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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지현 Jan 13. 2022

그해 12월, 나에게 런던은

겨울에 런던에 와서 놀란 점 세 가지

처음 런던에 도착한 건 12월 중순이었다. 연말은 보통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기이기 때문에 구직 시장이 활발하지 않다고 들었다. 이것까지 계산하고 출국 시기를 정한 건 아니었지만, 기왕 이렇게 된 마당에 스스로에게 한 달 정도의 방학을 주기로 했다. 영국에 워킹홀리데이를 하러 와서 ‘홀리데이’부터 시작하고 ‘워킹’은 한 달 뒤의 나에게 미뤄둔 것이다.


소중한 한 달간의 홀리데이를 즐기고자 런던 곳곳을 부지런히 돌아다녔다. 런던은 앞으로 내가 살 곳이기 이전에 세계적인 관광지이기도 했기에, 관광객의 입장으로 런던의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마음껏 누렸다. 처음 보는 12월의 런던은 정말 예뻤다. 크리스마스 느낌의 불빛 장식들이 인상적인 옥스포드 스트리트, 아기자기한 마켓이 열리는 코벤트 가든, 겨울마다 하이드 파크에서 열리는 윈터 원더랜드 놀이공원까지. 그 겨울의 런던은 나의 경계심을 녹이고 나를 반하게 만들었다.


12월의 런던


그렇게 한 달 동안 런던을 관찰하면서 놀란 점이 세 가지 있었다.


첫째, 영국은 겨울에 해가 엄청 짧다. 특히 해가 가장 짧은 12월에는 아침 8시가 넘어 해가 뜨고, 오후 4시가 채 안 되어서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해가 떠있는 시간이 8시간도 채 안 되는 것이다. 이건 그나마 영국 남부에 있는 런던의 얘기고, 영국 북부에 있는 에든버러의 경우 해가 떠있는 시간이 7시간도 안 된다. 바깥에 돌아다니다 하루가 다 갔나 싶은 정도로 어두워서 시계를 보면 저녁 5시밖에 안 돼서 놀랄 때도 많았다. 그래서 밝을 때 가야 하는 관광지에 가려면 해가 떠있는 시간에 맞춰 일정을 잘 계획해야 한다.


둘째, 런던의 겨울은 생각보다 춥지 않다. 런던 하면 비 오고 우중충한 날씨를 연상했던 나는 이곳의 겨울이 꽤 추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런던에서는 겨울에도 최저 온도가 좀처럼 0도 이하로 떨어지지 않고, 최고 온도도 영상 10도 안팎이다. 그래서 겨울에도 눈이 아닌 비가 온다. 겨우내 눈 한 번 오는 걸 구경하기가 힘들 정도다. 물론 그래도 밖에 오래 나가 있으면 춥게 느껴지긴 하지만, 한국에서 영하 10도 정도의 추운 겨울을 보내다 온 나는 “이 정도면 안 춥네?” 하며 런던의 추위에 콧방귀를 뀌었다.


셋째, 크리스마스에는 모든 것이 닫는다. 영국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는 1년 중 최대 명절이다. 우리나라로 치면 설날과 추석을 합친 대명절이다. 한국의 크리스마스는 밖에서 로맨틱한 데이트를 즐기거나 친구들과 만나 함께 축하 파티를 하는 날이라는 인식이 있는 반면에, 영국의 크리스마스는 가족들과 집에서 맛있는 요리를 해 먹으며 선물을 주고받는 날이다. 그래서 크리스마스 당일에는 대부분의 식당, 마트, 그리고 심지어는 지하철까지 운행을 중단한다. 그것도 모르고 크리스마스를 알찬 관광으로 보내려고 했던 나는 당황을 감출 수 없었다. 찾아갈 가족도 없는 사람은 뭘 하라고 이렇게 모든 걸 닫아버린단 말인가.


런던 아이 (London Eye)


런던에서의 첫 크리스마스를 이렇게 허무하게 보내버릴 순 없었다.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에 걸어서 한 시간 걸리는 거리에 있는 런던 아이(London Eye)를 보러 갔다. 지하철이 다 끊겼기 때문에 왕복 두 시간을 걸어야 했지만, ‘런던의 눈’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템즈 강을 환하게 비춰주던 런던 아이를 보니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도 싹 잊히는 듯했다. 런던 아이가 있는 웨스트민스터 브리지에는 나와 같은 처지의 관광객들이 거리를 누비고 있었고, 잔잔하게 길거리 버스커의 노래가 들려왔다. 이보다 더 운치 있는 크리스마스가 있을까. 그곳에서 더 이상 나는 혼자가 아니었다.


모두가 쉬는 크리스마스에도 쉬지 않고 불을 밝혀주는 런던 아이를 보고 있으니 그 불빛이 고맙게까지 느껴졌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적적하게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나를 위로해 주는 것만 같았다. 그해 12월 나에게 런던은, 크리스마스의 런던 아이 같았다. 모든 게 닫았을 때 그 자리에서 나를 맞아주던 런던 아이처럼, 이곳에는 긴 밤을 밝혀주는 예쁜 불빛 장식들이 있었고, 흐리고 비 오는 날이 많았지만 생각보다는 따뜻했다. 앞으로의 영국 생활에도 런던 아이 같은 존재가 있다면 어떠한 힘든 일도 잘 이겨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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