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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슬 Apr 11. 2024

제주살이 4주 차, 몸의 변화를 느끼다

제주에 온 지 한 달 새 느꼈던 몸의 변화를 공유하고자 한다.      


 2015년, 갑작스럽게 혈액암인 급성백혈병에 걸려 동생 피로 조혈모세포이식술을 받았다. 후유증이 심한 치료라 오랜 시간에 걸쳐 천천히 회복해 나갔다. 8년이 지나도 정상으로 돌아가지 못하는 부분은 끌어안고 토닥이며 살아간다.

     

 2016년, 항암치료와 이식술 등 치료가 끝나도 나의 구토는 쉬이 그치지 않았다. 들어본 적도 없을 정도로 심하게 토하다, 인터넷 창에 ‘구토로 사망’과 같은 멍청한 검색어를 몰래 쳐보기도 하였다. 토하다 혼절하듯 잠이 들고 다시 깨서 토하고, 새벽 2시쯤 되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복통에 배를 잡고 뒹굴었. 응급실에서 진통제로 통증을 누르고 집에 돌아오면 동이 텄다. 그 시절의 일출은 어제와 같은 하루가 또 시작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신호였다. 구토 봉투 손에 꼭 잡고 떠오르는 해를 노려보았다. 아니다. 기억의 왜곡이다. 그렁그렁한 눈으로 “제발...”이라고 간청했던 쪽이 사실에 더 가깝다.

     

 조혈모세포이식 100일을 지나자 신생아에게 찾아온다는 100일의 기적이 내게도 찾아왔다. 구토 횟수가 줄면서 음식을 조금씩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처음엔 간장 종지보다 조금 큰 소스 그릇에 밥과 국을 담아 먹다가, 3-4세 유아용 식판을 사서 음식을 담아 먹었다. 누군가의 발언을 빌리자면 ‘새 모이’만큼 먹는 밥인데, 그릇이 장난을 치는 건지 아무리 먹어도 양이 줄지 않아 당황스러웠다.

    

 발병 후 4년이 지나도록 밥 반 공기를 비우기가 쉽지 않았고, 8년이 되어도 한 공기를 다 비우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한번 뒤집힌 위가 정상으로 돌아오기 위해서 시간이 한참 걸리나 보다. 그래도 살아있음에 감사했고 더디더라도 이만큼 회복한 것이 기적과 같았다.     


 제주에서 ‘쉬엄쉬엄’을 모토로 생활하긴 하지만 서울에 있을 때보다 운동량이 많다 보니, 배고픔을 좀 더 자주 느끼고 먹는 양이 점차 늘었다.


 제주의 한 갈치조림 식당에서 내게 주어진 한 공기를 다 비우는 일이 생겼다. 8년 만인가, 9년 만인가? 다 비워진 밥공기에 감격하면서, 속으로는 탈 날까 봐 조마조마했다(다행히 아무 일 없이 소화 잘 시켰다). 뭐든지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쉬운 거라고, 내가 한 공기를 다 먹는 기적은 이젠 씩 웃으며 받아들이는 일상이 되고 있다.


무와 국물을 밥에 넣고 쓱쓱 비벼,  갈치살을 올려 먹는다.  어느 새 빈 공기를 맞이할테다.

 

병의 치료가 독해 강제 폐경을 겪었다. 아이가 없는 결혼 4년 차 새댁, 30대 여성으로서 기막혀할 새도 없이 갱년기 증상이 찾아왔다. 먼 훗날의 일이라 관심조차 없던 증상들이 우후죽순 내 안에서 돋아나 나를 찔러댔다. 경험해 본 적 없는 불면증도 이때부터 생겼다. 잠들기까지 뒤척이는 시간이 길어졌고, 자더라도 중간에 깨는 경우가 잦아 잠의 질이 떨어졌다. 감정 소모가 가장 큰,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이 있을 때면 밤새 한숨도 못 자고 괴로워하다 날이 밝기도 했다.


 신경 쓰이는 관계와 지리적으로 멀어졌더니 감정적으로 느끼는 가벼움이 상당하다. 잠이 들기까지의 시간이 훨씬 덜 걸리고, 날이 밝을 때까지 푹 자는 날이 늘었다. 눈 감았다 떴는데 아침인 그런 꿀잠을 동경해 왔는데 제주에 와서 그런 잠을 잘 수 있었다.

      

 화장실 문제도 최근 들어 새롭게 생긴 괴로움이었는데, 잘 먹고 잘 자니 자연스럽게 해결된 것인지 해소되었다.      


제주살이 4주 차, 잘 먹고 잘 자고 잘 싼다!!!


(+) 남편은 기관지가 약해서인지 비염 때문이지 아침마다 기침이 심했다. 따뜻한 차, 배도라지즙, 도라지청 등 기침에 좋다는 것 먹어봐도 썩 효과를 못 봤다.      


제주에 온 후 거짓말처럼 남편의 기침이 잦아들었다. 할렐루야!          



“제주에서 살아보니 어때?”

“좋아, 생각보다 더.”

“뭐가 그리 좋은데?”     


평소 건강에 대한 아쉬움이 큰 사람이라 몸의 변화가 제일 좋다.

사는 환경이 이렇게 중요한 거구나. 반응하는 몸에 놀랍고 신기하다.      


남편의 기침이 줄고, 나는 잘 먹고 잘 잔다.

떠남의 이유, 제주가 좋은 이유로 이것이면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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