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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시 Apr 15. 2024

잘 하고 있다는 말

잘했다 vs 잘 하고 있다 vs 잘 할 거다

아까 낮에, 전화를 하다 할머니로부터 들은 말입니다. “잘 하고 있어.“ 그 말에 순간, 아주 고요했던 마음에 작은 돌멩이가 통, 통, 데구르르... 굴러오다 살포시 멈췄습니다. 몇 초간 화사하고도 이상야릇한 기분이 들어 결국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습니다. 수줍음과 뿌듯함으로 아무 말이나 얼버무리다 전화를 마무리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새삼 처음 듣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제가 늘 듣던 말은 “잘했다”라는 말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할머니 뿐만 아니라 엄마나 아빠한테서 곧잘 듣곤 했던 말은 “잘했다”는 말입니다. “잘했다”는 말을 들을 때면, 뿌듯함에 잠시 어깨가 솟았지만 이내 다음 번에도 무언가를 잘 해내서 보여줘야겠다는 야심이 솟구쳐, 기쁨을 곱씹을 틈도 없이 온 마음을 다음 성취, 다음 성취로 계속해서 기울였습니다.


비슷한 말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저는 “잘하고 있다”라는 말에서 저는 그동안 어루만져지지 않았던 저의 다른 부분이 토닥여졌다고 느꼈습니다. 이를테면 ”잘했다“라는 말은 내가 이미 해낸 것에 대한 인정인 것입니다. 받아 온 성적이나 상장, 합격과 성과 같은, 어떠한 결과값을 두고 할 수 있는 말입니다. 잘한 것이 없는데, 잘했다는 말을 할 수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잘 하고 있다“라는 말을 하는 순간의 눈앞에는 그런 것들이 없습니다. 아직 그런 반짝이는 것들은 오지 않은 상태입니다. 그렇기에 “잘하고 있다“는 말은, 내가 해낸 일이 아닌 나 자체에 대한 인정이라는 따뜻한 깨달음이 들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저는 스스로에게 ”잘했다“는 말도 ”잘 하고 있다“는 말도 좀처럼 한 적 없습니다. 스스로 곧잘 했던 말이라면 ”잘 할 거야” 정도일까요. 하지만 “잘 할 거야”라는 말 또한 내가 긍정하는 미래만이 있습니다. 말하자면, ‘잘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결과값을 이미 마음에 상정해 두고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그 미래에 도달하고 싶어 스스로와 속박과도 같은 약속을 합니다. 그 과정에서 부담이 생겨나고 조급한 마음으로 과한 최선을 쏟는 데만 안달내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마침내 잘 해내면, 바라던 기쁨을 고이 만끽하기보다는 마땅히 지켜야 했던 자신과의 약속을 그저 지켜냈을 뿐이라는 정도의 마음만이 잠시 머뭅니다. 그렇게 안도의 숨을 후, 하고 한 번 내쉴 뿐 또 새롭게 “잘 할 거야” 다짐한 미래를 향해 앞만 보고 내달리는 것입니다.


안아줘야 하는 것은, 과거에 내가 해낸 일도 미래에 해낼 어느 일도 아닌 지금의 나입니다. 이미 벌어진 혹은 미리 정해둔 결과값이 아니라 계속해서 눈앞에 마주한 풍경 속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과정, 그리고 그 과정을 힘껏 껴안고 미래로 나아가는 나 자체에 대한 긍정이 필요합니다. 어떤 방향으로든 내가 걷는다면 눈부시고 옳다는 그 믿음이 있어야 현재라는 소중한 순간을 통과하듯 지나쳐버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잘했다”는 과거를 향해 있는 말입니다. 그 말엔 미래가 실려있지 않아, 앞으로 나아가는 건 오롯이 나의 몫이라 외롭습니다. 반면 ”잘 할 거다”는 미래를 향해 있는 말입니다. 그 말은 ‘잘 한’ 미래의 어느 시점으로 날 멋대로 데려다 놓습니다. 그곳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전략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잘하고 있다”라는 말은 오직 지금 이 순간을 두고 이야기하는 말입니다. 현재에는 방향만이 존재합니다. 눈부시든 서투르든 당장 이런 나로 내딛을 수 있는 걸음이 있습니다. 누군가에게 그 걸음이 옳다고 말해주는 것은, 미래를 향해 등을 살포시 떠밀어 주는 일입니다.


삶을 설계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전략 같은 것이 아닙니다. 지금 내가 하루하루 마주해 나가는 생생한 풍경들입니다. 그 풍경을 놓치지 않고, 내가 내딛는 모든 좌표를 도장처럼 꾹 찍으며 지금을 소중히 여기며 나아갈 수 있도록 서로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해 줄 수 있는 하루를 보내봅시다.


“잘 하고 있다”는 말은, 그 사람이 지금 보고 있는 세상을 껴안아 주는 말. 오늘 할머니의 말은 아주 오랫동안 제 안에 남아 함께 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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