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6 - 새 옷을 입고, 저 깊고 시퍼런 심연을 쳐다보던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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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적인 낭만!
낭만적인, 독일이 사랑하는 낭만적인 수도승 한 명이 오랜만에 다시 베를린을 찾았다. 오랫동안 때 묻고, 찢어졌던 옷을 새 옷으로 갈아입고, 빛바랜 그 푸른색 바다는 다시 본래의 빛을 되찾았다. 지긋이 쳐다보던 저 깊고 깊은 시퍼런 바다, 저 멀리 보이는 뱃머리, 절벽 위에서 바라보던 심연..... 독일이 사랑한 낭만파!
박물관 섬의 '구 박물관 altes Museum'에서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을 비롯해 독일 낭만주의 작품들이 전시 중이다. 베를린 박물관 섬의 전시품들은 독일적인 정체성을 보여주는 것들이라 이 '구 박물관'에서 독일 낭만파 작품을 전면에 내세운 것은 당연해 보인다. 사실 독일적인 낭만과 프랑스적인 낭만은 그 성격부터가 판이하게 다른다. 격정적이고 저돌적인 프랑스의 제리코와 들라크루와의 회화와 독일의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를 비교해보라!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혼란을 다잡은 나폴레옹은 대대적인 유럽 정벌에 나서며 국내 정치에 쏠렸던 관심을 국외로 돌려놓는다. 18세기 여전히 수 백개가 넘는 공국, 제후국으로 분열되어 있던 독일은 아주 좋은 정벌 대상이었다. 이때 비로소 대 나폴레옹 전쟁 패배로 독일 땅에서는 '독일적인 것'에 대한 인식과 더불어 다른 한편으로 패배적이면서 신화적이고 미지의 세계로 도피하려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 시기 독일 낭만주의 회화가 몽상적이고 신비스러운 양태를 띠는 이유다. 가장 대표적인 화가가 바로 구 박물관에서 지금 대대적으로 전시되고 있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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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ugust Rodin,
"인간과 그의 생각 Der Mensch und sein Gedanke "
'구 박물관 altes Museum'은 대형 규모의 박물관임에도 불구하고 소소한 재미가 있다. 이번 전시기획은 컬렉션보다는 배치와 선별에서 차별화하려는 경향을 보이는데 그래서 그런지 찬찬히 음미할수록 더욱 맛깔난다. 건물 안으로 들어서서 독일 화가들을 천천히 둘러보고 갑자기 마주친 한 공간, 그런데 눈길을 끄는 뜻밖의 작품이 있다. 상설전시실에는 Auguste Rodin의 작품들이 몇 점 전시되어 있는데 그중에서도 "인간과 그의 생각 Der Mensch und sein Gedanke"이라는 조각이 내 시선을 확 잡아 끈다.
거친 대리석,
상념에 빠진 남자,
자라나는 하얀 어린 생각의 목덜미에 머리를 지긋이 댄 형상,
자극적인 요소 하나 없이 생각의 어린 몸과 상념에 빠진 남자가 힘없이 떨구고 있는 손.....
남자의 입술 위치,
두 몸이 부딪히는 저 엇갈린 위치,
조각의 매끄러운 표면과 저 하얀 대리석은 인간이 아닌 신의 몸을 재현한 듯한 인상을 준다.
모두 관능적이면서도 상당히 미학적!
생각하는 남자
생각하는 남자의 얼굴과 그 절묘한 포즈에만 집중하느라 그의 몸을 제대로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그의 몸! 현직 권투 선수를 모델로 했기에 그의 몸은 상당히 아름답다.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신들의 몸이 이렇게 완벽한 비율과 성난 근육과 팽팽한 긴장감을 가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전면의 얼굴도 자세히 본 적이 없다. 찬찬히 보니 상당히 마른 얼굴, 움푹 꺼진 볼, 얼굴의 뼈 구조가 드러나는 이 얼굴, 상당히 매력적이어서 오랫동안 쳐다보게 하는 남자 얼굴이다.
근육으로 뒤덮인 운동선수의 몸에 '생각하는 사람'이라니...., 고대 로마시대의 전투사나 올림푸스 신들의 몸 그리고 잘 단련된 현대 운동선수의 몸, 제우스 상이라 해도 손색없을 이 몸에 로댕은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타이틀을 붙였다. 그러고 보면 로댕은 위의 조각에서도 그랬지만 생각을 형상화하기 위해 아름다운 몸을 적극 활용하는 특징을 보이는데, 집작에 가까운 완벽한 몸과 생각을 엮어놓은 로댕에 대해 다시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카를 블레헨 Carl Blechen'의 '용과 폐허 된 탑 Turmruine mit Drachen',
가끔, 아니 요즘 부쩍 관심을 갖게 되는 하찮아 보이는 디테일,
'용이라니.... 용이 대체 어디 있지?' 한참 용을 한참 찾다가 무너진 탑 저 뒤편에서 드디어 용을 발견했다. 작고 비쩍 마른, 거의 날지 못할 것만 같은 저 조그만 날개,,, 페허가 되어 무너져가는 것이 저 탑만은 아닌 것이다. 낭만주의의 전형적인 모티브이기도 하고! 이 페허 모티브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동시대 대문호인 괴테는 바이마르 공원 (Ilm an der Iser)에 일부로 성이 무너진 듯한 페허를 만들게 하기도 했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수도승'
오랜 시간 빛바래고 거칠어진 프리드리히의 작품 '바닷가의 수도승 Der Moench am Meer', (1808-1810년)을 베를린은 오랜 시간을 들여 복원했다. 사실 1,1 m x 1,72m나 되는 이 대작은 전시장 한 면을 다 차지하고 있을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크다.
오랜시간 어떻게 탈색되고 어떻게 변헝되었고 무엇을 복원했는지도 한켠에 정성껏 기록해놓았다. 세상에나.... 이 작품이 이렇게 커다란 작품이었이었다니....! 역시 .jpg가 주지 못하는 실물만의 아우라란 이런 것을 말하는 거겠지? 이 커다란 작품이 거의 시퍼런 바다색! 그 앞에 서자 저 먼 바다와 폭풍우 전야의 바다에서 전해지는 긴장마저 생생하게 느껴진다.
그러나 저 검은 옷의 수도승은 거의 한눈에 식별이 되지 않을 정도로 점처럼 작다. 광활한 자연 앞에 한없이 작은 인간의 형상은 카스파 다비드의 전형적인 화풍이기도 하며, 이 수도승 역시 저 멀리 보이지도 않을 지평선을 향해 몸을 돌리고 있다. 혁명이 몰아치는 옆 나라 프랑스의 상황, 거침없이 진격하는 나폴레옹 군대, 군국주의적인 프로이센의 검열과 강압적 분위기, 시민의 위축.... 독일 낭만주의의 성향을 이 작게 그린 수도승을 통해 느껴본다.
'외로운 나무 Der einsame Baum'
이것도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의 작품, '외로운 나무 Der einsame Baum' 저 멀리 산 능선 정가운데를 차지한 나무 한 그루, 나무에 온통 눈길이 향하겠지만 나무 밑으로 시선을 떨구니, 알아볼 수도 없이 작게 그려진 그 나무 근방에 수십 마리 양 떼가 노닐고 있고 나무에 양치기가 지팡이를 쥔 채 기대어 양 떼를 쳐다보고 있다.
참 시종일관 스타일 일관적인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나도 모르게 내 시선도 저 양치기가 보는 쪽을 따라갈 수밖에!! 그의 시선은 관람객의 시선을 그림 속의 인물의 눈높이로 맞춰버린다. 독하게 우리를 직시하는 시선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우리의 시선을 그림 속 인물과 동일하게 만들어 버리는 화가도 있다.
'Caspar David Friedrich: 창문 가의 여인 Die Frau am Fenster',
열린 창문으로 보이는 곳은 배가 닻을 내리고 있는 항구일 것이다. 미루나무가 서 있고, 여인은 창문 밖을 쳐다보고 있다. 완벽한 직사각형의 창문, 창틀, 직선의 벽, 시종일관 엄격한 이 사각형의 규격을 깨는 이 여인의 자세, 약간 비스듬하게 허리를 옆으로 기울인 이 모습으로 이 공간은 갑자기 생동감을 얻는다.
이런 미묘한 균형 파괴, 이로 인한 생동감..... 이 한 끗 차이!
'아돌프 폰 멘첼 Adolf von Menzel'의 '무도회 만찬 Das Ballsouper'
이곳에는 낭만주의 작품들 말고도 19세기 독일의 대표적인 사실주의 화가인 멘첼의 대작들도 다수 있다. 그는 역사적인 장면들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것으로 유명하다. 여인들의 무도회 드레스와 머리장식은 지금 재현해 낼 수 있을 정도로 사실적이다. 빌헬름 1세의 대관식 대작으로 유명한 화가인데, 독일에서 특히, 이웃나라에서 별로 본 적이 없는 이 멘첼이라는 화가의 개인적인 명성과 출세는 제국으로의 발돋움,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유럽의 강국으로 발전해가는 독일 제 2 제국의 영광을 그대로 재현하는 것이 필요했을 시기와 맞물린다.
즐거운 박물관 여행~
독일 낭만주의는 보는 재미가 있다. 대체적으로 소심하고 가시적으로 건장한 독일인답게 거대한 자연 앞에 점처럼 작은 인간을 배치한 프리드리히의 작품들은 그래서 독일적이다. 돌려세우면 텅 빈 얼굴에 슬픔과 해탈의 표정을 가득 짓고 있을 듯한 독일이 사랑한 수도승! 독일에...... 구 박물관에 수도승이 돌아왔다!
글, 사진 모두 Arhelg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