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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유진 Aug 20. 2023

2016년

2016년                     


40대가 된 유자가 의자에 앉아 어깨를 두드리고 있는데,

더 부티가 나는 40대의 세라가 악어백을 들고 나타난다.


세라

유자야! 너, 요새도 알바하니?

유자

알바들. 2개는 기본으로 해야지.

세라

쯧쯧! 약값이 더 들겠다, 야!

유자

세라 넌 어디서 돈이 나오니? 원래 부자였던가? 남편이 부자였던가? 아, 그 부자가 전남편이던가, 현 남편이던가?

세라

원래 부자고 남편 둘 다 부자야. 내가 남편 덕을 봤다고만은 결코 말할 수 없어. 내 나름의 전략과 노력으로 부를 형성하니까.

유자

그러니까 너는 구체적으로 무슨 일을 한다는 거지?

세라

난 투자를 해. 지금 동산은 취급 안 하고, 부동산 위주로 해.

유자

그럼, 집이 여러 채겠네?

세라

그럼 집 한 채 가져서 투자가 되겠니?

유자

그러니까, 대출을 많이 받아서 막 사들여서 여기저기 세 주고 하는, 갭투자라는 걸 하는 거지? 대출을 받는 거지? 얼마나 받는데? 수십억 받고 그러니?

세라

대출도 아무나 받는 게 아니란다! 하지만, 지금은 대출의 문이 활짝 열려 있어서, 너도 받을지도 몰라!

유자

어떻게 하면 되는데?

세라

목마른 네가 우물을 파보렴! (그대로 나간다.)


유자, 멍하니 서 있다가 휴대폰으로 검색한다.


유자

대출, 대출……. (클릭하다가) 아씨, 또 앱을 깔라고! 안 깔아! (클릭하다가, 멈추는 손) 어, 페이스북 친구 요청? 백만 년 만에 요청이 왔네. 과장님이잖아! 과장님, 애는 잘 자라나? (멈칫) 이 과장님, 인재남이랑 친했는데. (떨리는 손) 헉! 둘이 친구 맞아! 인재남 페북이잖아! 아니, 인재남은 왜 글을 다 공개로 했지? 어, 다 재미있네? (계속 터치를 하다가, 꾹 누르고는 놀란) 헉! 어쩌지! 인재남 게시글에 좋아요를 눌렀어! 그냥 생각만 해도 좋아서, 내 손이 저절로 눌러 버렸어! 어쩌지! 설마, 내가 좋아요 한 줄은 모르겠지. 내 이름 기억도 못 하겠지!


유자가 어쩔 줄 몰라 하는데, 미끈한 남자가 등장한다. 인재남이다.

유자, 재남을 알아보고는, 얼어붙는다. 도망가고 싶지만 발이 땅에 붙었다.


유자

아, 아, 재, 재남 씨?

재남

(천천히 다가오는) 유자 씨.

유자

나, 기억해요?

재남

물론이죠. 아주 명확하게.

유자

하하하. 네. 재남 씬, 항상 불쑥 만나게 되네요. 잘, 지내죠?

재남

네. 유자 씬요?

유자

전 뭐, 그냥.

재남

회사를 나온 뒤 공무원 시험을 준비했다가 1차에 2번 붙고 아깝게 탈락. 결혼하고 가사와 단기 알바. 얼마 전 남편과 헤어지셨고.

유자

그걸 어떻게 다 알아요?

재남

유자 씨 좋아요를 보고 생각이 나서 잠시 알아봤어요. 클릭 몇 번 했더니 다 아는 게 일도 아니더라고요.

유자

아!

재남

기분 나빴다면 미안합니다.

유자

아뇨. 나도 뭐, 재남 씨, 검색해봤어요. 근데, 음, 프라이버시 정보는 못 찾겠던데, 실례지만 결혼은?

재남

못 했습니다.

유자

(상기된) 어머나, 어쩌다가! 왜일까요?!

재남

생각 없습니다.

유자

네? 아. 맞아요. 아. 그래요. 괜찮아요. 아니, 잘했어요. 탁월한 선택이었어요. 결혼도 잘해야 결혼인 거죠. 재남 씨는 지금 인생의 절정기인 것 같던데요. 아주 멋지고 풍요로워 보여요. 나랑 비교하면 차원이 다른 인생? 난, 엉망이에요. 아마 천벌을 받았지 싶네요.

재남

천벌이요? 무슨?

유자

그게…… (결심) 재남 씨, 보고 싶었어요. 한 번은 꼭.

재남

(살짝 당황했다가) 왜요. 이제는 내가 조금은 달라 보여서? 멋지고 풍요로워 보여서? 그래서 그 차갑던 유자 씨 마음속에 스파크라도 일어났나요?

유자

그런 거 아녜요! 내가 그 정도 속물은 아니에요.

재남

그렇군요. 그럼 이만. (가려는데)

유자

재남 씨! 잠깐만! 나 진짜, 할 말이 있다고요! 미안해요. 꼭 말하고 싶었어요. 정말 미안했다고.

재남

네?

유자

우리 헤어질 때, 내가 한 행동, 혹시, 기억해요?

재남

조금은.

유자

재남 씨 톡, 무시했죠? 내가 그때 미쳤었어요. 재남 씨는 그런 대우를 받을 사람이 아닌데, 내가 너무 무례했어. 지금도 바보지만 그때는 정말, 나이도 어리고 상황도 안 좋아서 최악이었어요. 이런 말 몇 마디로 수습은 안 되겠지만, 이제 와서 이런다는 게 우습지만, 어쨌든 언제가 됐든 내가 그 일로 많이 후회한다는 건 꼭 말해주고 싶었어요.

재남

유자 씨.

유자

구질구질하게 들리겠지만, 진심이에요. 나는 바닥을 기고 재남 씨는 빛이 나서 이러는 게 아녜요. 어떤 순간에 어떤 모습으로 만났더라도 재남 씨에 대한 미안한 마음은 똑같을 거예요. 과거를 되돌릴 수만 있다면 땡빚을 져서라도 되돌려서 그 자리에서 미안하다고 했을 것 같아요. 아, 젠장, 과거를 돌릴 수만 있다면!

재남

과거, 과거라!

유자

절대로 그런 짓은 저지르지 않을 거예요. 아니, 모르죠. 그때로 돌아가면 내가 또 똑같이 행동할지도. 난 그냥, 한심한 사람이니까. 그때나 지금이나.

재남

그렇지 않아요. 지금의 유자 씨도, 그때의 유자 씨도, 한심한 사람이 아니에요. 그렇게 한심한 사람이라면, 내가 반했을 리가 없잖아요. 유자 씨는 내게 강렬한 스파크를 일으켜준 사람이에요.

유자

내가, 정말, 그랬어요?

재남

네. 정말로.

유자

그랬구나. 내가 그때는, 그랬군요.

재남

그래요. 그때의 유자 씨는 희망을 머금고 사는 사람 같았어요. 옆에만 있어도 즐거웠어요.

유자

내 모습인데, 그런 내 모습이 이제는 기억도 안 나요.

재남

하지만 나는 또렷이 기억해요. 지금 눈앞의 유자 씨보다 그 때의 유자 씨가 더 선명하게 보일 정도로. 아! 유자 씨랑 소박하게 행복하고 싶었는데.

유자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니! (후회가 밀려오는) 하지만, 모두 다 과거죠.

재남

그래요. (잠시 여운을 담았다가, 불쑥) 유자 씨, 딸이 있죠?

유자

네? 네. 포미요.

재남

혼자도 힘든데, 둘이면 더 힘들겠네요.

유자

아, 그렇긴 한데……. 아뇨, 그런 건 재남 씨가 신경 쓸 게 아니잖아요. 우린 완전 남인데요, 뭐.

재남

얼마나 힘든 거죠?

유자

견딜 만해요. 고기는 못 사 먹어서 콩으로 단백질 채우고 여름에 에어컨을 못 틀어도 부채를 부치면 되는 거고, 가스비 때문에 보일러를 못 틀어도 옷을 잔뜩 껴입고 자면 돼요. 요새 패딩은 배기지도 않더라구요. 하하. 아무리 힘들어도 어떻게 살게 되더라고요.

재남

그 정도인가요?

유자

그런 식으로 보지 마세요. 비웃을 필욘 없지만 안타깝게 여길 이유도 없어요. 순전히 내가 무능해서 그런 거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특히 재남 씨는 1도 신경 쓸 거 없어요. 내가 상처만 줬는데 무슨! (하다가, 복받쳐서 흐느끼는) 우리가 죽더라도, 신경 쓰지 마요! 장례식장에도 오지 마요! 산 사람이 설마 굶거나 얼어서 죽기야 하겠어요! (잠시 흐느끼면)

재남

(휴대폰을 꺼내 두드리며) 잠시 동안만 친구 신청해도 돼요?

유자

네? (휴대폰 꺼내 두드리며) 아. 네.

재남

생각해 보니까, 유자 씨한테 선물을 많이 못 줬어요. 그때는 유자 씨가 정말 소중했지만, 나도 사정이 안 좋았어요. 하지만 지금, 유자 씨한테는 도움이 더 필요한 거 같으니까.

유자

안 돼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선물을 왜 받아요?

재남

그땐, 나보다 유자 씨가 더 돈을 많이 벌어서 만날 때 돈을 더 냈어요. 안 그래요?

유자

네? 아, 그랬던가?

재남

날 사랑하진 않았지만, 잘 챙겨줬어요. 생일 땐 예쁘게 포장된 선물도 주고, 비뚤비뚤 손으로 쓴 카드도 챙겨 받았어요.

유자

(기억이 안 나지만) 그랬군요.

재남

그랬어요. 그래서, 뭐라도 주고 싶어요. 비트코인.

유자

코인?

재남

일종의 전자화폐예요. 암호를 써서 거래해요.

유자

상품권이나 쿠폰 같은 걸까요?

재남

좀 다른데, 아무튼 갖고 있어요. 지금은 못 써도.

유자

(급속 실망) 아, 지금은 못 쓴다구요.

재남

유자 씨보다 따님을 위한 선물이에요. 몇 년만 간직해 둬요. 아마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유자

네. 뭐. 재남 씨가 그렇다니까 그런 거겠죠?

재남

회사에서 채굴했는데, 10개를 드릴게요. 몇 년은, 간직해 줘요.

유자

고마워요. 아무튼.


재남, 유자를 바라보고는, 그대로 나간다.


유자

(휴대폰 보고) 바로 친구도 차단했네. (휴대폰 두드리며) 비트코인? 어쩌라고? 나한테 이딴 걸 왜 주는데! (곰곰 생각) 열 받은 거야. 그래서 복수하는 거야! 그냥, 엿 먹으라는 거지! 하! 그럼 그렇지! 인재남! (부르르했다가) 하긴, 내가 재남 씨한테 잘못한 건 맞잖아. (그러나 다시 분한) 아무리 그래도 차라리 대놓고 화를 내지, 이런 식으로 엿을 먹여? 아니, 차라리 엿을 달라고! 엿은 먹을 수나 있잖아!


세라가 유유히 지나가면,


유자

세라! 너, 비트코인이라는 거 알아?

세라

뭐래. (가려는데)

유자

아니, 그게, 인재남 씨가, 어쩌구저쩌구해서 줬거든.

세라

(잠시 생각) 그래? 흐음.

유자

혹시, 네가 살래?

세라

내가 가져서 뭐 하려고?

유자

너는 자산관리 하는 사람들도 잘 알고, 알바한테 맡길 수도 있잖아.

세라

얼마에 팔 건데?

유자

(침 삼키며) 내가 10개 있는데. 500만 원에 넘길게.

세라

500? 야아!

유자

4, 450?

세라

에휴! 내가 네 사정 모르니? 알았어. 500에 사줄게.

유자

와! 진짜지? (하다가) 너, 이 거래, 절대 물리기 없기다!

세라

친구 사이에, 어쩌겠니?

유자

(싱글벙글) 절대, 물리면 안 돼! 절대로!


각자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유자와 세라.



한 치 앞을 못 보는 유자, 그녀의 인생에 볕 들 날은 올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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