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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시드림 May 06. 2024

내가 덕질을 하지 않는 이유 1.

어느 날, 연예계를 그린 어떤 드라마에 내 이야기가 작은 에피소드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기자와 인터뷰를 하는데 숙취로 고생하는 배우가 대자로 드러누워 매체인터뷰를 이어가던 이야기. 


십 여년 전, 당시 많은 인기를 얻었던 드라마에 나온 주인공을 홍보했다. 기자들과 1대 1 종영 인터뷰가 5일 정도 잡혀 있었다. 인터뷰 장소는 삼청동의 한 카페였다. 인터뷰를 위해 그 곳까지 와 준 기자들에게 고마워했던 것도 잠시, 배우는 첫 날부터 약속된 시간보다 훨씬 늦게 모습을 드러냈다. 덕분에 약속된 시간에 자리를 찾은 사진 기자들에게 사과와 읍소를 담당했던 것은 나였다.


둘째 날도 별로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매니저가 집으로 배우를 데리러 갔더니 전날 술을 얼마나 마셨는지 난장판이 따로 없었다고 전했다. 


일은 둘째 날 오후부터 터졌다. 배우는 목디스크가 있다며 기자를 앞에 두고 카페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게 무슨 예의며 매너란 말인가. 그는 독립영화로 데뷔해서 이미지도 꽤 좋았고 매니아층의 팬덤도 형성하고 있는 배우였다. 나도 같이 일하기 전에는 꽤 호감을 갖고 있었던 배우였는데 스크린 밖에서의 행동은 처참했다. 


결국 그는 그날 오후 인터뷰 네 타임을 통으로 누워서 인터뷰했다. 그날 같은 자리에 있었던 기자들을 지금 만나면 아직도 그 에피소드가 흘러나온다. 자신이 좋아했던 그 배우가 가지고 있던 애티튜드가 정말 아쉬웠다고 전하는 목소리. 


그러고 보면 배우들과의 협업은 때때로 내게 남은 팬심을 모조리 앗아갔다. 영화 홍보를 시작하고 얼마 안되어서는 말로만 듣던 주연 배우들의 크레딧 싸움을 목도했다. 포스터에 누구 사진이 더 크게 들어갈건지, 누가 앞에 나올건지, 크레딧에 누구의 이름이 먼저 올라갈건지. 몇 날 며칠 이어지는 크레딧 싸움을 지켜보며 내가 지금까지 봐 왔던 선배 배우들의 이미지에 실금이 갔다. 그리고 몇 년 후, 드라마 홍보를 하며 또 다시 만났던 그 배우는 어김없이 크레딧 문제로 내 머리를 아프게 했다. 


어떤 작품의 제작보고회에서는 아이스커피가 없다고 ‘인터뷰 안 하겠다’ 으름장 놓는 배우를 만났다. 행사장을 나와서 10분을 걸어야 하는 카페를 수도 없이 왕복했다. 얼음이 녹으면 먹지를 않으니 미리 사둘 수도 없었다. 얼음만 녹았을 뿐인 멀쩡한 커피를 두고도 카페를 왔다 갔다 했다. 당시 한잔을 사면 하나를 찍어주던 커피빈 핑크카드에 하루만에 24개의 도장을 찍기도 했다. 무료 음료 두 잔이나 만들어 줘서 고맙다고 했어야 할까. 


지방 무대인사를 가기로 한 날 공항에 나타나지 않은 한 배우 때문에 멘탈이 바스러지는 일도 있었다. 컨디션이 안 좋다는 핑계였는데, 다음 날 다른 연예인의 결혼식에 모습을 드러낸 것을 보고 어린 마음에 풍성히 남아있던 인류애엔 조그마한 균열이 생겼다. 


배우로서 좋아하던 이들은 동료가 되고 난 후, 내게 팬심이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를 여실히 알게 해줬다. 20대 중반 이후로 나는 일은 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가지게 됐다. 그리고 대중의 사랑을 먹고 사는 그들을 그저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바라보게 됐다. '배우도 그럴 수 있지', '배우도 똑같은 사람이지' 덕질이라는 것은 그렇게 운명처럼 내게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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