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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재우 Mar 22. 2016

스포트라이트

‘카나리아’가 사는 세상

어느 날 장례식에서 그를 실제로 보게 되었다. 회사 팀원이 상(喪)을 당해 찾은 장례식장에 그는 상주(喪主)로 앉아 있었다. 탐사보도 전문 프로듀서였던 그는 세상의 욕망에 가려 은폐된 진실을 만천하에 드러내 보였다. 그 충격은 상당했고, 대가는 참혹했다. 그는 설 자리를 잃고, TV 화면에서 사라져 버렸다.


그런 그가 팀원의 아버지로서 내게 조용히 말했다. “자식들도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제 자식이라는 흔적이 드러나지 않도록 감추며 살았습니다.”

여느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자식 걱정에 목이 메는 모습을 보면서 그에게 큰 빚을 졌음을 깨달았다.


그는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언론인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그 뒤로 우리는 각성하여 세상을 좀 더 나은 쪽으로 바꿔야 했다. 하지만 우리는 쉽게 분노하고 빠르게 잊을 뿐이었다. 그러면서 비밀을 누설한 형벌로 오직 그만 희생되고 말았다.


토마스 맥카시 감독의 ‘스포트라이트’ 속의 언론인들은 달랐다. 그들도 진실을 파헤치려고 시스템에 맞서 싸웠지만, 우리의 경우처럼 희생되지는 않았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부럽고, 부끄러웠다. 그 감정의 깊이는 영화의 내용이 실화에 기반을 두고 있는 만큼 더욱 무겁게 느껴졌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다. 미국의 3대 일간지 중 하나인 보스턴 글로브 내 ‘스포트라이트’ 팀이 가톨릭 보스턴 교구 사제들의 아동 성추행 사건을 끈질기게 취재하여 진실을 세상에 알린다는 내용이다. 감독은 이 단순한 이야기를 개성이 뚜렷한 취재팀 구성원들의 앙상블 위에 표현함으로써 입체감을 더하고 있다. 전체적으로는 호들갑스럽지 않고 묵직하게 이야기를 끌고 감으로써 인물들의 뚝심과 저널리즘의 성숙함이 자연스럽게 느껴지도록 한다.


먼저 인물들을 살펴보자. 타지인 ‘플로리다 출신의 유대인’ 신임 편집국장 마티 배런(리브 슈라이버 분)은 가톨릭이 절대권력인 보스턴의 시스템에 길들여져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가톨릭의 스캔들을 문제시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취재해 볼 것을 제안한다. 제삼자의 관점에서 이성적인 판단을 하며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취재의 중심을 잡아가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배려심도 지니고 있어서 자신의 지난 잘못을 자책하는 월터 로빈슨(마이클 키튼 분)에게 위안이 되는 말을 건네기도 한다. 냉철한 머리와 따뜻한 가슴을 가진 마티는 바람직한 저널리즘을 형상화한 인물이 아닐까 싶다.


정통 보스턴 사람인 편집자 월터 로빈슨은 학연과 지연으로 얽힌 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독립적으로 진실에 다가간다. 그의 목적은 잘못된 세상을 바로잡는 것이다. 그래서 ‘개인이 아닌 시스템’에 집중한다. 단순히 특종을 바랐다면, 일찌감치 추기경의 잘못을 1면에 걸고 단맛을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다른 팀원들을 설득하며 시스템 전체의 비리를 고발할 수 있는 기사를 준비한다. 사욕보다는 공리를 추구하는 그의 자세는 언론인의 기본을 생각하게 한다. 더구나 이전에 자신이 저지른 커다란 잘못까지 털어놓는 그의 용기는,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는 자신에게도 솔직해야 함을 보여 준다.


마이크 레젠데스(마크 러팔로 분)와 샤샤 파이퍼(레이첼 맥아담스 분), 맷 캐롤(브라이언 다아시 제임스 분)은 일반인으로서의 감정과 언론인으로서의 역할 사이에서 번민하는 모습을 드러낸다. 피해를 입은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추악한 비리에 분노하는 마이크, 자신의 동네에 성추행 전력이 있는 신부가 있다는 것을 알고 동네 아이들에게 그 사실을 빨리 알려서 피해자를 줄이고 싶어 조바심이 난 맷, 기사가 보도될 경우 1주일에 3번 교회에 가는 할머니가 받게 될 충격을 걱정하는 샤샤. 그들은 결국 그 괴로움을 견뎌 내고 언론인으로서의 소임을 다한다.


이처럼 이 영화에서는 다양한 성격을 드러내는 인물들이 한데 어우러져 하나의 사건을 대하는 저널리즘의 다양한 입장과 관점을 입체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표현에 있어서는 가해 상황을 묘사하여 관객의 말초적인 감각을 자극하거나 기자들의 취재담을 과장하여 인물을 영웅화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현재까지 고통받는 피해자의 상황을 그대로 보여 줌으로써 가톨릭 권력의 위선과 추악함을 묵직하게 전달한다. 그래서일까? 영화의 여운이 참 오래간다.


광산 안에 유독가스가 꽉 찼을 때 카나리아는 소리 내 울어야 한다. 그리고 광부들은 즉각 그 경고에 반응해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 ‘스포트라이트’에 그려진 언론인들의 활약상은 카나리아의 역할을 상기시킨다. 물론 스포트라이트 팀의 보도가 세상을 완전히 바꾸지는 못했다. 권력은 다른 곳으로 피신하여 아직도 유지되고 있으니까. 하지만 스포트라이트 팀의 기사가 나가고 사무실로 폭주하는 제보 전화는, 그들의 경고에 세상사람들이 반응했음을 보여 준다. 그들은  모두 위협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 속 그곳은 ‘카나리아’가 사는 세상이다.


지금 여기 우리 사회는 어떤가? 유독가스가 가득해도 카나리아는 울지 않는다. 어쩌다 들릴 듯 말 듯 카나리아 한 마리가 울어도 사람들은 반응이 없다. 아마 숨통이 끊어지기 직전까지 생계를 위해 땅 파는 일에 몰두하겠지... 이런 현실은 재난영화의 클리셰를 보는 것 같아 두렵다. 이 암담한 상황을 영화 ‘스포트라이트’가 많은 사람들에게 깨우쳐 주기를 바란다. 그래서 다시 이곳이 건강한 ‘카나리아’가 사는 세상이 되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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