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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스미다 May 03. 2024

같은 반 엄마 '남편'이  '나'를 안다고 했다.

"혹시 ㅇㅇ고등학교 나오지 않았어요?"

".... 네? 맞아요. 어떻게 아셨어요?"

"제 남편이 ㅇㅇㅇ이에요. 땅이 엄마 보더니 알아보더라고요. 자기 고등학교 동아리 후배라고 하던데...."




여름을 넘어가는 뜨거운 햇살에 찌푸려지던 미간은 당최 더 당겨질 수 없을 만큼 좁혀지다 물음표가 생겼다. 그녀의 입에서 나온 '그 선배' 이름을 듣고 20년도 넘은 기억을 더듬다 '쿰쿰한 교실 속 동아리 면접을 보던 날'이 생각났다. 그리곤 이내 급식소의 밥 짓는 냄새와 흩날리는 교복 치마, '다다다다' 뛰어다니는 하얀 실내화 속 어렴풋한 내 청춘의 한 챕터가 상영됐다.


"자기는 찔리는 게 없다던데요? 아마 땅이 엄마가 찔릴 거라며, 동아리 내에 오래 사귄 남자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랑 헤어진 뒤 서로 마주칠 일을 안 만들었다고. 저희 결혼식 사진에도 없더라고요."


안 지 얼마 안 된 학부모였다. 같은 엘리베이터에서 종종 마주치던 엄마였고, 같은 반이 된 이후에야 인사를 건네며 지냈다. 참 어색한 사이였다. 그런데 이 학부모 입에서 '그 선배' 이름이 나오자, 우리 사이에는 '어이없는'이라는 형용사가 추가 되었다. 참으로 무례했다. 내 지난 과거가 어찌 됐든 나만의 추억이 그들의 입에 가볍게 오르내리는 점이 싫었다. 모든 게 '그 선배' 입장이었다. 자기가 바라본 내 인생을 흩날리는 민들레씨보다 더 가볍게 훅 불어버려 수정할 수조차 없었다. 날카로운 햇살과 함께 서늘한 기운이 한 번씩 등을 훑고 지나갔고 아이는 벌써 하교했지만, 허공을 떠돌던 눈빛은 지난 20년 속 교실에 갇혀 있었다.


© unsplash


"나, 그 누나 좋아해."

"고백해 봐. 언니도 너한테 관심 있는 거 같아."


동아리 선배를 좋아하는 동기에게 연애 상담을 해줬다. 결국 누나를 향하던 마음은 방향을 틀어 나를 향해왔고, 우리는 17살의 설익은 연애를 이어갔다. 간질거리게 좋아하는 마음은 '수험생'이라는 복병 앞에 더 이상 끈을 이어갈 수 없었고 헤어짐을 당한 채 문제집으로 눈길을 박아야만 했다. 그리고 어떻게 다시 만났던 것도 같다. 기억도 가물가물하지만, 수험생의 신분이 사라지자 우리의 연애도 끝이 났다. 이번에도 이별을 고한 쪽은 그 아이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열기 속에 드디어 국토대장정이 끝을 맺었다. 서울의 한 대학교에서 성대한 끝을 함께 하고 있을 때 시리게 익숙한 번호가 눈에 띄었다.

"뒤돌아서 위에 창문 봐봐."


하필이면 그 아이가 재학 중인 대학교였다. 하필이면 수많은 군중 속, 나를 발견했다. 하필이면 문자를 받고 고개를 들었고, 우린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여자 친구가 있던 그 아이는 새로운 관계를 원했다.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전 남자 친구와 전 여자 친구라는 관계로 몇 번 만남을 가지던 중 이별을 고했다. 이번엔 내 쪽이다.

"그만하자"

© unsplash

지금이 아니라면 더 이상 얽힌 끈을 끊어낼 수 없을 듯 했다. 다시 주도권을 빼앗긴 관계로 돌아가 과거의 인연에 덧칠할 것만 같았다. 싱그러운 초록의 계절에 회색 물감을 섞어 타락한 계절로 만들어 버릴 것만 같았으니깐. 그나마 교복의 냄새와 함께 추억할 만한 관계로 남기고 싶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주도권을 갖고 싶었다. 시작이 됐던, 끝맺음이 됐던 내 생각의 결로를 보여주고 싶었다. '더 이상 네 마음대로 할 수 없어.'




내 청춘의 페이지를 입맛대로 구긴 뒤 자신의 허영심을 덧입혔다. '학부모' 지위에 있는 나를 단번에 '자신의 고등학교 후배이자 지난 연애의 패배자'쯤으로 생각해 멋대로 입방아에 올렸다. 그들의 무례함은 두껍게 칠해진 시럽처럼 번쩍거렸고, 썩 좋아 보이지 않은 그 빛깔에 내 하루가 찡그려졌다. 하지만 이제 난 어른이다. 20년 전 풋풋한 청소년 이기엔 마음이 치밀하게 도타워져서 하루의 시럽에 인생이 망가지지 않는다. 그들의 시선이 어찌 됐든 난 학부모이기에, 내 아이들의 엄마이기에, 내 남편의 와이프이기에 시럽의 두께를 깨부수려 한다. 어쩌지, 아줌마는 이런 흩날리는 과거에 집착하고 머리 아플 시간조차 없거든. 그러니 그 입 좀 교양으로 채워주시겠어요?


That's enough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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