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 20161014 조남주 作
일-가정 사이에서의 갈등 외에, 사실 제가 <82년생 김지영>을 읽으며 가장 공감이 갔던 부분은 따로 있습니다. 반쯤 누워서 책장을 쓱쓱 넘기던 저는, 이 대목에서 벌떡 일어났습니다. 한 줄 한 줄, 내 마음을 그대로 떠다 인쇄해놓은 듯한 수 페이지를 보며 마음이 쓰렸고 한 편으로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당신의 그 소중한 딸도 몇 년 후에 나처럼 될지 몰라.
반주를 일찍 시작했는지 이미 얼굴이 달아오른 부장은 김지영 씨를 보자마자 과하게 반색했고, 나란히 앉아 있던 과장이 맥주잔과 수저를 들고 일어서며 김지영 씨에게 부장 옆에 앉으라는 눈짓을 했다. 부장은 역시 한 과장이 눈치가 있다면서 껄껄 웃었는데, 김지영 씨는 모든 상황이 당황스럽고 수치스럽고 죽어도 그 자리에 앉기가 싫었다.
(중략)
결국 김지영 씨는 부장 옆에 앉았고, 따라 주는 맥주를 받았고, 강권에 못 이겨 몇 잔을 연거푸 마셨다.
(중략)
주량을 넘어섰다고, 귀갓길이 위험하다고, 이제 그만 마시겠다고 해도 여기 이렇게 남자가 많은데 뭐가 걱정이냐고 반문했다. 니들이 제일 걱정이거든.
- <82년생 김지영> p.116
밤 12시가 조금 넘자 부장은 김지영 씨의 잔에 맥주를 가득 채우고는 비틀비틀 자리에서 일어났다. 식당이 다 울릴 정도로 큰 목소리로 대리기사와 통화하고는 일행들을 향해 말했다.
"내 딸이 요 앞 대학에 다니거든. 지금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는데 이제 집에 간다고 무서우니까 데리러 오라네. 미안한데 나는 먼저 갈 테니까, 김지영 씨, 이거 다 마셔야 된다!"
김지영 씨는 겨우 붙잡고 있던 어떤 줄 하나가 툭 끊어지는 것을 느꼈다. 당신의 그 소중한 딸도 몇 년 후에 나처럼 될지 몰라, 당신이 계속 나를 이렇게 대하는 한.
- <82년생 김지영> p.117
정확히 저희 부서의 모습이었습니다. 정확히 저와 제 부서장이었습니다. 막 대학생이 된 딸을 금지옥엽 아끼는 제 부서장은 '딸바보'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저는 그의 딸도 아닌데 자꾸만 술자리에 데리고 가고 술을 강권하고 심지어 허벅지나 팔뚝, 어깨를 툭툭 만져대거나 팔짱, 손깍지를 끼기도 합니다. 그 수위는 혈중알콜농도와 비례합니다. 터치가 너무 심해서 남자 동료들에게 "차라리 마주앉아 술을 받아먹겠다. 옆자리만 피하게 해달라"고 양해를 구하고 테이블 맞은편에 앉아도 봤지만 이내 "이리 와봐."라며 저를 부릅니다.
김지영씨와 마찬가지로 저는 당황스럽고 수치스러웠습니다. 그러나 제가 좌절한 가장 큰 이유는 단지 여성으로서, 남성이 원치 않는 신체접촉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남자 동료들과 동등하게 업무를 하고 동등하고 깨지고 동등하고 경쟁하는 존재가 아니라, 그저 무수리같고 비타민같고 꽃같은 취급을 받아야한다는 것이 못내 분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제가 이런 이야기를 했을 때 동료/선배들의 반응입니다. 남자 선배들은 대개 "신체 접촉에 의해 기분이 나쁠 수도 있겠다" 정도에는 공감하는 반면 그것을 표현해서는 안된다고 조언합니다. 그게 '사회생활'이라는 겁니다. 한번은 인상을 쓰는 저를 보며 한 남자 선배가 "표정 관리 좀 하라"는 조언을 한 적도 있습니다. 아래 질문에 대답한 김지영 씨처럼, 싫은 티 내지 말고 그냥 '유도리 있게' 넘기라는 것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가장 끝자리에 말없이 앉아 고개만 끄덕이던 중년의 남자 이사가 물었다.
"여러분이 거래처 미팅을 나갔단 말입니다. 그런데 거래처 상사가 자꾸 좀, 그런, 신체 접촉을 하는 겁니다. 괜히 어깨도 주물주물하고, 허벅지도 슬쩍슬쩍 만지고, 엉? 그런 거? 알죠? 그럼 어떻게 하실 겁니까? 김지영씨부터."
김지영 씨는 바보같이 당황하는 모습을 보여도 안 될 것 같고, 너무 정색하는 것도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할 것 같아 그 중간 정도로 답했다.
"화장실에 다녀오거나 자료를 가지고 오면서 자연스럽게 자리를 피하겠습니다."
두 번째 면접자는 명백한 성희롱이며 그 자리에서 주의를 주고, 그래도 고쳐지지 않는다면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중략)
그리고 가장 오래 모범 답안을 고민했을 마지막 면접자가 대답했다.
"제 옷차림이나 태도에 문제는 없었는지 돌아보고, 상사분의 적절치 못한 행동을 유발한 부분이 있다면 고치겠습니다."
- <82년생 김지영> p.102
"그게 우리가 여자로서 살아남을 수 있는 방법이야."
무엇보다도 실망스러웠던 것은, 여자 선배들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었습니다. 부서장의 행동이 기분나쁘지 않냐는 저의 물음에 그것이 이 조직에서 '여성으로서 살아남는 법'이라고 했습니다. 업무적으로 곤란한 상황에서 남자 동료들은 하지 못하는 애교로 상황을 무마하기, 회식 자리에서 옆자리에 앉아 꺄르륵 즐거운 분위기를 연출하는 '비타민' 역할 하기, 힘 쓰는 허드렛일은 '당연히' 남자 동료들에게 부탁하고 그 사이에 더 중요한 업무를 해서 인정받기 같은 것들을 여성으로서의 노하우라며 이야기해줍니다. 눈을 깜빡깜빡하며 콧소리로 "그냥 과장님이 해주시면 안돼요? 호호" 라고, 황당할 정도로 당당하게 이야기하는 여자 선배의 모습에 저는 아연실색했습니다.
저의 부서장은 입버릇처럼, 요즘 세상에 남녀가 어디있느냐, 나도 딸 가진 아빠인데 여사원들이 충분히 역량을 발휘할 수 있게 서포트 하겠다고 말합니다. 회식자리에 옆에 끼고있고, 업무 보고가 미흡해도 귀여워만 하며 덜 혼내고, 사무실을 지나다니면서 시덥지 않은 농을 거는 것이 그의 "서포트"인걸까요?
딸을 데리러 간다며 회식자리를 떠나는 부장을 보며 김지영씨는 생각합니다. '당신의 그 소중한 딸도 몇 년 후에 나처럼 될지 몰라, 당신이 계속 나를 이렇게 대하는 한.' 저는 김지영씨와 마찬가지로, 그의 딸도 꼭 그와 같이 좋은 상사를 만나서 예쁨을 가득 받고 술자리에 불려다니며 깍지를 끼고 팔짱을 끼는 '서포트'를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