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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이람 Apr 16. 2024

영구귀국을 고민하다

우리 집 일본인 #20

한국에서든 일본에서든 내 삶은 고달팠다. '어차피 고달플 거, 해외생활을 하면 그거라도 남지 않겠어?'라 포지티브 하게 생각한 적도 있는데 요 2년간 생각이 크게 달라졌다.


한 때는 일본인보다 더 일본인 같다며, 여기 생활에 잘 적응한다고 사람들은 놀라워했다. 그런데 최근 2년 간, '열린 집단'을 표방하는 곳으로 전직을 하고 오히려 크게 데었다. 선량한 집단이라는 기대감이 컸던 만큼 반작용 역시 컸다. 뭐야, 이거 완전 열림교회 닫힘이잖아. 다이버시티 존중한다며. 여성 관리자 양성할 거라며. 영리 추구를 제 1가치로 삼지 않는다며. 그렇게 좋은 일 한다는 집단의 구성원들은 왜 그렇게 못돼먹었을까. 말을 섞다 보면 상대가 자기보다 센 사람일지, 기가 약한 사람일지, 그에 따라 공손하게 대해야 할지, 막 대해도 될지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려왔다. 강약약강의 세계. 좋은 사람들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 나는 위선, 억압, 차별 같은, 일본 사회가 가진 명백한 어둠을 기억하기 시작했다. 


불행 중 다행은 부임하자마자 가스라이팅을 시도하던 교장은 한 달 여가 지나자 잠잠해졌다는 것과 내 업무의 자율성을 보장해 주었다는 것이다. 그는 확증편향이 있어 실무자는 굳이 찍어먹지 않아도 똥인지 된장인지 단박에 알 수 있는 것을 '이거 색깔이 된장 같은데'라며 자꾸 들이밀었다.


어느 날 나는 '그럴 가능성도 있겠네요. 음, 저 쓰레기통에 빈 된장 껍데기가 들어있다면 백퍼센트겠죠? 혹시 이게 정말 된장이라면 고기랑 두부 넣고 강된장도 되겠는데요? 아, 간단하게 데친 양배추에 쌈밥해도 될 거 같고' 라 대답했다.


이미 이게 된장색 똥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에이, 이게 무슨 된장입니까. 척 봐도 똥인데. 알려다가 입맛만 버려요.' 하지 않고 그것이 된장이라는 전제하에 머리에 떠오르는 기획안을 구두로 전했다. 그 이후 교장은 눈에 띄게 내게 상냥해졌다. 리모트 업무용을 겸해 새로 산 개인 컴퓨터를 세팅하러 가져갔더니 오피스 프로그램이 있냐 묻고는 학교 라이선스를 하나 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김상은 머리가 좋으니까 이쪽에서 대략적인 이미지만 전달해도 알아서 잘 움직여 줄 거야.'라며, 신졸 4년 차 직원 앞에서 훨씬 경력이 많은 나의 평가를 쉽게 입에 올리고, 그러니까 잘 컨트롤해 보라는 뉘앙스로 말했다는 걸 이미 들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니요, 사려고요' 하고 거절했다. 


그거 해주고 얼마나 부려먹으려고. 

어차피 난 졸로 쓰고 말 텐데. 걔네 데리고 잘해봐. 잘 될진 모르겠지만.


사람을 뭘로 보고.







비단 여기만의 문제일까. 강약 차이일 뿐, 전직이 답이 될 거라는 기대감도 들지 않았다. 일본 사회에 신물이 났다. 어차피 해야 할 고생이라면 그래도 마음 편하게 내 나라에서 하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이 나이 되어서 다시 0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두렵고 이제껏 보낸 시간들이 아까웠지만, '나는 외국인을 차별하지 않고 다만 구별한다'는 씨나락 까먹는 소리를 부끄러움도 없이 나불대는 상사, 월권으로 내 업무권을 침해하고 변경사항에 대한 공유를 하지 않는 동료, 학교 커리큘럼인 실습에 가지 않으려고 자기 대학생 남자친구에게 항의전화를 시킨 몬스터 학생. 이걸 견디는 것보단 차라리 낫겠다 싶었다.


그와 사귀면서 네거티브한 기분들은 다소 상쇄되어 갔지만, 번뇌를 완전히 떨쳐버릴 수는 없었다. 


2021년의 도쿄 올림픽. 말 많고 탈 많았던 그 올림픽에는 몇 번인가의 한일전이 있었다.


한국에서였으면 가족들과 옹기종기 둘러앉아, 닭다리라도 뜯어가며 열띤 응원전을 벌였을 테지만, 낯선 일본땅, 아무리 봐도 원룸인데 방 중간에 미닫이문 달아놓고 1DK라 우기는(그렇게 우기면 집세가 올라간다) 뻔뻔한 자취방에서 혼자 시합을 보자니 적적해져서, 그와 전화를 연결해 놓고 같이 야구를 봤다.


상대를 잘못 골랐어도 한참을 잘못 골랐다.


사람이 다시 보였다.


일본이 안타 쳐서 짜증 나는데 그는 환희에 찬 환호성을 질렀고, 한국이 출루하고 내가 기뻐하는 동안엔 크게 낙담하며 아쉽다는 표정을 지었다. 참 신기한 일이다, 전화인데도 기쁜 얼굴, 슬픈 얼굴이 선명하게 아른거린다. 


쉴 새 없이 엇갈리던 감정선들이 잠잠하게 잦아들어 갈 즈음, 경기 종료의 자막이 떴다. 한국의 패배였다. 이기는 날이 있으면 지는 날도 있는 것이 공놀이라지만, 내일 출근하면 이 경기결과로 야마다의 이죽거림을 들어야 할게 뻔했다. 멀끔한 겉껍데기와 달리 인간미 없는 언동으로 유명한 야마다. 자신의 담당이 아닌 일도 멋대로 처리하고 공유조차 하지 않아 몇 번이나 나를 곤란하게 했다. 오죽하면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업무에 지장이 생긴다고 타이르기도 했다. 그때 그는 일말의 양심은 살아있었는지 '제가 해보는 게 제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라며 멋쩍은 웃음과 함께 어렵게 입을 뗐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덕분에 잘 망했다. 뒤처리는 내가 했고.


그래도 어차피 다 월급쟁이들. 여기서 얼굴 붉히고 투닥거려 좋을 일은 없다. 성질 같아선 확 뒤엎어버리고 싶은 일이 한둘이 아니었지만 최대한 좋게 지내려 노력했다. 


얼마 전, 축구경기가 있던 날도 그랬다. 축구광인 야마다에게 인사치레로 '오늘 일본도 한국도 각자 잘해서 더 위에서 만났으면 좋겠다'라고 했더니, 반쯤 비웃는 얼굴로 '일본은 그럴 수 있겠지만 한국은 어려울걸요'라고 지저귀었지. 축구파라면서 다른 경기에서 한국이 일본에 질 때마다 어디서 그렇게 정보를 모아 오는 것인지 다음 날 이러쿵저러쿵 내 눈앞에서 떠들어 댔다. 악의가 아니면 뭘까. 


모두와 반대로 흘러가는 감정의 이퀄라이져. 

거기에서 고립을 느꼈다. 대놓고 따돌림을 당하거나 괴롭힘을 당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힘든 것은 또 처음이다. 그때마다 '어차피 다 월급쟁이들. 서로 감정 상해봤자 좋을 것 없다'라고 다독였다. 그렇다고 울분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서 더 한국이 이겨주기를 바랐다. 완전한 감정이입이었다.


그런데 이기는 건 고사하고,

야마다의 코를 납작하게 해주는 건 둘째 치고,


나의 기쁨이 남자친구의 슬픔이 될 수도 있고 나의 슬픔이 그에겐 기쁨이 될 수 있다는 것만 확인했다. 전후사정도 있어 우리 사이의 거리가 갑자기 확 벌어진 것만 같았다. 환희에 찬 그의 목소리를 뒤로 한 채, '컨디션이 좋지 않다'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한참을 생각했다.


우리가 진심으로 서로의 모든 것을 보듬을 수 있을까?


자신이 없어졌다.


우리의 관계뿐 아니라,

더 이상 좋아하지 않게 된 이 나라에서 이 이상 삶의 터전을 갖고 사는 것, 그 자체가.






장거리 연애는 어떨까? 지금도 일주일에 한 번밖에 못 만나는데.

그거랑 이거랑 같나.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에서도 멀어진다는데.

그렇게 해서 멀어질 것 같으면 어쩔 수 없지.

그를 사랑하지 않아? 몇 달에 한 번씩밖에 못 만나게 된다고.

사랑? 사랑이 뭐지?


모노드라마처럼 혼자 이랬다 저랬다 하며 한참을 고민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원론적인 것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마치 수렁에 빠진 것처럼 생각이 멈추지 않았다.


어느 날, 한국에 영구귀국할 것도 생각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원래 내가 일본에 가지고 있던 감정, 15년 전 일본에 워홀로 왔다가 돌아갈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한국에 돌아가고 나서야 보였던 일본의 좋은 점이 그리웠다던가, 하지만 결국 다 지쳤다는 이야기까지.  


그는 안타까워했다.


첫 번째로는, 그의 나라에 호의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변하게 된 것에 직접적인 인과관계는 없지만 도의적 책임을 느꼈고, 두 번째로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의 나라를 좋지 않게 생각한다는 것에 대해 마음 아파했다. 하지만 고작 공놀이에 감정이입 한거냐는, 그런 설익은 투정이라 가벼이 치부하지 않았고, 내가 일본에 대해 좋지 않게 느끼는 부분에 대해서 그렇지 않다는 반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느끼고 생각하게 된 경위를 존중해 주었다. 세 번째로는 그 직장을 더 다니다가 정신이 상하지 않을까 염려했다. 참 그 다운 반응이라 생각하는데 그가 말을 이었다.


"혹시, 쵸상이 했던 말 기억해?






"선생님, 이제까지 고마웠습니다."


4월 말, 졸업생인 쵸상이 고국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식사를 했다. 중국에서 의사생활을 했지만 타이완 출신에 대한 차별을 견디지 못하고 의사를 계속하기 위해 일본에 왔다. 본국에서는 중국의 의사면허가 인정되지 않지만 일본어능력시험 최상급인 N1레벨에 합격하면 일본의 의사 국가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얻고 합격하면 일본에서 의사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해진 기간 동안 N1에 합격하지 못하고 의사의 길을 포기하게 되었다.


학생이라고는 해도 나보다 나이도 한참 위였고, 훌륭한 인격과 유머도 갖춘 사람이었다. 원하는 결과에 닿지는 못했지만 그 누구보다 노력했던 것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쵸상의 귀국이 마음 아팠다. 이제까지는 선생과 학생이라 사적인 자리에서 만나거나 함께 술잔을 기울이는 일은 없었지만, 졸업을 했으니 이미 사제관계는 아니다. 여전히 나를 선생으로 존중해 주었지만 어떤 의미로는 친우 같은 기분으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술잔을 부딪혔다. 그리고 마지막의 마지막에 쵸상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사람은 반년만 겪어봐도 알아요. 반년 지나도 싫은 점 없이, 여전히 좋은 사람이라 느낀다면 길게 볼 것 없이 함께 해도 될 거예요."






"타이완의 쵸상?"

"응. 이제 좀 있으면 반년 되잖아."

"응, 그렇지."

"처음부터 난 의식도 했었고."


사귀기 시작하고 이틀 지났나. 그는 내게 '겨우 이틀째에 부끄러운 소리지만, 혼자 멋대로 앞으로의 일을 진지하게 생각할 정도로 네가 좋아'라고 말했었다. 그 이후로도 몇 번인가, '솔직히 내년 봄쯤엔 함께 하고 싶어.'란 이야기도 했었다.


"그래서?"

"슬슬 실행에 옮기고 싶은데."

"결혼하자는 말이야?"

"응. 싫지 않다면. 난 네가 한국에 돌아가는 게 싫어. 그 직장에 그냥 두는 것도 싫고."


그의 프러포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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