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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Dec 16. 2015

거인

소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

뉴스 보기가 겁나는 세상이다. 특히 아직 나이 어린 아이들이 저지른 흉악 범죄의 소식을 접할 때면, 자식 키우는 부모로서 충격의 강도가 더 크다. 놀란 가슴에서 나도 모르게 솟아오르는 말. “세상이 어찌 되려고 애들이 저러냐...” 내가 해 놓고도 좀 미안한 말이다. 모든 것을 아이들 잘못으로 돌리고 있으니까. 사실은 이런 말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세상이 어찌 되었길래 애들이 저러냐...” 먹이를 찾아 헤매는 토끼를 몰아붙이듯이 이 사회와 어른들이 아이들을 극한의 상황으로 내몰고 있으니까 말이다. 김태용 감독의 ‘거인’은 이런 현실을 비추고 있다. 영화는 무책임한 부모와 무자비한 사회의 폭력 앞에 거인의 껍질을 뒤집어쓰고 살아남으려는 소년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일하지 않는 아빠(김수현 분). 미안하다는 말만 쏟아놓는 엄마(김재화 분). 아무도 자신을 책임지려 하지 않아서 열일곱의 영재(최우식 분)는 집을 나와 보호시설에서 산다. 원장부모(강신철, 이민아 분)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그는 입속의 혀처럼 군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아서 신부가 되겠다고 하며 모범생처럼 산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창고에서 후원물품인 운동화를 빼돌려 용돈벌이를 한다. 남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자기 몫은 요령껏 챙기는 모습이 아이답지 않게 영악하다. 능력은 없는데 어떻게든 생존하기 위해 조직의 비위를 맞추며 뒤로는 온갖 비리를 저지르는 기성세대의 모습과 다를 바 없다.


영재는 왜 그렇게 되었을까?


낳아 준 부모의 무책임함 때문인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면 영재를 길러 준 원장부모는 어떠한가? 아이들을 학대하거나 보조금 욕심을 부리거나 하는 사람들은 아니다. 아이들 밥 챙겨주고, 잘못했을 때 혼을 내는 모습은 우리 주변의 부모들과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점점 다른 점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선 아이를 보듬어 주는 가슴이 없었다. 나의 아내는 정말 무섭게 아이들을 혼낸다. 영화 속의 원장부모보다 훨씬 무섭다. 하지만 혼낸 후에는 꼭 아이를 안아 준다. 엄마 품속의 아이는 대성통곡을 하며 서러움을 비워 내고 사랑으로 가슴을 채운다. 둘의 관계는 그렇게 끈끈하다. 원장부모에게는 그 끈끈함이 없었기에 영재는 혼자만의 궤도에서 일상을 견뎌야 했다.


또 한 가지 다른 점은 아이의 진심을 듣지 않는 것이었다. 영재가 왜 아버지에게 연락을 하지 않으며, 왜 신부가 되려고 하는지 제대로 묻지 않는다. 아이의 이유보다는 자신의 상식과 보호시설의 규칙에 따라 아이들을 판단할 뿐이다. 며칠 전 나의 일이다. 요즘은 엄마 곁에서만 자려고 하는 딸아이가 서운해서 떼를 썼다. 뜻밖에도 딸아이는 아빠 옆에서 자기 싫다고 뚜렷하게 말하는 것이었다. 왜냐고 물었더니, “아침에 눈뜨면 아빠는 없으니까 싫어.”라고 대답했다. 그 말이 오히려 더 따뜻해서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아이의 행동에는 다 이유가 있다는 것을. 자신에게 이유를 묻는 사람이 없으니 영재는 진심을 드러낼 일도 없었다. 자신의 진심보다는 원장부모나 후원자, 신부님이 원하는 모습을 드러내는 데 익숙하다. 그렇게 자기 자신까지 속여 가면서 만들어 온 생존의 가면은 아이의 본래 모습보다 훨씬 더 거대한 ‘거인’의 껍데기가 되고 만 것이다.


이처럼 영재를 조로(早老)의 소년으로 만들어 버린 어른들의 혐의는 윤미(박주희 분)의 모습을 통해 선명해진다.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공부해 서울대에 진학한 윤미. 그녀에겐 사납게 욕을 퍼붓지만 사랑으로 그녀를 보살피는 엄마가 있었다. 윤미의 엄마(박명신 분)가 고기를 구워 연신 영재의 입으로 넣어 줄 때의 따뜻함. 영재가 비로소 아이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영재도 그런 환경 속에서라면 제 나이에 맞게 생각하고 행동하며 바르게 자랄 수 있지 않았을까?


주변 이야기처럼 생생해서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영화로서는 미덕이겠지만, 한 편의 영화로 우리의 현실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슬펐다. 대통령까지 나서서 출산을 장려하는 나라. 아이들이 태어나지 않고, 아이들이 아이로서 자라지 못하는 나라. 이 나라에서 아이들이 사라지고 있다. 천방지축이어도 아이니까 이해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나라, 어른들이 책임지고 아이들의 꿈과 끼를 키워 주는 나라. 그런 나라가 아니다.


우리에게 소년을 위한 나라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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