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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박웅</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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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me>wungp</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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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subtitle>책을 통한 사유의 울림을 나누고, 삶의 이야기로 배움과 기쁨의 과정인 인생의 여정을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sub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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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4-10-01T07:37:00Z</upda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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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모순의 생애 - 레프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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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2-21T04:45:44Z</updated>
    <published>2026-02-21T04:45:44Z</published>
    <summary type="html">&amp;ldquo;이반 일리치가 지나온 인생사는 가장 단순하고 평범하면서도 가장 끔찍한 것이었다.&amp;rdquo; ​ 이 문장은 모순을 품고 있다. 단순하고 평범한 삶이 어째서 끔찍할 수 있는가. 그러나 소설을 다 읽고 나면, 이 문장은 과장이 아니라 진술에 가깝다. ​ 이반 일리치의 삶은 문제 없어 보였다. 그는 성실했고, 사회적 기준을 따랐으며, 윗사람들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의무로</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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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랑, 결핍에서 시작해 아름다움으로 나아가다 - 플라톤의 『향연』에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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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6-01-07T09:01:29Z</updated>
    <published>2026-01-07T09:01:29Z</published>
    <summary type="html">우리는 사랑을 말하지만, 정작 사랑이 무엇인지는 잘 모른다. 누군가에게 마음이 설레고, 함께 있으면 기쁘고, 보고 싶어지는 마음. 이 흔들림을 우리는 사랑이라 부른다. 사랑을 감정이라 믿고, 마음의 움직임을 사랑의 본질로 여긴다.  그러나 인간의 삶을 가장 깊이 움직여온 힘이 사랑이라면, 그 사랑이 단순한 감정일 리는 없다. 사랑의 신 에로스를 찬미하는 『</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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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판단을 멈출 때, 비로소 평정이 열린다 -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의 『피론주의 개요』에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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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31T13:14:56Z</updated>
    <published>2025-12-31T13:14:56Z</published>
    <summary type="html">우리는 언제나 너무 쉽게 단정한다. 사람은 이렇고, 세상은 저렇고,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 확신은 우리를 안정시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의 불안은 확신에서 시작된다.  섹스투스 엠피리쿠스는 이 사실을 정확히 꿰뚫었다. 그는 말했다. &amp;ldquo;독단주의자는 자신의 주장을 진리로 단정한다.&amp;rdquo;  여기서 &amp;lsquo;독단&amp;rsquo;이란 단지 주장을 강하게 말하는 태도가 아니다</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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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유를 삶으로 증명하다 -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명』에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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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24T13:06:29Z</updated>
    <published>2025-12-24T13:06:29Z</published>
    <summary type="html">철학은 단지 사유일까. 철학은 종종 관념의 세계에 머물지만, 인간의 삶은 현실 속에서 갈등하고 흔들린다. 그렇다면 철학적 사유는 실제로 우리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소크라테스는 이 질문에 삶으로 답한 사람이었다. 그는 철학을 말이 아니라, 자신의 삶 전체로 증명하려 했다.  아테네의 악영향자로 고발당해 법정에 선 그는 말했다. &amp;ldquo;나는 내가 모른다는</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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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확실성을 넘어 결단으로 존재를 세우다 - 키르케고르의 『두려움과 떨림』에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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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17T09:07:27Z</updated>
    <published>2025-12-17T09:07:27Z</published>
    <summary type="html">인간은 본질적으로&amp;nbsp;이유를 찾는 존재다. &amp;lsquo;왜&amp;rsquo;라는 질문은 인간 의식의 가장 근원적인 본능이다. 우리는 이유 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견디기 어렵기에, 삶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끊임없이 스스로 만들어내려 한다.  그래서 인간은 이 질문 앞에서 종교, 철학, 과학을 세워왔다. 종교는 &amp;lsquo;신의 뜻&amp;rsquo;을 통해 세계에 의미를 부여했고, 철학은 존재를 설명하는 &amp;lsquo;이성의 질</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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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앎의 한계, 그 경계 위에 선 인간 -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에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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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09T23:38:32Z</updated>
    <published>2025-12-09T23:38:32Z</published>
    <summary type="html">인간은 알고 싶어 하는 존재다. 영혼은 존재하는가, 나는 자유로운가, 세계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신은 있는가. 우리는 언제나 궁극적인 물음 앞에 선다.  칸트는 이 자리에서 담담히 묻는다. &amp;ldquo;인간은 어디까지 알 수 있는가?&amp;rdquo;  그는 인간이 세계를 이해하려는 욕망이 종종 인간이 실제로 알 수 있는 능력을 넘어선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그리고 바로 그 지점에서</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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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의심을 통해 존재의 근거를 세우다 - 데카르트의 『성찰』에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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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2-03T04:16:27Z</updated>
    <published>2025-12-03T04:16:27Z</published>
    <summary type="html">우리는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생각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생각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은, 그 생각이&amp;nbsp;판단의 절제를 품고 있을 때다.  데카르트는 말했다. &amp;ldquo;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amp;rdquo;  이 문장은 단순한 논리의 명제가 아니다. 그는 모든 것을 의심했다―감각도, 기억도, 세상의 존재마저도. 그러나 그 모든 것을 의심하는 순간조차,</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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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필연, 그 속에서 자유를 깨닫다 - 스피노자의 『에티카』에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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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1-27T02:08:40Z</updated>
    <published>2025-11-25T23:29:53Z</published>
    <summary type="html">사람들은 흔히 자유를 &amp;lsquo;선택의 다양성&amp;rsquo;으로 이해한다. 입맛에 맞는 점심을 고르고, 취향대로 옷을 입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아가는 것.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자유롭다고 믿는다.  하지만 스피노자는 말한다. &amp;ldquo;인간은 자신의 행동들을 의식하고 있지만, 그 원인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에 자유롭다고 믿는다.&amp;rdquo;  그에 따르면, 신은 자연 그 자체다. 모</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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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절제, 소유를 버리는 자유의 기술 - 세네카의 『인생론』에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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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1-18T23:17:10Z</updated>
    <published>2025-11-18T23:17:10Z</published>
    <summary type="html">우리는 여유로워질 수 있을까. 하루는 일로 채워지고, 마음은 불안으로 쫓긴다. 타인의 기대와 사회의 요구에 따라 바쁘게 움직이지만, 정작 내가 바라는 삶은 그 어디에도 없다. 가까워지려 애쓸수록 더 멀어진다. 내일을 위해 오늘을 저당 잡힌 채 살아가지만, 이상하게도 삶은 늘 부족하고 불안하다.  분주히 살아가는 우리에게 세네카는 조용히 말한다. &amp;ldquo;우리가 가</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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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평정, 흔들림 속의 고요를 배우다 -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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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1-12T01:25:29Z</updated>
    <published>2025-11-12T01:25:29Z</published>
    <summary type="html">세상은 매일 우리를 흔든다. 타인의 말, 예기치 못한 일, 의도와 다른 결과, 감정의 파도 속에서 마음은 쉽게 휩쓸린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세상을 바꾸는 힘이 아니라, 흔들림 속에서 나를 지키는 힘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그것을 평정이라 불렀다.  그는 말했다. &amp;ldquo;우주는 변화이고, 삶은 의견이다.&amp;rdquo;  그에 따르면, 자연은 로고스―합리적 질서―에</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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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판단, 통제할 수 없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일 - 에픽테토스의 『엥케리디온』에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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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1-07T00:18:47Z</updated>
    <published>2025-11-07T00:18:47Z</published>
    <summary type="html">우리는 매일 흔들린다. 친구는 내 마음을 몰라주고, 노력의 대가는 다른 이에게 돌아가며, 마주치는 이들은 불친절하다. 우리의 시선은 언제나 내 안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있다.  불확실한 세상 속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확실함을 찾으려 하지만, 세상은 예측할 수 없고, 사람은 결코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그때마다 마음은 요동치고, 평정은 멀어진다.  에픽테</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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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공동체, 함께 살아가는 기술 -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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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1-02T06:00:41Z</updated>
    <published>2025-11-02T06:00:41Z</published>
    <summary type="html">인간은 홀로 설 수 있을까. 아니면 함께 있어야만 인간이 되는 걸까.  우리는 종종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다고 말한다. 혼자의 자유, 혼자의 고요, 혼자의 성취를 이상으로 그린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다. &amp;ldquo;인간은 본성적으로 정치적 동물이다.&amp;rdquo;  여기서 &amp;lsquo;정치적&amp;rsquo;이라는 말은 권력이나 제도를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본성적으로&amp;nbsp;함께 살아가</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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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이성, 혼란 속의 질서를 세우는 일 - 플라톤의 『파이돈』에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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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28T04:14:18Z</updated>
    <published>2025-10-28T04:14:18Z</published>
    <summary type="html">삶은 매일 조금씩 사라진다. 그 사라짐을 우리는 시간이라 부른다. 그래서 우리는 멈추지 않는 흐름을 아쉬워한다. 시간의 끝에서 마주하게 되는 죽음은, 결국 삶과의 이별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끝―세상에서 유일무이한 &amp;lsquo;나&amp;rsquo;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는 순간―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플라톤은 죽음을 두려움의 사건이 아니라&amp;nbsp;사유의 시작으로 보았다. 사형을 앞</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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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미덕, 내 안의 질서를 가꾸는 힘 - 아리스토텔레스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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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21T06:32:31Z</updated>
    <published>2025-10-21T06:32:31Z</published>
    <summary type="html">우리는 모두 행복을 원한다. 하지만 막상 &amp;lsquo;행복이 무엇이냐&amp;rsquo;고 묻는다면, 대답은 제각각이다. 누군가는 부와 성공을, 누군가는 인정과 사랑을 말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어떤 대답도 오래가지 않는다. 행복은 손에 쥐려는 순간 흩어지고, 채워졌다고 믿은 만족은 곧 결핍으로 돌아온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런 인간의 추구를 오래된 착각이라 했다. 그에게 행복은</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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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정의, 자기 자리를 지키는 삶 - 플라톤의 『국가론』에서</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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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17T16:44:23Z</updated>
    <published>2025-10-15T06:12:27Z</published>
    <summary type="html">정의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정의를 거대한 무엇으로 생각한다. 세상이 공정해야 하고, 법이 공평해야 하며, 약자가 보호받아야 한다고 말한다. 정의는 언제나 &amp;lsquo;세상을 바로 세우는 일&amp;rsquo;처럼 들린다.  하지만 플라톤은 『국가론』에서 뜻밖의 말을 남긴다. &amp;ldquo;모든 이가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것, 그것이 정의다.&amp;rdquo;  그는 정의를 제도나 법의 문제가 아니라, &amp;lsquo;각자가</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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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프롤로그 - 철학, 나를 돌아보는 일</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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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13T06:59:56Z</updated>
    <published>2025-10-13T06:59:56Z</published>
    <summary type="html">우리는 매일 생각한다. 하지만 그 생각의 대부분은 살아남기 위한 계산에 가깝다. 무엇을 먹을지, 어떻게 일할지, 어떻게 잊을지. 그러나 철학이란 그런 생각의 방식과는 다르다. 철학은 계산이 아니라 머무름의 사유, 즉 세상 속에서 나 자신이 누구인가를 묻는 일이다.  나는 철학을 학문으로 깊게 배우지는 않았다. 다만 철학자들의 문장 속에서 삶의 언어를 발견했</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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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에필로그 - 다시, 느낀다는 것</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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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10T10:18:14Z</updated>
    <published>2025-10-10T10:18:14Z</published>
    <summary type="html">돌아보면, 이 모든 글은 거창한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잠시 멈춰 서서 귀를 기울이고, 오래 바라보고, 조용히 느낀 것들에 대한 기록이었다. 한때는 너무 당연해서 눈길조차 주지 않았던 것들이, 지금은 삶을 깊게 물들이는 풍경으로 다가온다.  삶은 거대한 사건이 아니라, 이렇게 작은 변화들이 모여 만들어지는 것임을 이제야 안다. 풀벌레 소리</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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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사람&amp;amp;시간] 아이, 내 안을 비추는 거울</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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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24T09:29:09Z</updated>
    <published>2025-10-09T13:55:17Z</published>
    <summary type="html">토요일 오전, 햇살이 거실 가득 쏟아졌다. 정오가 가까워지는데도 방 안은 고요했다. 주말을 맞아 집에 온 아들은 여전히 자고 있었다. 문을 열고 말했다. &amp;ldquo;여태 자? 해가 중천이다. 얼른 일어나라.&amp;rdquo;  아들은 눈을 반쯤 뜨더니 나에게 묻는다. &amp;ldquo;아빠, 몇 시야?&amp;rdquo; &amp;ldquo;열두 시 다 됐어.&amp;rdquo; &amp;ldquo;응, 알겠어.&amp;rdquo; 그리고는 다시 이불 속으로 몸을 숨겼다.  잠시 후</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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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몸&amp;amp;인식] 느림, 문 앞에서 다시 배우는 삶</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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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24T09:31:06Z</updated>
    <published>2025-10-08T13:09:23Z</published>
    <summary type="html">늘 문 앞에서 조급했다. 누군가 나오길 기다릴 때면 문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문이 열리기도 전에 한 발짝 먼저 들어서곤 했다. 그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날은 처음으로 문 앞에서 멈춰 설 수 있었다. 숨을 고르고, 기다릴 수 있었다.  독일에 사는 처고모님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듣고 처가에 인사를 드리러 가기로 했다. 평소보다 일찍 퇴근</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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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itle>[빛&amp;amp;색] 같은 바다, 다른 눈</ti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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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pdated>2025-10-09T06:53:46Z</updated>
    <published>2025-10-07T14:44:52Z</published>
    <summary type="html">바다는 하루에도 몇 번씩 표정을 바꾼다. 아침 햇살을 받은 바다는 옅은 청색으로 투명하게 빛나다가, 한낮에는 짙은 푸름으로 깊이를 드러낸다. 해가 기울 무렵이면 황금빛이 물결 위에 흩어지고, 달빛이 뜨는 밤에는 은빛 윤슬이 잔잔히 흔들린다. 같은 바다인데도 매 순간 다른 바다다. 그래서 바다는 언제나 낯설고도 신선하다.  나는 그 바다를 자주 찾았고, 바라</summa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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