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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autiPo Jan 07. 2017

[Book] 여성의 삶 구석구석 침범한 좌절과 폭력 1

<82년생 김지영> 20161014 조남주 作


* 차례

2015년 가을              7
1982년~1994년      21
1995년~2000년      51
2001년~2011년      81
2012년~2015년     125
2016년                   167


사소하고 집요한 차별, 좌절, 폭력

<82년생 김지영> 은 한 여성의 삶 구석구석을 좀먹는, 아주 사소하고 아주 집요한 차별, 좌절, 폭력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이 소설의 목차는 특이하게 년도로 구분되어 있습니다. 심지어 중간 중간 실제 통계자료나 신문 기사를 각주로 달아 놓아서, 소설이 아니라 사회과학 논문인 것 같은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소설은 2015년 가을, 정신 분열인지 빙의인지 모를 이상 행동을 보이는 김지영 씨의 모습을 먼저 비추고, 다시 그녀가 태어나던 1982년으로 거슬러 올라가 그녀의 인생을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합니다. 그 안에는 김지영 씨 본인의 인생 뿐만 아니라 같은 시간을 다르게 살아가는 다양한 여성들의 인생이 등장합니다. 오빠들 뒷바라지를 위해 '공순이'가 되었던 김지영 씨 어머니의 인생이 있었고, 여학생에게만 강제된 성 역할의 굴레에 반항한 학창시절 친구들의 인생이 있었고, 현실에 벽에 좌절하거나 현실의 벽을 깨부수려고 노력한 직장동료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소설 속 김지영 씨보다 7살이 어립니다. 그래서인지 어느 부분은 완전히 공감이 되었지만 또 어느 부분은 저보다 한참 오래 전 시절의 이야기처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것이 이 책의 큰 매력입니다. 읽는 이의 세대에 따라, 또 읽는 이가 현재 처한 상황에 따라 이 책은 계속해서 다르게 다가올 것입니다. 저도 지금으로부터 십년이 지난 후에 이 책을 다시 읽는다면, 지금과는 다른 페이지에 공감의 밑줄을 긋게 될 것 같습니다.


아들을 원하던 어른들에게 실망을 안겨준 둘째딸 김지영 씨의 출생부터 어린시절, 학교 생활까지 이어지는 책의 앞부분을 읽으면서는 사실 별 감흥이 없었습니다. 시중에 흔한 페미니즘 계열의 소설 중 하나겠구나, 싶은 생각에 가볍게 쓱쓱 책장을 넘겼습니다.


김은영 씨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채 어머님, 죄송해요, 하며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는 따뜻하게 며느리를 위로했다.
"괜찮다. 둘째는 아들 낳으면 되지."

김지영 씨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갓난아기를 품에 안은 채 아가, 미안하다, 하며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할머니는 이번에도 따뜻하게 며느리를 위로했다.
"괜찮다. 셋째는 아들 낳으면 되지."

-<82년생 김지영> p.27
그러니까 김지영 씨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시절만 해도 여자 반장이 채 절반이 되지 않았고, 그것도 과거에 비해 크게 증가한 수치라는 뜻이다. 그리고 미화부장은 여학생이, 체육부장은 남학생이 했다. 선생님이 시키든 아이들이 자원하든 꼭 그랬다.

- <82년생 김지영> p.47


김지영 씨보다 조금 뒤에 태어난 저는, 적어도 학창시절에는 기억에 남을 만한 차별을 받은 적은 없었고, 늘 반장을 도맡아 하며 남녀를 불문하고 뒤쳐지는 아이들을 도와주는 리더였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아들을 강하게 원하셔서 저의 형제관계도 90년대 가장 흔하다는 '딸-딸-아들' 이었지만 그럼에도 부모님에게서는 어떤 차별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김지영 씨의 어린 시절에 크게 공감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이런 제 마음이 덜컥, 멈춘 곳은 대학 졸업을 앞둔 김지영 씨가 구직활동을 하면서였습니다.


윤혜진 씨는 좀 비관적이었다. 김지영 씨보다 학점도 높고, 토익 점수도 높고, 컴퓨터 활용 능력이며 워드프로세서 같은 취업 필수 자격증들도 있고, 솔직히 기업에서 더 선호하는 전공인데도 대기업은커녕 월급은 제때 나올까 의심스러운 곳에도 취직하기 어려울 거라고 했다.

"왜?"

"우린 스카이가 아니니까."

"취업 설명회 때 오는 선배들 봐. 우리 학교에서도 괜찮은 회사 많이 가."

"그 선배들 거의 남자잖아. 너 여자 선배 몇 명이나 본 것 같아?"

김지영 씨는 번쩍, 하고 눈 하나가 더 떠지는 기분이었다. (중략)

김지영 씨가 졸업하던 2005년, 한 취업 정보 사이트에서 100여 개 기업을 조사한 결과 여성 채용 비율은 29.6퍼센트였다. 겨우 그 수치를 두고도 여풍이 거세다고들 했다. 같은 해 50대 대기업 인사 담당자 설문 조사에서는 '비슷한 조건이라면 남성 지원자를 선호한다'는 대답이 44퍼센트였고 '여성을 선호한다'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 <82년생 김지영> p.96


"엄마, 이럴 줄 알았으면 아들로 낳아주지 그랬어!"

김지영 씨와 마찬가지로 저는 취업 준비를 하며 "번쩍, 하고 눈 하나가 더 떠지는 기분"을 처음으로 느꼈습니다. 처음으로 내가 여성이고, 여성이란 사회 생활에 뭔가 보이지 않는 제약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이었습니다. 아무데나 취업만 시켜달라는 마음으로 웬 들어보지도 못한 회사에까지 원서를 제출하던 그 때, 어떤 기업의 공고가 뜨면 제가 가장 먼저 확인했던 것은 ① 문과는 어느 직무에 지원가능한가, ② 그 직무는 여성을 채용하는가 였습니다. 세상이 온통 녹아내려가는 것처럼 절망과 불안이 가득했던 취준생 시절의 어느 날엔가, 지원서를 쓰다가 너무 서러워져서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서 "이럴 줄 알았으면 아들로 낳아주지 그랬어!!" 라는 어이없는 투정을 부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습니다.


그 인고의 시간을 거쳐 김지영 씨는 드디어 한 회사에 입사를 합니다. 하지만 취업준비가 그냥 커피였다면 회사 생활은 티오피였던 것. 김지영 씨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학교와는 차원이 다른, 높고 높은 현실의 벽이었습니다.


김은실 팀장은 여자 같지 않다는 소리를 듣기 위해 회식 자리에 끝까지 남았고, 야근과 출장도 늘 자원했고, 아이를 낳고도 한 달 만에 출근했다. 처음에는 자랑스러웠는데, 여자 동료와 후배들이 회사를 나갈 때마다 혼란스러웠고, 요즘은 미안하다고 했다. 회식은 사실 대부분 불필요한 자리였고, 잦은 야근과 주말 근무, 출장은 인원을 보강해야 하는 문제였다. 출산, 육아로 인한 휴가와 휴직도 당연한 것인데 후배들의 권리까지 빼앗은 꼴이 됐다.

- <82년생 김지영> p.112
월급 대부분을 베이비시터에게 쏟고도 늘 동동거리며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아이를 부탁하고, 남편과 매일 전화로 싸우고, 급기야 어느 주말 아기를 업고 사무실에 나타난 후배는 결국 회사를 그만두었다. 미안하다는 후배에게 팀장은 어떤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 <82년생 김지영> p.113


김지영 씨의 여자 동료들 중에는 행복해보이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지지 않겠다며, 유리천장을 극복하겠다며 많은 것을 포기하고 결국 팀장의 자리에까지 오른 김은실 팀장도 '상처뿐인 승리'에 가깝습니다. 그나마 이 '상처뿐인 승리'를 얻지 못한 많은 선배들은 가정과 직장 사이에서 발만 동동 구르다가 결국 회사를 떠나고 맙니다.


어느 날 문득 사무실을 둘러보았는데 부장급 이상으로는 여자가 거의 없더란다. (중략) 10년 후 자신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았고, 고민 끝에 사직서를 냈고, 이래서 여자는 안 된다는 비아냥이 돌아왔다. 선배는 여자를 자꾸 안 되게 만드니까 이러는 거라고 대답했다.

- <82년생 김지영> p.98
대표는 업무 강도와 특성상 일과 결혼 생활, 특히 육아를 병행하기가 힘들다는 것을 잘 알고 있고, 그래서 여직원들을 오래갈 동료로 여기지 않는다. 그렇다고 사원 복지에 힘쓸 계획은 없다. 못 버틸 직원이 버틸 수 있는 여건을 만드는 것보다, 버틸 직원을 더 키우는 것이 효율적이라는 게 대표의 판단이다.

(중략)

김지영 씨는 미로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성실하고 차분하게 출구를 찾고 있는데 애초부터 출구가 없었다고 한다. 망연히 주저앉으니 더 노력해야 한다고, 안 되면 벽이라도 뚫어야 한다고 한다.

- <82년생 김지영> p.123


슬픈 일입니다. 가정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그만두는 여성들, 그리고 그것이 반복되면서 '그만둘 생각이 없는' 여성들조차 애초에 기회를 얻지 못하고, 그러니까 또 그만두게 되는 악순환입니다.


저는 넓게 보면 이것이 남녀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남녀불문 기본적인 업무강도가 너무 높은 직장문화 전체가 문제인 것이죠. 육아를 위해 부부 중 누군가는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하는데, 대부분의 회사에서 남성이 육아휴직을 쓰거나, 아이가 아파서 조퇴를 한다거나 하는 것은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여자 쪽이 육아부담 대부분을 떠맡게 되고, 점점 회사에서의 고과나 승진에서는 남성 동료들에게 밀리기 마련입니다. 부인의 회사 생활이 불안해질수록, 남편은 더더욱 회사를 포기하기 힘들어집니다. 둘 중에 한 명이라도 안정적인 일자리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 요지는, 이 문제가 결코 '육아에 참여하지 않는 나쁜 남편 對 모든걸 희생한 불쌍한 아내'의 구도가 아니라는 겁니다. 남편과 아내는 꾸역꾸역 삶을 쥐어짜가며, 가정과 회사를 잃지 않고자 위태위태 줄타기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유리천장에 대한 도전의식과 패기로 가득찼던 열여덟의 나

저 역시 김지영 씨와 그 동료들에 십분 공감하는 회사원입니다. 입사 만 3년이 된 요즈음,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이 참 많습니다. 10년 전 패기와 꿈으로 가득찬 열여덟의 저였다면, 소설 속 김은실 팀장처럼 어떻게든 살아남을 궁리를 했을 것 같습니다. 그때는 그랬습니다. 엄마나 선생님이 진로에 대해 조언해주실 때에도 '여자는..', '여자가 하기에는...' 이라는 말만 붙으면 팍 쏘아붙이던 때가 있었습니다. 여자라서 안되는 일이라면 오기가 생겨서 남자보다 두배의 노력을 들여서라도 내가 저 유리천장을 깨부수고 말겠다는 패기가 있었습니다.


승리를 위해 희생된 나의 삶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게 해서 승리한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더 많이 듭니다.  그 승리에 희생된 나의 삶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테니까요. 그만두고 살림이나 하고싶다는 뜻이 아닙니다. 저는 일과 삶 둘 모두를 가지고 싶습니다. 누구보다 강하게 그걸 원하는 사람입니다. 둘 모두를 지킬 수 있는 길을 찾아야 할 것 같습니다. 이시대를 살아가는 여성 직장인들, 넓게는 남녀 직장인 모두의 발 앞에 놓인 문제일 것입니다. 돌파구를 찾는 것은 각자의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허덕허덕 꾸역꾸역, 오분대기조 같은 직장생활

남녀를 막론하고, 배우자와 아이가 없는 싱글 직장인으로서도 허덕허덕 숨이 가쁜 것이 회사생활입니다. 단순히 업무량이 많은 것만이 문제가 아닙니다. 개인생활이란, 회사생활을 모두 하고 남는 시간에 조각조각 쑤셔넣으면 되는 줄 아는 근무 문화가 가장 큰 문제입니다. 법적으로 보장된 연차를 쓰면서도 전날까지 업무를 휙휙 쳐내며, '내일 정말 갈 수 있겠지?' 마음 졸여야 합니다. 실제로 이것 저것 예약해두고도 업무 때문에 취소하는 경우도 많고, 심지어는 휴가는 가되 그주 주말에 나와 밀린 일을 하는 동료도 있습니다.


숨이 막히게 답답한 현실입니다. 그래서 저는 과감히 다른 길을 찾아보려고 합니다. 단순히 여자라서, 결혼을 하고 아이를 키워야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적어도 저에게 있어 이것은 남과여의 문제에 앞서 평생 오분대기조로 사느냐, 아니면 개인의 삶과 행복을 확보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저는 제가 남자였어도 같은 선택을 했을 것입니다.



세상이 참 많이 바뀌었다. 하지만 그 안의 소소한 규칙이나 약속이나 습관들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중략) 법이나 제도가 가치관을 바꾸는 것일까, 가치관이 법과 제도를 견인하는 것일까.

- <82년생 김지영> p.132



(다음 글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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