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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날마다 좋은 ㅎㅏ루 Feb 23. 2020

흑맥주여, 어둠의 터널을 달려라

맥주책 출간 프로젝트 - 맥주와 스타일 편




우리가 흔히 흑맥주라 부르는 맥주 스타일은 생각보다 다양하다. 흑맥주를 단순히 검은 맥주라고 치부할 때, 어둡고 검은 색에 가까운 라거 계열의 흑맥주에는 둥켈과 슈바르츠비어, 에일 계열에서는 스타우트나 포터가 있다. 어두운 범위를 조금 더 확장하면 다크 브라운 에일이나 아이리쉬 레드 에일도 흑맥주라 생각할 수 있다. 라거와 에일을 넘나 드는 이처럼 다양한 맥주를 흑맥주라는 하나의 장르로 묶을 수 있는 이유는 그 개념이 단순하고 명확하기 때문이다. 어두운 맥주는 모두 흑맥주라는 공식. 그런데 맥주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흑맥주라는 표현을 잘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조금 더 맥주 스타일 가이드에 가까운 표현을 사용한다. 한국에서 일반적으로 스타우트라는 이름으로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맥주를 꼽아 보면 기네스와 오비맥주의 스타우트이다. 그런데 두 맥주를 모두 마셔 본 사람이라면 두 맥주를 같은 스타일로 놓을 수 있을까? 아마 그렇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오비맥주의 스타우트는 사실 스타우트가 아니고 색깔만 어두운 라거이기 때문이다. 이번 글에서는 이중에서 스타우트와 스타우트의 조상 포터에 대해서 이야기해 보려고 한다.


맥주라는 술은 어떤 술과 어울려도 쉽게 어울리는 녀석이다. 8~90년대 맥주는 폭탄주라는 어마어마한 작명으로 위스키과 섞여 특권층의 밤문화를 이끌었다. 밀레니엄 시대에 들어서면서 동네 친구 격인 소주를 만나 폭 넒은 대중의 술이 되었다. 맥주는 소주와 섞이면 소맥이기도 하고, 막걸리와 섞이면 막맥인 것처럼 무엇을 붙여 놔도 이름이 척척 달라붙었다. 최근에는 카스와 테라라는 맥주와 맥주의 동종 결합으로 '카스테라'라는 센스 넘치는 작명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그런데 이렇게 술을 섞어 마시는 것, 조금 유식하게 표현하면 술을 블렌딩하는 것은 현대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18세기 초반 영국에서는 세 가지 맥주를 블렌딩하여 판매하는 펍들이 유행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포터의 기원으로 여겨진다.



포터는 짐꾼이다


과거 영국에서 맥주를 양조하고 판매하는 과정은 지금과는 많이 달랐다. 지금이야 전문 양조장이 있고, 양조장에서 제조된 맥주를 유통하여 전문 판매점에서 판매하는 방식이지만, 18세기 초반까지의 영국에서는 펍에서 양조된 맥주를 바로 캐스크라는 통에 담아 판매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런데 당시 펍에서 가장 유행했던 맥주는 세 가지 맥주통에서 나온 맥주를 섞어서 만든 것이었다. 세 개의 맥주 탭에서 실처럼 흘러나오는 맥주를 섞었다 하여 이를 쓰리 쓰레즈(Three Threads)라고 불렀다. 대체로 오래된 맥주와 신선한 맥주를 섞었으며, 상한 맥주와 상하지 않은 맥주를 섞을 때도 있었다. 이렇게 맥주를 섞으면 펍의 입장에서는 오래되어 유통되지 않는 맥주를 판매할 수 있어 좋고, 드링커의 입장에서도 신선한 맥주를 포기했지만 싼 값에 맥주를 마실 수 있으니 나쁘지 않았다. 이런 맥주는 특히 노동자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그들에게는 이 저렴한 맥주는 하루의 피로를 가시게 해주는 피로회복제였고 부족한 칼로리와 에너지원을 공급해 주는 영양보충제였다.


맥주를 블렌딩 하는 일은 아무래도 번거로운 일이다. 추측컨대, 이 블렌딩의 기술에 따라 펍의 입소문은 달라졌을 것이고, 노동자들은 블렌딩 기술이 좋은 펍으로 달려 갔을 것이다. 펍은 블렌딩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런 점을 눈 여겨 본 양조가가 있었다. 1722년 런던의 랄프 하우드는 쓰리 쓰레드 대신 미리 세 가지 맥주를 블렌딩한 맥주를 내 놓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성품의 맥주를 섞은 것이 아니라 세 가지 맥즙을 섞어 맥주를 만든 것이었다. 이렇게 섞인 맥주의 종류는 에일과 홉을 사용한 비어 그리고 투페니라고 불리는 일종의 스트롱 페일 에일이었다. 그는 이렇게 만든 맥주를 하나의 캐스크에서 서빙한다고 하여 인타이어 버트(Entire-butt), 줄여서 인타이어라고 불렀다. 이 맥주는 싸고 영양이 풍부해서 당시의 짐꾼들과 노동자들에게 인기가 좋았다. 여기에서 포터가 시작되었다.


포터의 어원을 정확히 말하기는 힘들지만 여러 가지 설은 있다. 그 중 하나는 이 맥주를 자주 마시던 노동자들이 항구에서 일하는 짐꾼(포터)들이었기 때문에 붙여졌다는 설이다. 우리나라에서도 하루의 일과를 마친 노동자들이 '이모, 소주 한 병 주세요’ 라고 외치면서 소주 한잔으로 피로를 푸는 것처럼, 당시 런던의 노동자들은 일을 마치고 맥주를 찾았다. 그리고 펍에 도착한 그들은 아마 이렇게 불렀을 것이다. '여기 포터(들이 마시는) 맥주 주세요’ 라고. 바로 짐꾼들이 마셨다 하여 포터가 되었다는 설이다. 두 번째 설은 포터 맥주를 짐꾼들이 운반하기 때문에 나왔다는 설이다. 당시 항구에서 일하는 짐꾼들 중에서는 맥주 회사에서 일하는 짐꾼들이 있었다. 템즈 강 근처에 있는 바클레이 퍼킨스 앵커 양조장에서는 140명의 짐꾼을 한꺼번에 고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짐꾼들은 맥아 자루를 양조장에 옮기거나 양조된 맥주를 펍에 배달하는 일을 했다. 펍에 도착한 짐꾼들은 '여기 맥주 왔어요’ 라는 의미로 '포터!’ 라고 크게 외쳤다. 이것이 곧 맥주 이름이 되었다는 것이다.

Image by Steve Buissinne from Pixabay 



어둠의 터널에서 가속 페달을 밟은 스타우트


포터는 18세기 초반부터 19세기 초반까지 대략 150년 간 경쟁자가 없는 절대적인 위치에 있다가 서서히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그 이유 중 하나는 영국이 프랑스와 벌인 전쟁 때문이었다. 영국이 워털루 전투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하고 전쟁을 끝내기는 했지만, 1815년까지 전쟁으로 인해 막대한 경제적 피해가 발생하였고, 이를 충당하기 위해 영국 정부는 맥아에 세금을 징수하였다. 세금을 적게 내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맥아의 양을 낮추어 양조하는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포터는 브라운 맥아를 사용했는데 품질이 일정하지 않았을 뿐더러 고열에서 볶았기 때문에 맥즙의 수율이 낮았다. 맥즙의 수율이란 한마디로 맥아를 이용하여 당분을 뽑아 내는 비율인데, 브라운 맥아로 당분을 높게 뽑아 내려면 더 많은 양이 필요했다. 그런데 마침 이 시기 산업혁명으로 인해 온도 제어 장치나 비중계가 발명되었다. 특히 비중계는 물과 대비하여 얼마나 밀도가 높은지를 측정하는 도구로 맥아즙의 초기 비중을 측정할 수 있었다. 이러한 도구로 인해 페일 맥아가 브라운 맥아보다 맥주의 수율이 높다는 것을 알아냈고, 맥주 양조자는 점점 브라운 맥아보다는 페일 맥아를 사용하여 맥주를 양조하게 되었다.


포터는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스타우트는 이런 포터의 진화된 모습이다. 스타우트는 스타우트 포터를 말하는데, 맥주에서 스타우트란 '강하다(strong)'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스타우트 포터는 1817년에 다니엘 휠러가 발명한 '블랙 특허 맥아' 덕택으로 본격화되었다. 휠러는 커피 로스터와 유사한 철제 실린더를 사용하여 맥아를 간접적으로 볶아 과도하게 태우지 않고 맥주를 어둡게 할 수 있도록 로스팅 하였는데, 이 맥아를 영국 특허청에 등록하였다. 포터 양조업자들은 빠르게 이 특허 맥아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양조업자들은 이제 브라운 에일의 사용을 줄이고 페일 에일을 더 많이 사용했으며, 어두운 색을 내기 위해 소량의 블랙 특허 맥아를 사용하였다. 이 새로운 공정은 맛도 좋았을 뿐만 아니라 기존의 포터보다 진했는데, 한 시대를 풍미했던 포터의 시대가 지고 스타우트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열기 시작한 것이다.


포터에 대한 새로운 시도는 아일랜드로 건너가 기네스의 스타우트를 만들었다. 스타우트의 역사를 논하면서 기네스를 빼 놓는 건 서태지와 아이들을 말하면서 서태지를 빼 놓는 거랑 비슷하다. 포터의 시초라고 여겨지는 랄프 하우드의 맥주가 양조된 것은 아서 기네스가 태어나기 2년 전의 일이었다. 기네스의 창업자 아서 기네스는 1759년에 아버지가 물려 준 재산과 맥주 레시피를 가지고 더블린 리피 강 근처의 세인트 제임스 게이트에 양조장을 열었다. 처음에는 에일 맥주만을 만들었는데, 1778년부터 포터를 판매하기 시작하여, 1799년에는 에일 맥주 생산을 전면적으로 중단하고 포터 맥주만을 생산하였다. 리피 강의 물은 석회질을 포함한 약한 경수였는데, 이러한 물은 홉에 불쾌한 떫은 맛을 줄 수 있다. 대신 홉의 비중을 낮추고 다크한 몰트를 첨가하면 대단히 좋은 맥주가 나오는데 이러한 것이 바로 기네스 흑맥주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작은 양조장에 불과했던 기네스를 세계적인 기업으로 성장시켰으니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결정으로 받아들이겠지만 당시로는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무튼 역사의 시작은 위대한 결정에서 시작된다.

아서 기네스


기네스의 가업은 그의 아들인 아서 기네스 2세가 이어받았다. 기네스 2세는 기네스 스타우트를 영국 포터에 밀리지 않을 정도로 성장시켰고, 아버지가 아이디어를 내고 완수하지 못한 해외 수출 사업을 실현시켰다. 기네스는 중앙 아메리카와 서아프리카 등 영국의 식민지 국가에 먼저 수출되었으며 인도와 호주 등의 국가로 수출 범위도 늘어났다. 1815년 최고 기록을 찍은 기네스는 영국과 유럽 대륙간의 전쟁의 여파로 잠시 내리막길은 걸은 적도 있지만, 그 이후에는 점점 성장하여 1870년대에 기존 공장을 버리고 큰 공장을 새로 지었다.  


현대 기네스 캔에는 위젯이라 불리는 둥근 공이 들어가 있다. 혹자는 처음 기네스를 마실 때 맥주에 왠지 모를 이물질이 빠졌다고 생각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맥주를 조금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캔을 찢어 이것이 무엇인가 탐구도 해 봤을 것이다(나 자신이 그랬다). 이런 아이디어는 생각보다 꽤 오래되었는데 1950년대에 처음 나왔다. 당시 기네스를 펍에서 판매할 때 탄산가스가 일정하게 나오지 않거나 맥주통에 잔고장이 잦아서 맥주의 맛이 달라지곤 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로 금속통의 내부를 둘로 나누어 한쪽에는 스타우트 맥주를 담고, 한쪽에는 이산화탄소와 질소 혼합물을 담아, 스타우트 맥주에 이산화탄소와 질소를 주입하는 것이었다. 이 아이디어는 1985년에 500ml 캔에 위젯을 적용하면서 실현되었다. 캔을 열면 위젯이 질소를 방출하여 맥주 표면에 기네스 특유의 거품을 만들게 한 것이다. 이렇게 발생한 크리미한 거품 때문에 기네스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러시아 황제가 사랑한 임페리얼 스타우트


앞서 맥주에서 스타우트라는 단어는 강하다 라는 의미로 사용된다고 말했는데 임페리얼도 비슷한 의미로 사용한다. 임페리얼은 황제, 특히 러시아 황제를 의미하는데, 황제가 마셨을 맥주라니 도수가 높고 맥아와 홉을 아낌없이 쓰지 않았을까? 그런데 사실 이렇게 과도하게 맥주의 재료를 쓴 이유는 황제가 아니라 맥주의 배송 문제 때문이었다(이 얘기는 잠시 뒤로). 이 스타우트는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가 받아 들인 여러가지 서유럽의 문화 중에 예카테리나 여제의 사랑을 받아 탄생했다.


표트르 대제는 중세 수준에 머물러 있던 러시아를 매우 급진적인 방법으로 단번에 서구화시킨 인물이다. 표트르는 어릴 때부터 다양한 사람들을 사귀면서 견문을 넓혔다. 그 중에는 선원, 용병, 조선공, 법학자, 예술가, 건축가 등 귀족이 아닌 다양한 서민들이 있었다. 이런 유년기의 경험은 장차 성인이 되어 정치를 펼칠 때도 유연하게 사용되었는데 그 중 가장 특이한 이력은 황제가 직접 오른 서유럽 견문 여행이다. 1698년 표트르는 250명의 사절단을 구성해 선진화된 서유럽의 기술과 정치를 배워오게 하였는데, 이 사절단에 젊은 귀족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장하여 포함시켰다. 황제는 자기 자신을 ‘표트르 미하일로프’ 는 가명으로 숨기고 본인이 직접 선진 기술을 경험했다. 하지만 아무리 가명을 쓰고 신분을 숨겨도 2m가 넘는 황제를 못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이 여행은 발트 연인의 국가, 프로이센, 독일 지역의 국가, 네덜란드, 영국 등을 돌며 1년 반 동안 계속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조선소에서 목수일을 직접 해볼 정도였는데 여기서 그는 해군의 필요성을 자각하게 되었고, 이 경험은 훗날 스웨덴과 전쟁에서 승리해 발트해에 진출하게 되는 귀중한 초석이 되었다.


그런데 표트르는 엄청난 술고래로 유명하다. 이런 표트르는 러시안인답게 보드카를 좋아했지만, 유럽의 맥주를 맛 보고서는 귀족들에게 맥주를 권장했다. 맥주는 보드카와 달리 많이 마셔도 일상의 지장이 적었기 때문이었는데 당시는 보드카가 사회적인 문제로 대두되고 있던 시기였다. 이때부터 유럽의 맥주 문화는 러시아의 귀족들 사이로 침투했다. 서유럽 여행에 동행한 일부 러시아 귀족들은 영국에서 마셨던 맥주를 잊지 못해 영국으로부터 직접 맥주를 수입해서 마셨다. 하지만 표트르가 생전에 랄프 하우드가 만든 포터의 맛을 알았는 지는 모르겠다. 많은 자료에서 표트르가 도수가 높은 영국식 스타우트를 즐겨 마셨다고 쓰고 있는 데 시기적으로 맞지가 않다. 포터가 막 만들어지기 시작하고 얼마 후, 지독한 요로결석으로 고생했던 표트르는 요로결석으로 인한 합병증으로 생을 마감했다. 이 때가 1725년이다.

표트르 1세(Peter I the Great), Paul Delaroche,1838


표트르가 러시아 맥주 문화의 발판이었다면, 영국의 포터를 가장 사랑한 황제는 여제라 불렸던 예카테리나 2세였다. 표트르가 사망한 후 러시아의 황제는 여러 여황제를 거치다가 표트르의 외손자인 표트르 3세에게 돌아갔다. 이로서 로마노프 왕조의 직계 혈통은 끊겼다. 표트르 3세는 러시아보다 프로이센을 사랑한 독일인이었다. 예카테리나는 16살의 어린 나이에 표트르 3세와 결혼하여 무능한 남편을 지켜보다가 그가 황제가 되자 바로 쿠데타를 일으켜 황위를 찬탈했다. 예카테리나는 표트르 1세에 이어 러시아를 강력한 국가로 만들었고, 러시아를 문화적으로도 문명화 시켰다. 그리고 무엇보다 영국의 포터를 사랑했다. 예카테리나는 포터를 직접 마시기도 하였고, 러시아 귀족들에게 나눠 주기도 하였는데, 러시아 내에 양조장은 없어서 맥주를 모두 영국에서 수입했다.


그런데 영국이 러시아로 맥주를 수출하는 과정은 유럽의 북해와 발트해를 지나는 기나긴 여정이었다. 맥주는 쉽게 상하거나 북유럽의 악독한 추위에 얼음덩이로 변하기도 하였다. 이런 점을 해결하기 위해 맥아를 충분히 사용하여 도수를 높이고 홉을 많이 넣어서 맥주의 보존력을 높인 맥주를 만들었는데 이것이 러시아 임페리얼 스타우트의 기원이다. 러시아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대부분 러시아로 수출되어 한동안 전성기를 누렸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영국과 대륙 간의 무역을 금지하는 대륙봉쇄령을 내리고, 이후에는 러시아가 영국산 맥주에 세금을 과도하게 책정하는 바람에 서서히 내리막길을 걸었다. 영국의 맥주 양조가들은 급하게 수출용 맥주를 내수용 맥주로 전환했지만, 아무래도 '큰 손' 러시아가 빠져 버린 상황에서는 이전만큼 판매하지는 못했고 점점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요즘 시중에서 마실 수 있는 러시아 임페리얼 스타우트는 대부분 미국 크래프트 양조가들이 옛날의 레시피를 발굴하여 새롭게 만든 것이다.

러시아 예카테리나2세의 초상 (Portrait of Catherine II of Russia), 1780년대



포터와 스타우트의 차이는 있다? 없다!


스타우트와 포터는 어떤 차이가 있을 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별로 차이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내 의견뿐만 아니다. 주위의 많은 맥주 전문가들의 의견을 종합한 결과이다. 굳이 차이를 찾는다면 BJCP(Beer Judge Certification Program)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다. BJCP는 전 세계에서 맥주를 양조하고 평가할 때 사용하는 맥주 스타일 가이드이다. 이 가이드에서 차이점을 찾자면 세 가지 정도를 들 수 있다.


첫 번째로 포터와 스타우트는 역사적으로 다른 길을 걸었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포터를 '잉글리시 포터’ 라고 하고, 스타우트는 '아이리쉬 스타우트' 라고 한다. 포터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년 전에 런던에서 시작되었다. 1차 세계 대전 즈음부터는 급격하게 감소하기 시작하여, 1950년대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현대에 볼 수 있는 포터는 1970년대 중반 미국의 크래프트 업계에서 부활한 것이다. 반면 스타우트는 거의 절대적으로 더블린의 기네스가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799년 포터만을 만들기로 한 기네스는 블랙 특허 맥아를 사용한 스타우트 포터를 개발하여 1800년대 후반까지 홀로 스타우트의 시대를 이끌었다. 1, 2차 세계 대전으로 위기는 있었지만, 현재까지 끊임없이 명맥을 유지하여 전 세계적으로 가장 사랑받은 맥주 스타일이 되었다.


두 번째는 맛의 차이에 있다. 예전의 포터를 직접 맛볼 수는 없겠지만 포터가 스위트 브라운 맥주에서 진화된 걸로 보아서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포터가 스타우트보다 더 달콤하고, 더 음용성이 있으며 바디감은 덜 했을 것이라 추정된다. 반면 스타우트는 더 바디감이 있고, 더 크리미하고, 더 드라이하다.


세 번째의 차이는 재료의 차이다. 포터는 볶은 맥아를 계속해서 사용한 반면, 스타우트는 어느 순간 볶은 맥아 대신 볶은 보리를 사용하였다. 맥아와 보리의 차이는 곧 맛의 차이로 나타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차이는 현실 너머에 있는 상상의 이미지와 가깝다. 현실에서 눈을 감고 포터와 스타우트를 구분한다고 하면 거짓말에 가깝다. 왜냐하면 현대에 와서 포터와 스타우트라는 이름은 양조가가 임의로 붙이기 때문이다. 즉 양조가가 포터라고 하면 포터인 것이요, 스타우트라고 하면 스타우트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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