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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우유기 May 14. 2024

뜨겁게 뜨겁게 안녕

참 뒤늦은 송별회였다. 부장의 정년퇴직 이후 6개월 만이었다. 코로나를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겨우 이렇게 마주 앉았다. 오래 기다렸다고 해서 화려한 자리도 아니었다. 그의 앞에는 허연 칼국수만 연기를 뿜고 있었다. 조촐한 뒷북 송별회가 달갑지 않았을 텐데 부장의 만면에는 서운함보다 반가움이 더 짙게 묻어났다. 그 사이 다들 많이 보고 싶었다고 했다. 사무실에서는 항상 빳빳하게 날을 세우던 그의 눈썹이 이젠 제법 둥그렇게 휘어졌다.


부장의 퇴직은 꽤나 갑작스러웠다. 임금피크제에 걸리는 나이라도 부장만큼은 당연히 임원으로 승진해 정년 연장이 될 거라 여겼기 때문이다. 모두가 인정하는 ‘샐러리맨의 정석’이었으니까. 맡은 일은 어떻게든 성공시켰다. 회사에서 포상을 받은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른 직원들에게 일을 떠넘기는 적도 없이 항상 일에 대한 열정이 넘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열정에 대한 보상은 고작 무미건조한 퇴직 통보가 끝이었다. 나이도 급여도 높은 인력의 열정은 회사 입장에서는 그저 부담일 뿐이었다. 그런 부장의 퇴직을 보며 뼛속까지 허무함이 퍼졌다. 아무리 열심히 한들 나이가 들면 저렇게 쫓겨나는구나, 직원이란 언제든 대체될 수 있는 소모품이구나 싶은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부장은 칼국숫집 벽에 붙은 달력을 응시했다. 오늘이 무슨 요일이냐고 물었다. 퇴직하고 나니 시간 개념이 사라졌다며 너털웃음을 지었다. 간부 회의하는 월요일, 제품 발주하는 화요일, 부서 회식하는 수요일. 회사를 떠나니 그의 시간을 규정하던 기준이 사라졌다. 장난처럼 던진 그 말에 같이 웃으면서도 내심 공감이 됐다. 점심시간만 기다리면서 오전을 버티고, 퇴근시간만 바라보면서 오후를 버티고, 월요일 출근과 동시에 금요일 퇴근을 기다리는 일상. 내 삶의 시계 역시 회사를 기준으로 굴러가고 있지 않은가.


퇴직은 그에게서 공간마저 앗아갔다. 회사는 집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낸 곳이었다. 아침 8시에 출근해 저녁 8시에 퇴근하던 ‘팔팔’한 부장에겐 더욱 그랬다. 초고속 승진으로 얻은 명패, 발로 뛰며 성사시킨 계약서들, 사무실 한가운데에 성역처럼 자리한 책상.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던 모든 것들이 하루아침에 사라졌다. 그 공간을 함께 나누던 사람들과의 관계 역시 흐릿해졌다. 매일 마주하던 동료들이었지만 막상 퇴직하고 나니 연락하기가 어려워졌다고 했다. 같은 곳에 속하지 않은 자신을 불편하게 여길 것 같아서였다. 결국 하루 종일 집에만 있으니 마누라 눈치가 보인다며 멋쩍게 입꼬리를 올렸다.


나는 조금씩 두려움으로 물들었다. 부장의 저 모습이 내 미래인 듯한 생각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지긋지긋한 회사지만 이미 직장은 내 삶을 규정하는 큰 기둥이었다. 회사에 속하지 않은 나는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누군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나를 소개할 때만 봐도 그렇다. 회사 명함 한 장이면 모든 설명이 끝난다. 내가 떡볶이를 좋아하지만 매운 음식은 잘 못 먹는 사람이든, 공포영화를 무서워하지만 벌레는 잘 잡는 사람이든 상대방은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그저 어느 회사의 누구로 날 기억할 뿐이다. 이곳을 벗어난 나를 어떤 사람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다.


두려움에 제동을 건 것은 부장의 목소리였다. 성공한 샐러리맨은 되지 못했지만, 멋진 인생으로 기억되고 싶다 말했다. 그래서 퇴직 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자랑스럽게 내민 핸드폰 화면에는 은퇴자 재취업을 주제로 한 유튜브 채널이 보였다. 부장의 얼굴이 섬네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자기처럼 퇴직 후 공허해진 사람들에게 위로와 응원을 전하고 싶어 유튜브를 열었다고 했다. 채널 개설 후 반년 만에 구독자 5천 명을 달성한 거 보면 그가 얼마나 노력했을지 눈에 선했다. 매사에 열심이던 그 습관 어디 안 간다 싶었다. 그렇게 그는 다시 자신만의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내 눈엔 이미 멋진 인생이었다.


성공한 샐러리맨이 아니어도 좋다. 높은 연봉과 임원 타이틀을 거머쥐어야만 나의 가치를 증명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 자체가 치열한 노력의 연속이지 않은가. 그 노력이 곧 나를 말해줄 것이다. 매일을 버텨낸 스스로에게 주어진 훈장이 될 것이다. 명함보다 더 빛나는 훈장을 가진 그에게, 미래의 나에게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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