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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rhelger Sep 22. 2016

페르가몬, 페터 바이스

베를린 5 - 승자의 역사가 아니다, 패배했지만 저항하는 미생의 미학

0.

사실 여행은 책 한 구절에서 시작되기도 한다.


"사방을 에워싼 석벽에서 몸뚱이들이 솟구쳐 올랐다. 서로 뒤엉킨 채 혹은 파편으로 조각난 채, 떼 지어 펼쳐지는 몸뚱이들. 홀로 남은 토르소, 치켜든 팔 하나, 찢긴 옆구리, 또 상흔을 담은 한 점 살덩이. 어렴풋이나마 원래의 형상을 가늠할 수 있었다. 그것은 언제나 싸우는 몸짓이었다. 피하고 잽싸게 몸을 빼고, 공격하고, 몸을 막고, 몸을 쭉 뻗어 일으키고, 잔뜩 웅크리고, 비록 여기저기 지워졌지만, 불끈 버티고 있는 외발, 휙 젖힌 등짝, 윤곽만 남은 장딴지 하나로 그것들은 하나의 공동의 움직밈으로 맞물리며 어우러졌다. 하나의 거대한 투쟁이었다."
 - 페터 바이스: 저항의 미학 1권 11쪽 -


<저항의 미학> 1권 첫 부분에 '페르가몬 신전 부조'에 대해 묘사하는 이 장면, 거인족들이 죽어나가는 장면, 살육의 장면이자 도륙당하는 처참하고 끔찍한 장면, 누굴까 이런 전쟁 영화 같은 잔인한 장면을 영원토록 보존하도록 한 사람은? 왜? 도대체 죽어나가는 인간형상들의 아픔을 보도록 왜 강요하는 거지?


1.

베를린 페르가몬 박물관


베를린을 대표하는 박물관이라서가 아니다. 굳이 베를린이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곳에서 별로 뛸 일 없는 내 가슴을 뛰게 할 수 있는 저 석벽 부조가 있기 때문이다. 독일 현대작가인 페터 바이스가 쓴 1500 쪽짜리 '저항의 미학' 첫 장을 시작하는 바로 저 묘사 때문이었다. 나는 질문했고, 실제로 보고 싶었다.



올림푸스 신들과 거인족과의 투쟁을 묘사한 이 석벽 부조는 거인족을 제압하고 승리자가 된 올림푸스 신들처럼 페르가몬 왕국의 아탈로스 왕이 갈리아인들을 물리친 것을 기념해 세우게 한 것이다. 바로 이 거대한 전시물을 보면서 세 명의 젊은 혁명가들이 미학과 역사철학을 토론하는 장면으로 책의 내용은 시작된다. 부조는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를 재현하고 있는데, 특히 제우스를 포함한 올림포스 신들이 반란을 일으킨 거인 족을 살육하는 장면이 극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하늘과 땅, 혹은 하늘의 자식들인 올림프스의 신들과 대지의 자식들인 거인족 사이의 전쟁이니만큼, 이것은 지배자와 피지배자 사이의 전쟁이라고 할 수도 있다.


책으로나마 접하는 페르가몬 제단


대영박물관과는 달리 베를린에서 생뚱맞은 페르가몬 유적 감상을 계획해도 심적인 거부가 없었던 이유는 1870년 프랑스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빌헬름 황제의 제 2 제국이 이 유적을 2만 마르크를 주고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사들였기 때문이다. 약탈 유물이 아니기에 그래도 그 긴 시간을 유랑한 이 건물을 보고 뭔가를 느낄만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 유적은 독일 제 2 제국이 황제국으로서, 즉 제국의 위용을 과시하고 마찬가지로 그들의 승리를 정당화하기 위해 거의 1 천 년 동안 폐허 더미 아래 묻혀 있었던 이 신전을 발굴하게 한 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사들인 것이다. 이 페르가몬 유적을 토대로 만든 박물관이 바로 제국의 위엄을 더해줄 것이라고 믿었던 페르가몬 박물관이다. 독일의 대 프랑스 전쟁의 승리를 기념하고 고대 역사유물을 갖춤으로써 황제국의 뿌리가 굳건함을 보여줄 수 있는 전시관! 페르가몬 제단'은 단연 이 박물관의 정체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최고의 전시물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2013년부터 2025년까지 대대적인 리노베이션 일정으로 전시 품목에서 빠졌다. 운이 없긴 했지만 박물관 샵에서 이 멋진 책을 살 수 있어서 위로를 삼을 수 있었는데 여기 나오는 생생한 이미지는 모두 이 책 덕분이다.


박물관 샵에서 구입한 '페르가몬 제단'에 관한 책, 아주 얇고 정보도 풍부한 49쪽 짜리 책!


2.

'페르가몬 제단' 앞에서 우린 여전히 미생들은 아닌지...


우린 유럽여행을 하며 눈을 현혹하는 이국적인 지붕과 엄청난 교회와 성당의 겉모습 외에 유적과 조각, 회화, 박물관의 전시품과 건축에 스며든 이야기를 읽어낼 수 있는가? 여전히 제작을 지시한 황제와 제후와 왕들의 존엄과 화려함 앞에 주눅 들어 있지는 않은지.... 그 사치스러움과 휘황찬란함 속에 숨어 있는 과시욕과 수많은 전쟁 약탈품 앞에서 차라리 보는 것을 포기하고 카페와 맛집을 순례하지는 않는지.... 우린 여전히 유럽여행을 하면서도 미생은 아닌지....


"제사장인 군주와 승려들을 숭배하는 데 이용되었던 이 신전, 땅에 발붙이고 사는 각종 하층민에 대한 귀족의 승리를 찬미했던 이 신전의 가치가 그렇다면 이제는 중립적인 된 건가. 관람하는 모든 사람의 소유가 된 건가. 부조에서 야만적인 반인반수들을 짓밟고 있는 자들은 분명 특별한 존재들이었다. 신전의 부조는 저기 아래, 도시의 좁은 골목에서 방앗간, 대장간, 공방을 운영하던 사람들, 시장에서, 공장에서, 항구의 조선소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기념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신성한 석조물은 3백 미터 높이의 산 위에, 창고와 병사들의 목욕탕, 극장, 관청 건물, 지배 족벌의 궁정과 함께 성곽 내부에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민중은 경축일에나 그 신전을 접할 수 있었다." -저항의 미학 20쪽-


3.

Der Pergamonaltar, Philipp von Zabern, 책으로 보는 '페르가몬 제단'



"우리는 땅에서 솟아오르는 가이아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풀어헤친 머리카락의 물결이 그녀를 보듬으며 흘러내렸다. 어깨에는 석류 열매가 담긴 접시를 메었으며 잎사귀와 포도송이들이 목덜미를 담아 오르고 있었다. 맨돌이 드러난 얼굴은 비스듬히 위를 향했다. 입 모양은 자비를 애원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상처가 턱에서 목젖까지 이어지며 벌어져 있었다. 사랑하는 아들 알키오네우스는 대각선으로 몸을 뒤틀며 쓰러지는 중이었다. 토막만 남은 왼손은 어머니를 찾고 있었다. 갈가리 찢겨 축 늘어진 다리에 매달린 왼발이 간신히 어머니에게 닿아 있었다. 허벅지와 하반신, 배와 가슴팍은 경련으로 팽팽히 부풀어 있었다. 독사에게 물린 갈비뼈 사이의 작은 상처에서 죽음의 고통이 퍼져 나가고 있었다. 알키오네수스가 단숨에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어깨에 활짝 펼쳐진 물총새 날개 때문이었다. [...]" - 저항의 미학, 17쪽.


4.

과거의 오스만 제국과 현재의 터키, 그리고 한국...



       

페르가몬 박물관이 제한된 규모로 전시하고 있어서 한 시간 이상이나 줄 서서 입장한 보람을 느끼려면 '페르가몬 제단' 말고도 다른 전시품에 대한 애정을 키워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낮은 천장에 갑갑하게 서 있는 신전 제단과 현재의 조명 속에 빛나지 않는 밀레투스의 성문에  실망할지도 모른다.

                                        

이번에 전시되지 않은 이 유적은 아마 2025년 이후에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헐값에 귀중한 문화자산을 독일제국에게 팔아버린 오스만 제국, 지금의 터키, 이곳을 방문할 당시 터키 대통령인 에르도완은 군사쿠데타를 구실로 학자와 법률가를 비롯한 지식인 숙청에 나서고 있었다. 자국의 문화를 지키는 힘, 자국의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힘... 문화를 팔아버리고 지식인을 숙청하고 그것에 환호한다는 대중을 바라보며  터키의 과거와 현재를 다시 생각해 본다.


하늘에서 내려온 자들에게 도륙당한 거인족, 거인족은 하늘에서 내려 온 신의 자식들에게 반란을 일으키지 말았어야 했나? 그러나 살육당한 거인족 편을 들었던 헤라클레스가 걸쳤던 사자 앞발이 달린 망토는 누가 이 망토를 입고 저항을 해야 할 것인지를 묻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조적이고 감상적으로 미생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도 던져지는 질문일까봐 깜짝 놀란다.




베를린 박물관에 관한 포스팅 1.: 베를린의 보물섬


글. 그림 모두 Arhelg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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