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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경 Apr 24. 2022

직장인이 집밥을 먹으려면

최애 만화책이 요리에 미치는 영향

직장인이 퇴근 후 집밥을 먹으려면 퇴근길부터 준비가 필요하다. 엄마와 함께 살며 아침밥 도시락을 받아 회사로 출근하고, 집에 오는 길 '나 이제 집에 가. 00시에 도착.' 같은 메시지를 보내면 바로 저녁밥이 차려져 있는 식탁으로 퇴근할 수 있는 상황과는 달라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전날부터 준비가 필요할지도.  


우선 퇴근길부터 냉장고에 있는 재료들을 생각하고 조합을 해서 메뉴를 생각한다. 메뉴를 위해 추가로 사야 하는 재료를 정하고 집 앞 슈퍼에 들러 처리한다. 혹은 전날 새벽 배송등으로 시켜놨어야 한다.


이때 슈퍼는 대형마트보다 집 앞 야채가게 혹은 대형마트 브랜드의 슈퍼마켓을 이용한다. 대형마트에 가려면 아무래도 시간을 많이 잡아먹는다. 집 앞 슈퍼마켓에는 할인 코너가 두 개가 있는데 그곳에 내가 원했던 재료가 있으면 운이 좋은 날. 이 코너에 있는 것들로 빠르게 메뉴를 정하기도 한다. 재료들을 집어 들고 집으로.


이날은 슈퍼마켓에서 연어회를 싸게 팔길래 냉큼 데리고 왔다.


손발만 씻고 바로 부엌으로 간다. 메뉴에 국이 포함돼 있으면 물을 먼저 올려놓고 재료를 후다닥 준비한다. 재료를 준비하면서 어제 못 치운 설거지가 있다면 그것도 같이 처리한다. 어떤 과정으로 요리를 해야 가장 효율적 일지 끊임없이 머리를 굴리면서 차려내면 빠르면 15분에 끝내버릴 수도 있는 게 퇴근 후 저녁 차리기다. 특별한 메뉴를 차리진 못해도 일상적 밥상 기준 그렇다는 거다.


극강의 P 성향(즉흥)인 내가 이렇게 J(계획)스러운 과정을 치르려면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지만 역시나 요리를 좋아하기에 이런 과정을 매일 견딜 수 있는 것 같다. 좋아하는 일 한정 J가 돼버린다.


떨이로 순두부를 데리고 온 날은 간단하게 순두부를 양념장과 함께.




나름 치열해야 하는 '퇴근 후 밥 차리기'에 큰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 이유가 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만화책에서 '퇴근 후 밥을 차리는'주인공의 모습을 거의 10년이 넘게 봤기 때문이다.


퇴근 후 밥 차리기를 하면서 마치 내가 좋아하는 만화책 주인공이 된 것처럼 느끼기에 행복하기까지 하다. (물론 만화책에서도 나와있듯 카케이 시로가 요리에 집중할 수 있도록 파트너인 야부키 켄지가 그 외의 것들을 분담한다.)


내가 앞에 묘사한 이 과정들이 '어제 뭐 먹었어'의 모든 회차 스토리라인이다. 변호사인 카케이 시로가 자신의 파트너와 살면서 밥을 해 먹는 이야기가 이 만화책의 거의 모든 내용이다. 사실상 '카케이 시로의 집밥 레시피북'이 이 책의 부제라고 볼 수 있다. 번외로 '야부키 켄지의 야매 레시피'가 가끔 들어간다. 그들이 각자 직장을 다니면서 집밥을 해 먹고, 가끔은 이웃이나 친구들과 파티 음식도 해 먹는 이야기들을 10년 넘게 보는데 지겹지가 않다.


최근 발매된 '어제 뭐 먹었어' 19권.


찾아보니 요시나가 후미의 '어제 뭐 먹었어'는 2008년에 출시됐다. 최근 20권이 나왔으니 '어제 뭐 먹었어'를 읽은 만큼 나의 요리실력도 향상되고 있는 것 같다. 2019년부터는 드라마로까지 제작이 됐다. '드라이빙 마이카'에 나왔던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무려 카케이 시로였다. 정말 잘 어울리는 캐스팅이 아닐 수 없다. 만화에서 켄지역을 정말 좋아하는데 드라마 속 배우엔 그 몰입이 안되긴 했다. 왓챠로 몇 편을 봐보긴 했는데 역시 레시피북(?;;)의 특성상 책으로 보는 게 익숙하다.


대학시절 나의 공강 시간의 20%는 사용한 것 같은 '북새통'(북새통은 만화책 대부분 커버를 싸놓기 때문에, 책을 읽을 수 없다. 구매만 할 수 있는 장소. 그래서 20%. 만약 책을 읽을 수 있는 형태였다면 90% 정도였겠지)에서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책은 그게 뭐든 다 구입했다.


요시나가 후미는 은근 다작을 하는 작가이기 때문에 어떤 만화는 매우 맘에 들었고 어떤 만화는 솔직히 읽다가 포기했다. 작가의 단편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요시나가 후미의 이야기를 하려면 또 삼천포로 빠질 것 같으니깐 '어제 뭐 먹었어' 만화책 이야기만 해보겠다.


내 책장 한 편의 '어제 뭐 먹었어' 코너.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역시 '어제 뭐 먹었어'의 유용성 때문이다. 이야기나 대사들도 재미있지만 역시 실용성이 큰 책이다. 물론 일본식 집밥이기 때문에 한국에서 집밥을 하는 사람이 따라 할 요리는 한정돼 있긴 하다. 그래도 이 책을 읽으면서 '직장인 집밥러'가 갖춰야 할 태도를 배울 수 있다. 앞서나 온 J스러운 모먼트도 그렇고 그저 레시피를 그대로 따라 하기에도 좋은 책이다.


얼마 전 카케이시로와 야부키 켄지가 주말인가에 해 먹었던 크로켓 빵과 토마토 수프 메뉴를 그대로 따라 해 본 적 있다. '매콤한 된장소스를 끼얹은 오크라'는 빼고 따라 했는데 역시 힘들었다. 카케이 시로의 요리실력은 주부 9단이기 때문에 주부 1~2 단급인 내가 이것을 맨날 하기란 힘이 든다. 이런 튀김요리는 퇴근 후가 아닌 주말에나 할 수 있다. 그래도 뿌듯했던 레시피 따라 하기 시간이었다.


'어제 뭐 먹었어'에서 카케이시로가 차린 크로켓 빵과 토마토 수프.
내가 만든 크로켓과 토마토 수프!


감자 크로켓을 만드는 건 어렵지 않지만 은근히 귀찮은 과정이다. 우선 감자를 깨끗하게 손질해서 삶고, 후추를 넣어 잘 으깨준다. 나는 크래미를 좋아해서 감자를 으깬 것에 크래미를 찢어 넣어줬다. 감자 으깬 것과 크래미를 넣은 것을 손바닥에 잘 펴주고, 그 안에 치즈를 잘라 올려두고 동글동글 빚어준다. 이 동글동글한 것만 봐도 아주 예쁜 자태다.




나는 왜 수많은 만화책 중에 '퇴근하고 들어와서 밥상을 차리는' 것이 일상의 전부인, 그것이 스토리의 전부인 만화를 가장 좋아하는 것일까. 책 '타샤의 그림'(지은이 타샤 튜더)의 첫 장에 나오는 이 말에 깊이 공감하기 때문일 것이다.


일상생활에서 아주 작고 세밀한 부분까지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갖는 일, 마침내 그것을 예술의 경지에까지 끌어올리게 될 때 그것이 바로 행복의 비결이다.
-윌리엄 모리스


나의 일상생활 속 행위들이 '예술의 경지'까지 가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때맞춰 정성 들여 밥을 먹고 집을 치우는 행위들을 하다 보면 별 게 아니어도 '오늘도 잘 살았다'는 생각이 들기 마련이다. 또한 이런 작은 것에 정성을 들이는 타인을 보면 그 사람이 참 사랑스러워 보인다. 그렇기에 나 역시 나에게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이런 노력들을 하게 된다. 그리고 이것이 윌리엄 모리스가 말한, 행복의 비결일 것이다.


만화책 '어제 뭐 먹었어'에 나온 감자 크로켓과 토마토 수프를 따라한 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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