥에게」, 「장례세일」 등에서 또한 두드러지는 특징이다. 이 소설들에서도 얼핏 서술자적 자아가 엿보이지 않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노환 및 죽음을 상품화하는</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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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내가,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4) - -최근 소설 속 삼인칭 서술 양상과 &amp;lsquo;당사자성&amp;rsquo;의 확대 가능성을 논하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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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8-27T06:52:19Z</updated>
    <published>2024-08-16T06:00:56Z</published>
    <summary type="html">노동소설 삼인칭의 서술자적 자아-박지영의 소설을 중심으로 최근 박지영 소설의 일련의 행보는 이른바 &amp;lsquo;노동소설&amp;rsquo;의 새로운 국면을 예고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설집 『이달의 이웃비』(민음사, 2023)에 수록된 여러 편의 소설이 그렇거니와 『테레사의 오리무중』(자음과모음, 2024)에 묶인 세 편의 작품 역시 &amp;lsquo;노동&amp;rsquo;이라는 주제 의식을 전면적으로 보여 준다. 그</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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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내가,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3) - -최근 소설 속 삼인칭 서술 양상과 &amp;lsquo;당사자성&amp;rsquo;의 확대 가능성을 논하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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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8-27T06:52:19Z</updated>
    <published>2024-08-16T05:55:14Z</published>
    <summary type="html">&amp;lsquo;그&amp;rsquo;가 말하기를-삼인칭 서술자의 약진 이런 점을 고려할 때, 최근 서사에서 이야기 전달자로서 삼인칭 서술자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정주아의 논의에서 충분히 이야기된 것처럼, 비교적 근래의 문학에서 두드러지는 형태는 삼인칭이 아니라 일인칭이었다. &amp;lsquo;~해도 괜찮아&amp;rsquo;류의 에세이가 부쩍 쏟아져 나왔던 2010~2020년대의 현상에서 두드러지는 일인칭 시점의</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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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내가,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2) - -최근 소설 속 삼인칭 서술 양상과 &amp;lsquo;당사자성&amp;rsquo;의 확대 가능성을 논하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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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8-27T06:52:19Z</updated>
    <published>2024-08-16T05:52:36Z</published>
    <summary type="html">&amp;lsquo;대(大)서사 시대&amp;rsquo;의 삼인칭 말하기와 당사자성의 확장 피터 브룩스는 최근 저서*에서 서사가 남용되고 때론 오용되는 시대에 필요한 것은 서사 그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읽는 방법과 관점임을 강조한 바 있다. 오늘날 서사는 그저 재미있는 이야기만은 아니다. 서사는 무언가를 말하고 듣고 이해하고 해석하는 전 과정에 &amp;lsquo;어떻게&amp;rsquo;라는 방식으로 개입함에 따라 사회적 메</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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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내가, 그리고 그가, 그렇게 말했다(1) - -최근 소설 속 삼인칭 서술 양상과 &amp;lsquo;당사자성&amp;rsquo;의 확대 가능성을 논하며</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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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8-27T06:52:19Z</updated>
    <published>2024-08-16T05:48:32Z</published>
    <summary type="html">intro.&amp;nbsp;시점(point of view)의 문제 &amp;lsquo;내가 그렇게 말했다&amp;rsquo;와 &amp;lsquo;그가 그렇게 말했다&amp;rsquo;는 어떻게 다른가. 하나는 일인칭 서술, 하나는 삼인칭 서술이다. 두 문장이 하나의 상황에 대한 &amp;lsquo;다른 표현&amp;rsquo;이라고 할 때, 이 두 문장이 지니는 차이는 단지 그뿐일까? 전하려는 상황 자체는 달라지지 않았으니, 주어가 달라졌을 뿐일까? 나는 이 글에서 두 문장</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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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x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y화하면서 분열(5) - -박서련과 이미상을 중심으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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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8-27T06:52:19Z</updated>
    <published>2024-08-16T05:36:14Z</published>
    <summary type="html">outro.&amp;nbsp;자기 언어화에 대한 욕망이 도달하는 곳,&amp;nbsp;분열 &amp;lsquo;분열&amp;rsquo;은 여성이 자기를 구성하는 젠더 정치 및 그로부터의 저항하기 위한 일련의 실천들을 수행해 나가는 과정에서 &amp;lsquo;극복&amp;rsquo;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여성을 구성하는 원리이거나 여성 그 자체일 수 있다. 여성이 남성 중심적으로 언어화되고 구조화되어 있는 &amp;lsquo;여성&amp;rsquo;을 대리 욕망하는 자장 속에서 완전히 자유</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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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x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y화하면서 분열(4) - -박서련과 이미상을 중심으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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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8-27T06:52:19Z</updated>
    <published>2024-08-16T05:35:08Z</published>
    <summary type="html">이 소설은 사회적 약자로서 모멸적 경험을 겪는 수진이 (문자 그대로) &amp;lsquo;언어&amp;rsquo;를 획득하면서 자기의 언어-세계를 구축/획득해 나간다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여기에는 크게 두 가지 서사 줄기가 가로놓여 있다. 하나는 수진은 자신이 근무하는 병원의 원장으로부터 이른바 &amp;lsquo;부리기 좋은 사회적 약자&amp;rsquo;로 취급된 바 있다는 사실과 관련된다. 수진은 직장에서 자신을 &amp;ldquo;초대</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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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x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y화하면서 분열(3) - -박서련과 이미상을 중심으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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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8-27T06:52:18Z</updated>
    <published>2024-08-16T05:28:53Z</published>
    <summary type="html">2.&amp;nbsp;자기의 욕망을 자기화하면서 분열:&amp;nbsp;여성이&amp;nbsp;&amp;lsquo;언어&amp;rsquo;를 얻을 때 일어나는 일 -&amp;nbsp;이미상&amp;nbsp;「티나지 않는 밤  박서련의 소설의 언어적 형식이 &amp;lsquo;대리 욕망의 실천자&amp;rsquo;인 여성이 겪는 일종의 분열적 증상 가운데 하나라고 본다면, 이미상의 소설은 그 분열의 &amp;lsquo;극복&amp;rsquo;이 아니라 이러한 분열 자체가 곧 여성의 욕망을 수행하는 언어가 될 수 있음을 보여 주는 독특한 사례다</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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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x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y화하면서 분열(2) - -박서련과 이미상을 중심으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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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08-27T06:52:18Z</updated>
    <published>2024-08-16T05:16:46Z</published>
    <summary type="html">1.&amp;nbsp;타인의 것을 적극적으로 자기화하면서&amp;nbsp;&amp;lsquo;분열&amp;rsquo;:&amp;nbsp;욕망이 거세된 자의 대리 욕망 -박서련&amp;nbsp;「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  「당신 엄마가 당신보다 잘하는 게임」(이하 「게임」)은 독특한 형식적 구조를 취하고 있다. 이 소설의 서술자는 인물을 &amp;lsquo;당신&amp;rsquo;이라고 칭한다. 이때 &amp;lsquo;당신&amp;rsquo;은 누구인가? 아들의 사교 활동 및 사회생활을 위해 아들이 원하는 것은 무</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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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x의 욕망을 적극적으로 y화하면서 분열(1) - -박서련과 이미상을 중심으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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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1-28T06:17:35Z</updated>
    <published>2024-08-16T05:11:00Z</published>
    <summary type="html">intro.&amp;nbsp;분열된 언어와 여성의 욕망 여성은 어떻게 욕망하는가. 여성의 분절적 언어성이 곧 사회 안에서의 여성인 &amp;lsquo;나&amp;rsquo;를 인식하고 드러내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할 때, 이는 여성 젠더가 사회에서 어떤 식의 요구를 욕망으로 전유해야만 하며 그 과정에서 어떤 분열이 발생하는지를 파악하는 주요한 요소가 된다. 이에 여성이 욕망을 표출하는 것과 유비적 상관성을 지</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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